2016년 6월 30일 목요일

06/30/2016


어제는 전반적으로 집중력이 좀 떨어졌다. 
연구 작업도 했고, 독서도 했고, 운동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워밍업이라는 이름으로 무의미하게 보냈다. 

어제 자리에 누워 생각을 해다가,
지금은 나를 성장시키고, 치열하게 성과를 내야 하며, 동시에 무사히 과정을 마쳐야 하는 시기임을 상기했다.  
그래서 장기적 투자가 요구되는 운동과 공부를 좀 더 확실히 하자는 생각을 했다. 

피부 노화는 어쩔 수 없지만 운동으로 건강미라도 건사할 수 있고, 마침 술도 잘 안 마시는 상황을 맞이했으며, 공부도 결국 체력이 받쳐줘야 하고, 운동은 장기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지금은 잉여 시간이 넘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존재 이후 가장 무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당장 헬스장을 달려가고 싶지만 우선은 페이스를 올리기로 한다. 유산소 운동은 어쩌지.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티클을 좀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업은 거의 포기했고, 
책도 읽어보고, 온라인 강좌도 수강했지만 구미에 맞는 것을 찾기는 어려웠고,
결국 필요한 것만 발췌하는 것이라면 구글신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교수든 선후배 동기든 연구 주제가 다르면 어차피 물어봐도 모르는 것 같고.
아티클은 연구 트렌드, 이론적 지식, 연구 방법, 좋은 논리와 표현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거다 싶은 아티클을 찾으려면, 익숙치 않은 방법이나 내용의 아티클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글로 정리해서 업로드 하려면, 욕심 내지 말고 일주일에 최소 1편 이상, 가급적 2편 이상으로 목표를 잡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생각은 2월부터 실천하려고 했는데 고작 2편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막상 연구 주제나 방법 등 여러 가지 점이 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좋은 아티클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핑계고, 읽는 버릇을 둬야 좋은 논문도 만나지 않겠는가. 

Journal
1. M논문, E논문, S논문은 결과는 기다리는 중
2. MM논문 완성곧 저널 투고.

Conference
1. B, G, C 논문 완성곧 학회 투고.
2. M논문진행 중. + MJ 데이터와 비교 여부 고민.
3. H논문진행 중
4. F논문진행 중

Research
1. H교수 syllabus: 한국에 자료 요청하기
2. 3L논문: H에게 연락하기
3. G, M data: H 와 협업 논의. 8월 되어서야 가능할 듯. 
4. I data: 다음 주에 확인하자

2016년 6월 29일 수요일

06/29/2016


어제도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H논문은 논의의 절반 정도를 작성했고, 나머지 절반의 논지도 구성했다.
서론부터 다시 퇴고하더라도 7월 안으로는 끝날 것 같다. 
 
M논문도 비슷한 상황이다. 다만 하기 싫을 뿐.

문득 혼자 여행을 가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관광지에 대한 버킷리스트를 짜고,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은 졸업 전에 들러야겠다. 
사실 졸업 직후 미국을 한 바퀴 돌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 혼자서는 무리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우선 7월은 MLB 경기를 보러 갈 생각이다.  

Journal
1. M논문과 E논문 결과는 기다리는 중이다애증의 논문들이다.
2. S논문 완성. 곧 저널 투고.
3. MM논문 완성곧 저널 투고.

Conference
1. B, G, C 논문 완성곧 학회 투고.
2. M논문진행 중. + MJ 데이터와 비교 여부 고민.
3. H논문진행 중
4. F논문진행 중

Research
1. H교수 syllabus: 한국에 자료 요청하기
2. 3L논문: H에게 연락하기
3. G, M data: H 와 협업 논의. 8월 되어서야 가능할 듯. 
4. I data: 다음 주에 확인하자

2016년 6월 28일 화요일

06/28/2016


어제는 이틀 간 좀 어긋났던 밸런스를 찾은 것 같다. 
연구도, 운동도, 휴식도 다 잘 이루어진 것 같다. 

저녁엔 잠깐 집 앞에 나가 바람을 쐬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환경은 한적한 시골로 아주 심심하다. 
그래도 마음 먹으면 공부하기엔 역시 최적이다. 방해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경쟁사회에 익숙해서 그런가. 경쟁자들로부터 자극을 받는 것에 기죽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할 때 잣대가 되어줄 수 있는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없어서 좀 아쉽긴 하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친구도 술집도 많이 없긴 하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기간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내 인생에서 이리 한적한 시골에 머물며 지금처럼 연구에 전념할 시기도 아마 다시는 없을 것 같다.  포닥이나 안식년처럼 아마 비슷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 때는 지금과는 신분도 입장도 마음가짐도 다르겠지. 

그래서 좀 더 즐기기로 했다. 여름이라 낮에는 덥고, 초저녁에 잠깐씩 나와서 refresh하면서  자연환경도 접하고.

한편, G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아마 연구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항상 후속 연구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자체적인 데드라인도 만들어지고 좋은데... 
아마 F연구가 끝나면, G랑 M 데이터로 후속연구가 이루어지긴 하겠지만 그때까지 좋은 데이터를 구할 수 없다면, 아티클을 읽으면서 박사학위논문에 대해서 고민해보려고 한다. 

H논문은 어제 꽤 많이 작업을 했다. 오늘은 discussion draft를 작성할 계획이다. 
논리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만 해결되면..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의 논문은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M논문도 한 문단은 써야지.


Journal
1. M논문과 E논문 결과는 기다리는 중이다애증의 논문들이다.
2. S논문 완성. 곧 저널 투고.
3. MM논문 완성곧 저널 투고.

Conference
1. B, G, C 논문 완성곧 학회 투고.
2. M논문진행 중. MJ 데이터와 비교 여부 고민.
3. H논문진행 중
4. F논문진행 중

Research
1. H교수 syllabus: 한국에 자료 요청하기
2. 3L논문: H에게 연락하기 
3. I data: 다음 주에 확인하자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06/27/2016


재밌는 연구를 해보고 싶다.
시사점을 생각하고 출간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선택되고 변형된 주제는 나의 관심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M논문과 H논문을 끝내고 F논문 마무리그리고 G데이터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면 되는데… M논문이 재미가 없어서 그런지 하루에 한 문단 이상 작업하기가 어렵다.

하루에 M, F, H를 한 문단씩 작업해볼까 한다. 마치 영어가 지겨우면 수학을 공부하고, 수학이 지겨우면 국어를 공부하고, 결국 다 지겨우면 그제서야 쉬는그런 돌려 막기식 작업이라도 해야겠다.

다행히 시간은 많다. 남은 6월과 7월 한달 간의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8월도 절반 이상은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Journal
1. M논문과 E논문 결과는 기다리는 중이다애증의 논문들이다.
2. S논문은 곧 제출?
3. MM논문 완성. 곧 저널 투고.

Conference
1. B, G, C 논문 완성. 곧 학회 투고.
2. M논문진행 중. MJ 데이터와 비교 여부 고민.
3. H논문진행 중
4. F논문진행 중

Research
1. H교수 syllabus: 한국에 자료 요청하기
2. H data: N대표에게 연락하기
3. 3L논문: H에게 연락하기 
4. I data: 다음 주에 확인하자.
5. G data: 컨퍼런스 준비용


2016년 6월 26일 일요일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시즌2 21화~完)/김창대


#21.
뫼비우스의 띠
Dear Mr. Cheon,

Congratulations! I am pleased to inform you that your paper has been accepted……

붙었다. 마이크로(MICRO)[1].

1 저자인 길영은 메일 확인마저 계획된 시간에 하는 사람이다. 그 덕에 제2 저자인 준상이 먼저 메일을 확인했다. 첫 제출에 붙다니. 그것도 마이크로(MICRO).

처음 제출한 논문이 붙는 경우는 흔치 않다. 처음 제출할 때는 부족한 면이 있는 상태에서 그냥 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학도들은 마감이 있어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공학도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성질일 수도 있지만.) 그러니 마감부터 정하고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감을 한 번 지키고 나면, 다음번 마감 때 좋은 논문을 써내기가 쉬워진다. 페이스북에 새 글을 올리는 건 어렵지만, 1년 전 글을 공유하며 몇 마디 덧붙이긴 쉽지 않은가. 그리고 논문을 떨어뜨릴 때도 리뷰[2]를 보내주기 때문에, 논문의 개선 방향도 잘 잡을 수 있게 된다.

준상은 길영에게 메일을 보았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2 저자는 야구로 치면 4번 타자 같은 것이다.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때가 많지만, 승수는 투수가 챙겨간다. 나중에 누군가 이 논문을 인용할 때도 ‘Cheon et al.’의 논문이라고 쓸 것이다. ‘전길영 등’이라는 의미다.

무엇보다, 준상도 마이크로(MICRO)에 논문을 내보고 싶었다. 교수님이 자신의 연구가 아니라 길영의 논문을 내기로 한 것도 여전히 서운했다.[3] 이미 학회 논문 3편에 저널 논문 2편이 있긴 하다. 그래도 마이크로(MICRO) 같은 최고 학회 논문 하나만 더 얹어주면 완벽할 것 같았다. 박사 4년차에도 활발하게 새로운 연구를 했다는 증빙도 되니까. 그래야만 해외 포닥[4]도 쉽게 뽑히고, 나중에 교수 자리 얻기도 쉬울 것 같았다. 그 때 그 3주 동안 준상의 연구를 정리해서 논문을 냈다면, 붙을 수 있었을까? 근거는 없지만 그럴 것만 같다. 길영의 논문이 붙은 것을 보니 더더욱.

“형! 메일 봤어요? 이거 붙은 거 맞죠?

길영이 갑자기 소리가 크다. 이제야 메일을 확인한 모양이다.

“그래? 메일이 왔어?

준상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겉으론 축하해줘야 할 테니, 이 편이 나았다.

강준상(4): 이야, 붙었네! 축하해! 첫 제출에 붙다니 대단한 걸!
전길영(2): , 고마워요. 형이 도와준 덕분이에요.
강준상(4): 니가 잘해서 그렇지 뭐.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같은 방에 있던 정길이 끼어든다.

심정길(3): , 너네 대화가 너무 의례적인 거 아냐? 근데 어디 붙은 거야?
전길영(2): 마이크로(MICRO)!
심정길(3): , 몇 달 전에 냈던 그거? 이야, 대단한데! 길영이 너 커피라도 한 번 쏴야 하는 거 아니냐?


같은 시각, 정원도 메일을 하나 받았다.

이번에 준상이 디펜스[5] 하는 날, 네 프로포잘[6]을 같이 하면 어때? 지난번에 못 냈던 것을 바탕으로 하면 될 듯.

권대성

교수님이 보낸 메일이다. 정원에게 프로포잘을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원은 디펜스란 단어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쇼트트랙으로 치면 프로포잘은 “한 바퀴 남았다고 울리는 알람” 같은 것이고 디펜스는 결승선 통과와 같은 것이다. 자신의 동기인 준상은 이제 결승선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정원이 무슨 대한민국 쇼트트랙 팀 같은 대역전극[7]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래도 함께 출발한 선수가 결승선 테이프를 끊어버리는 건 어지간한 스포츠 정신이 없이는 맥 빠지는 일 아닌가. 그리고, 그래도 그렇지. 동기의 디펜스 소식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되다니. 자신에겐 언질 한 번 없었는데.

정원은 당장 옆방의 준상에게 찾아갔다.

김정원(4): 준상! 너 디펜스 한다며!

당황한 준상보다 정길이 먼저 반응했다.

심정길(3): 진짜야?
강준상(4): , , 날짜를 잡긴 했는데, (정원을 보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김정원(4): 교수님이 알려주더라. 근데 내게 네 소식을 그렇게 들어야겠냐? 그래도 우리가 동긴데.
강준상(4): , 미안. 날짜가 좀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오늘의 두 번째 거짓말. 디펜스 날짜는 갑자기 잡힐 수 없다. 심사위원을 맡을 교수님 다섯 분의 일정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준상은 그냥 좀 그랬다. 프로포잘 기약도 없는 정원을 두고 먼저 졸업을 하게 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정원 앞에 대고 디펜스를 하게 되었노라고 굳이 알려주는 것도 좀 그랬다. 괜히 자랑만 떠벌리는 거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적당한 타이밍이 없었을 뿐이다.

심정길(3): 어쨌든, , 축하한다. 그래, 너 같은 애가 박사를 받아야지.

이런 식으로 터뜨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준상은 수습이 필요했다.

강준상(4): , , 그럼 어쨌거나, 우리 오랜만에 커피나 한 잔 하러 갈까요? 길영아, 나랑 같이 커피 쏘자. 논문도 됐는데.
김정원(4): . 너네 마이크로(MICRO) 논문 된 거야?
전길영(3): , 아까 메일 왔어요.
김정원(4): , 정말 다행이다. 올해 교수님 실적은 누가 채워주나 했는데. 네가 채워주는구나.

투수를 제외하고 승수를 쌓아가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감독이다. 교수님이 맡는 역할이다. 준상과 달리, 정원은 길영이 논문이 붙은 게 정말 기뻤다. 자기가 못하면, 팀이라도 잘 되는 게 좋으니까.

심정길(3): 그래, 그래서 내가 커피라도 한 번 쏘라고 부추기던 중이었어. 너네 방에 국현이랑 보영이도 있지? 같이 가자.


간만에 연구실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학교 안에 있는 카페다.

먼저, 논문이 붙은 것을 축하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이크로(MICRO)가 열리는 하와이에 대한 서로의 지식을 나누었다.[8] 이어서 준상의 디펜스 소식을 축하했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김정원(4): 보영아, 실험 결과는 나왔어?

갑자기 공격이 들어간다. 결혼 2년차 부부에게 “애는 들어섰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국현(3): , 여기 교수님 오셨어요?
강준상(2): , 넌 꼭 아무데서나 연구 얘기를 하더라.[9]
전길영(2): 그래요. 보영이 커피 마시다 체하겠어요.

온갖 구박 후에 이어진 보영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전보영(2): 오빠는요? 그 때 그 실험 결과 어떻게 됐어요?

“애는 들어섰냐?”고 물어본 사람이 알고 보니 6년차 부부였던 거다.

김국현(3): , 정길이 형, 팝콘 좀 사다줘요. 기 싸움이 팽팽한 게 재밌을 것 같아요.
강준상(4): 근데, 보영이 너, 정원이랑 연구 같이 하더니 말하는 게 정원이처럼 변했다.
심정길(3): , 보영이도 시집은 가야지. 지금 뭔 말 하는 거야?

아마도 준상의 다음 말은 “정원이가 어때서요?”일 것이다. 정원은 황급히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김정원(4): , 그거, 일단은 나왔어.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평균 3%쯤 좋아지더라.
강준상(4): , 대단한데? 너 이제 프로포잘하는 거야?

이런 질문, 정원이 한두 번 들어봤겠나. 하지만 오늘은 답할 수 있었다.

김정원(4): 아까 교수님이 너 디펜스 하는 날에 나도 프로포잘 하라고 하시더라. 그 때까지 어떻게 준비하냐. 이제 3주쯤 남았는데.
김국현(3): 에이, 그래도, 발표하면 정원이 형 아닙니까.

보영은 대답을 회피하는 데 성공했다. 실험은 시작조차 못했다. 구현부터가 그저 막막했다. 정원이 언제든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만, 지금 이 단계는 보영이 스스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부럽다. 프로포잘도 그렇지만, 실험 결과가 나온 것부터. 그동안 열심히 하셨으니 응당 받아야 할 결과겠지만, 그래도 부럽다.


강준상(4): 근데, 보영이도 이번에 졸업하는 거 아냐?

예상치 못한 공격이다.

전보영(2): , , 그래야 하긴 하는데….
강준상(4): 뭐가 잘 안 돼?
김국현(3): 에이, . 잘 안 되는 거 당연한 거고, 잘 되는 게 이상한 거죠. 아실 만한 분이 그래요?
강준상(4): , 미안. 너 스케줄러 쪽 한다며, 정원이한테 많이 물어보면서 해. 정원이가 스케줄러 전문가니까.
심정길(3): 그래, 젊은데 뭔들 못하겠냐.
김국현(3): 형은 또 왜 뜬금없이 젊음 타령이에요.
심정길(3): 보영이가, 스물여섯인가?
전보영(2): 스물다섯이요.
심정길(3): 진짜? 그거 밖에 안 됐어? , 어리다, 어려. 진짜 내가 스물다섯이었으면 좋겠다….

정길은 학부 4학년 때 친구들과 구상하던 사업이 생각났다. 인터넷방송국, 그러니까 지금의 아프리카TV[10] 같은 것이었다. 아마추어들이 방송하는 걸 누가 얼마나 보겠느냐며 농담으로 넘겼었는데. 와우(WoW: World of Warcraft)[11]를 할 시간에 사업이나 추진해 볼 걸.

사업 대박까진 아니어도 좋다. 의학전문대학원을 노렸다면 의사도 될 수 있을 나이, 무작정 세계일주에 올랐다면 베스트셀러 작가도 될 수 있을 나이, 대학원생이더라도 열심히만 하면 교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 정길은 보영의 스물다섯이 부러웠다. 사실, 젊음이란 누구에게나, 어렸을 땐 꿈꾸고 젊을 때는 낭비하다가 늙어서는 부러워하는 그런 것이긴 하지만.


김국현(3): 에이, 그래도 형은 여자친구가 있잖아요.

정말, 이놈의 연구실에선 감상에 빠질 새가 없다니까.

심정길(3): , 요즘 외롭냐?
김국현(3): 밤이 아주 외로워 죽겠습니다. 기숙사 싱글 침대에서 혼자 잠을 청해봤자, 잠이 와야 말이죠.
심정길(3): 국현아, 내 여자친구 통금 있어. 나도 혼자 자.
김국현(3): , 그래요? 그럼 밤에 맞을 외로움을 낮에 미리 달래놓고….
심정길(3): , 임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김국현(3): 큭큭큭. 죄송해요, 근데 정말 부러워요. 요즘 형, 얼굴이 완전 환해졌어요. 얼마나 웃으시는지, 팔자주름 푹푹 들어가네요.
심정길(3): , 그래? , 그런가?

정길은 이 이야기를 여자친구에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김국현(3): 역시, 부정은 안 하네요.
심정길(3): 내가 생각해도 좀 그런 것 같긴 해서.

웃어넘기자니 사실이고, 진지하자니 잘난 척인 이런 대화라니. 이럴 땐 화제 전환이 최고다.

전길영(2): 국현이 형, 근데 훈련소는 어땠어요? 저도 내후년엔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빡세요?
김국현(3): , 정말? 너 아직도 훈련소 안 갔다 왔어? 내년부터 육군 훈련소랑 해병대 훈련소 합친다는데? 다같이 해병대 훈련 받는다던데?
전길영(2): 에이, , 장난치지 마시구요.
김국현(3): 진짜야, 군대에서 들었어.
전길영(2): 준상이 형, 진짜에요? 진짜 해병대 훈련 받아요?

길영은 진지하게 겁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강준상(4): 글쎄다? 군대에 갓 다녀온 국현이가 잘 알겠지 뭐.

당연히 농담 말투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진담일까봐, 길영은 무서웠다.

행복과 불행의 사이클이 완성되었다. 길영인 논문이 붙었고, 그걸 부러워하는 준상은 디펜스를 하고, 그걸 부러워하는 정원은 실험결과가 나왔고, 그걸 부러워하는 보영은 어리고, 그걸 부러워하는 정길은 여자친구가 있고, 그걸 부러워하는 국현은 이미 훈련소를 다녀왔다. 그걸 부러워하는 길영인 논문이 붙었고….

뫼비우스의 띠라는 게 있다. 띠종이를 한 번 꼰 다음, 양끝을 이어서 만드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팎 구분이 없다. 안쪽이라고 생각한 곳을 따라가다 보면 밖이 되고 다시 안이 되면서 전체를 한 바퀴 돌게 된다.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다.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겐 행복하게 보인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이 모든 게 자신이 꼬여버린 탓은 아닐까? 마음만 올바르게 이어준다면, 불행을 행복으로 감싸놓고 살 수도 있지는 않을까? 
    
[1] 마이크로(MICRO): 컴퓨터구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회들 중 하나. 정식명칭은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이며, 보통 줄여서 마이크로(MICRO)라 부른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2014년에 열린 학회의 논문 채택률은 19%였다. 경쟁률이 5 1쯤 됐다는 얘기다.
[2] 리뷰(Review): ‘영화 리뷰’할 때 리뷰와 같은 뜻이다. 번역하면 ‘평론’ 정도.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면, 논문당 3~5명 정도의 심사자들이 배정된다. 심사자들은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들로 구성된다. 이들이 논문의 장단점에 대해서 글을 써준다. 점수도 매긴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학회에 채택할 논문을 최종 선정한다. 논문이 채택되지 못하더라도 리뷰는 보내준다. 논문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의 객관적 평가를 볼 수 있다.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 (10) - http://scienceon.hani.co.kr/292991
[4] 포닥: 포스트닥터(Post-Doctor)의 줄임말. 한국어로는 ‘박사 후 과정’이라고 한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 학교 연구실에 소속이 되어 연구하는 기간제 계약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 연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남아서 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학교(해외를 포함한)로 가서 새로운 연구 경험을 하는 경우도 많다.
[5] 디펜스(defence):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논문을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교수님들 앞에서 박사학위논문 내용을 구두발표 하는 것으로 심사 받게 된다. 구두발표를 마친 후에는 교수님들을 질문을 던지는데, 여기에 대답까지 잘 해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교수님들의 공격(질문)을 잘 막아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과정을 디펜스(defence, ‘방어’라는 뜻)라고 한다.
[6] 프로포잘(Proposal):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보통 다섯 명의 박사(주로 대학 교수들)에게 구두 발표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심사를 받기 전에(몇 개월에서 2~3년 전) 같은 심사위원들에게 박사학위 내용에 대해 예비 심사(역시 구두 발표로 진행됨)를 받으면서 조언도 듣는 시간을 가진다. 이것을 프로포잘이라고 한다.
[7] 2007-2008년에 열린 쇼트트랙 3차 월드컵 남자 계주 5000미터 결승전에서, 대한민국 팀은 경기 도중 두 번이나 넘어지고도 최종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RuON8rrIMxE
[8]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1에서 준상의 논문이 아스플로스(ASPLOS) 학회에 붙었었다. 그래서 학회가 열리는 터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5) 딸기파티 -http://scienceon.hani.co.kr/170425
[9] 정원은 연구실 엠티(MT)에 가서도 연구 이야기로 흥을 깬 적이 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1) 놀이 - http://scienceon.hani.co.kr/303642
[10] 아프리카TV(Afreeca TV): 개인 인터넷 방송 플랫폼. 최소한의 장비만 있다면, 그리고 법에 저촉되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내용이든 방송할 수 있다. 이름은 “Any FREE CAsting TV”의 약자라고 한다.
[11] 와우(WoW): 월드 오프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라는 게임을 지칭하는 약어. 스타크래프트로 유명한 블리자드(Blizzard)에서 출시한 온라인 게임이다.


#22. 현실

“자네, 지구가 얼마나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지 아나?

예은의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정길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느 때처럼 예은의 집 앞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통금 시간까지 있다가 헤어질 참이었다. 그런데 불쑥 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들어오라 하셨다. 초면인데 거절할 수가 있나. 그래서 시작된 대화다. 나이, 직업 등, 예은에게 이미 들었을 법한 질문만 하시더니, 갑자기 지구의 자전 속도는 왜?

정길은 지구의 반지름이 궁금했다. 반지름만 알면 원주율을 사용해서 둘레를 계산할 수 있다. 24시간에 한 바퀴씩 돌 테니까 속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확히 24시간은 아니다. 그래도 어림값은 나올 수 있다. 정길은 정신을 차렸다. 질문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해석했다. 역시, 지금은 모른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잘 모르겠습니다.
“시속 1700킬로미터 쯤 된다고 하네.[1] 웬만한 비행기보다도 훨씬 빠른 거야. 그렇지?
“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자전한다는 걸 전혀 못 느껴. 왜 그런지 아나?

정길은 다시 고민했다. 지구가 워낙 커서 등속 운동하는 것 같아서 그런 걸까? 각속도가 있는 것이지 가속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면 우리 몸의 평형 기관 같은 데서 적응을 해버린 결과?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물건들이 똑같은 속도로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지.
“네, 맞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도 똑같아. 남들과 똑같이 열심히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티도 않나. 안 하는 거나 똑같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지.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정길은 ‘명심’이라는 단어를 언제 마지막으로 사용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박사 공부도 마찬가지야. 박사과정 밟고 있다고 해서 안주하면 안 돼.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면, 늘 최선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더 많은 성과를 내야지. 더 빨리 졸업하고, 더 빨리 성공해야,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거야.
“맞습니다.
“가정을 책임진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네. 자네가 아직 현실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요즘 세상살이가 쉬운 게 아냐. 하지만 남자로 태어났으면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거야. , 자식, 부모님까지.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늦었네. 이만 가 봐.
“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정길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쓰면서 일어났다. 어머니께도 인사를 드리고 문밖으로 나왔다. 예은이 따라 나왔다. 문을 닫았다. 정길은 안도했다. 끝났구나.


“오빠, 많이 불편했지? 내가 미안해. 아빠는 왜 갑자기 나와 가지고. 아빠가 했던 말들 너무 신경 쓰지 마.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불편을 느낄 새가 없었다.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했다. 예은의 아버지니까.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아버님께서 다 맞는 말씀 하신 건데. 간만에 자극도 받고 좋았어.
“아니, , 아빠는 벌써부터 가정을 책임지고 어쩌고 그래? 괜히 우리 오빠 부담만 되게.

이 때다. 정길은 예은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낼 기회만 기다려왔다. 아버님께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시다니. 멋진 멘트마저 떠올랐다. “너는 가정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라고 되묻는 것. 그럼 예은은 당황할 것이다. 대답도 하기 전에 몰아 부치는 거지. “나는 너와 함께하는 가정을, 책임지고 싶은데.” 목소리 진동수도 절반쯤으로 낮추면 좋겠다.[2] 완벽하다.

그런데 멈칫, 했다. 정말 ‘책임’질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대체 얼마를 벌어야 할까? 마당까진 아니지만 화단은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유명하진 않아도 주가는 건실한 중소기업 사장을 아빠로 둔, 예은이를 ‘책임’지려면 말이다.

박사과정 월급으론 당연히 안 된다. 아버님 말씀도 빨리 졸업하고 아주 좋은 데 취직하라는 말이겠지. 연봉 높고 정년 보장되는 그런 데 말이다. 그런데 박사를 딸 수는 있을까? 정말 자전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되긴 될까? 정길은 3년간 노력했다. 하지만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자신이, 성적도 안 오르는 공무원시험에 몇 년째 매달리는 고시생들과 무엇이 다를까?[3]

차라리 그만 둘까? 서른 살 먹고 3년간의 공백란이 생긴, 서른셋의 석사 학위 소유자를 누가 받아줄까? 아니, ‘아주 좋은 데’서 받아주느냐가 문제이겠구나. ‘현실적으로’ 말이다.

“무슨 생각해?

한참이나 답이 없자, 예은이 물었다.

“어? , 예은이는 밤에 봐도 예쁘네. 여기 가로등 진짜 좋다. 내가 넋놓고 있을 정도로.

그래도 서른셋. 정길은 인생 사는 지혜는 있다.

“아이, 뭐야.
“예은아, 여기서 오래 이야기하면 부모님 또 걱정하실라. 이미 10시 넘었잖아. 내일 또 만나자. 들어가서 또 연락할게. 알았지?

정길은 서둘러 인사하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양반다리를 오래해서인지, 다리가 조금 저렸다. 그래서겠지.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보영은 오랜만에 대학시절 단짝들인 가영, 신영과 만났다. 다음 주면 가영이 결혼한다. 그래서 한 번 뭉쳤다. 밤을 꼴딱 새우자며 싸구려 호텔을 잡았다. 치킨도 시켰다.

박가영(예비신부): 신영아, 넌 어떻게 이런 자리에까지 일거리를 들고 오니?

신영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다.
 
이신영(디자이너):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수정해서 보내달라잖아. 이거 급한 거야.
박가영(예비신부): 아니, 애초에 이런 자리에 노트북을 가져오는 것부터가 노답[4] 아니냐?
전보영(대학원생): 맞아, 누군 안 바쁜 줄 알아? 나도 읽을 논문이 산더미라고!
이신영(디자이너): 미안, 미안. 5분만 기다려줘. 아직 치킨도 안 왔잖아.
박가영(예비신부): 그러니까 치킨에 대한 기대감에 대해 이야기할 타이밍이잖아.
이신영(디자이너): 나만 빼고 다들 야근 중인데 이 정도도 안 해줄 순 없잖아. 이해 좀 해주라. 오늘 진짜 바쁜 시간 쪼개서 온 거라니까.
박가영(예비신부): 오늘이 제일 낫다며!
이신영(디자이너): 제일 나은 게 이 정도야. 잠시만! , 이것만 하면, 아이 참, 여기도 좀 손봐야겠네.
전보영(대학원생): 놔둬라. , 일 욕심 엄청 났잖아. 디자인과 애가 컴퓨터동아리를 한 것만 봐도 모르니.

셋은 컴퓨터동아리에서 만났다. 신영은 동아리 유일의 디자인과 학생이었다. 디자이너로서 개발자를 이해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며 동아리에 들어왔다. 동아리 활동을 위해 컴퓨터과 수업까지 들었다. 각종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박가영(예비신부): 그래, 동아리 창설 이래 최초랬잖아.
전보영(대학원생):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신영은 대꾸도 안 하고 일했다. 치킨이 와도 일했다. 가위바위보도 없이 보영과 가영이 닭다리를 뜯는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닭날개 두 쪽까지 모두 사라진 뒤에야 노트북을 덮었다.

이신영(디자이너): 미안미안미안미안미안! 이제부터 신나게 놀자!
박가영(예비신부): , 신나게 놀아, 이미 치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이 다 사라졌는데!
이신영(디자이너): 미아아아안! 이제 기분 풀어어! 우리 쓰리-제로(three-zero)가 오랜만에 뭉쳤잖아!

쓰리-제로는 동아리에서의 세 사람의 별명이었다. 이름 끝자가 ‘영’인 세 명이 단짝이라서.

이신영(디자이너): 아차차차, 내 정신 좀 봐. 내가 뭘 준비해왔는지 알아?

신영이 가방을 뒤적였다. 하나를 꺼낸다.

이신영(디자이너): 짜잔! 이거 고급 와인이야! 내가 특별히 준비했어. 오늘 밤에 싹 비우자!
전보영(대학원생): 우와, 이거 비싸 보이는데?
박가영(예비신부): 겨우 이런 걸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이신영(디자이너): 야아아~ 왜 그래애애~

신영이 가영을 간지럽힌다. 가영이 막 웃으며 난리를 친다. 갑자기 보영이 근엄하게 외친다.

전보영(대학원생): 치킨 식는다!

보영의 외침에 일동 정지한다. 그리고 후다닥 가부좌를 튼다. 치킨을 든다.

박가영(예비신부): 잘못했습니다! 이제 치킨에 집중하겠습니다.
이신영(디자이너): 잘못했습니다! 치킨 만세!

그리고 동시에 한입 문다. 물자마자 웃음이 터진다. 백만 번쯤은 반복했을 대학시절 추억 팔이를 되풀이하며 치와와(치킨과 와인)를 즐겼다.



술기운으로 볼터치가 완성됐을 무렵, 가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박가영(예비신부): 근데, 신영이 너, 아직도 회사에서 잘 나가나보다?
이신영(디자이너): 잘 나가지. 새벽 같이 잘 나가고, 주말마다 잘 나가고.
박가영(예비신부): 좋겠다, 잘 나가서.

연결도 안 되는 말의 흐름이 왜 그리 무겁게만 느껴지는지. 보영은 가만히 있었다.

신영이 잠시 주저한다. 따라 놓은 와인을 소주 털어 넣듯 입에 쏟는다. 그리고 묻는다.

이신영(디자이너): , 결혼하고 계속 일 할 거야?

가영은 계약직이다.

박가영(예비신부): 이미 그만 뒀어.
이신영(디자이너): ? , 그래도 2년은 꼬박 채우고 나와야 할 거 아냐. 그래도 경력 2년입니다, 하려면 무슨 험한 꼴을 봐도 2년을 채워야 한다고 그랬잖아.
전보영(대학원생): 가영아….

보영은 겨우 입을 뗐지만, 할 말은 없었다.

박가영(예비신부): 그게 그렇게 쉽니? 어차피 몇 달 있으면 짤릴 거, 눈치 드럽게 봐가며 결혼준비 하기 드러워서 그만 뒀어.
전보영(대학원생): 재계약은 잘 안 되는 거야?

보영은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었다.

박가영(예비신부): 멀쩡히 다니던 사람도 결혼하면 속속 그만두는 판국에, 나 같은 계약직이 결혼한다는데 가만 놔두겠니?

이 대화를 남자들이 했다면 ‘사람’은 ‘여자’로 치환됐을 것이다.

전보영(대학원생): 어떡하니….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그래서 내가 결혼은 생각도 안 하는 거야. 허구한 날 밤 새는데 애는 언제 키우고, 주말마다 특근인데 시댁은 언제 가보니? 일을 계속 하려면 결혼을 하면 안 돼. 그게 내 결론이야.
전보영(대학원생): 그래도….

보영은 애써 입은 뗐지만 말줄임표 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이신영(디자이너):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결혼하고 애라도 낳고 다시 일할라치면, 사람들 시선이 바뀌는 거 있지?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도, 다들 올드해 보인다느니, 감각이 좀 떨어진 거 같다느니…. 진짜 무서운 건, 그게 너무 자연스럽다는 거야.
박가영(예비신부): 근데, 결혼 안 한다고 뭐 달라지니? 결혼 안 하고 늙어봐, 노처녀 소리밖에 안 듣잖아. 뭐 좀 따질라치면 히스테리고 한 번 웃어주면 남자 꼬시는 거고.
전보영(대학원생): 그럼 다시 취직은, 안 해볼 거야?
박가영(예비신부): 해야지, 돈은 필요하니까. 근데, 별 기대는 안 해. 돈 벌 수 있으면 아무 거나 할 거야.

가영은 와인잔을 잠시 응시하더니, 가만히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잔을 털썩 내려놓는다. 몸도, 한숨도, 털썩.

박가영(예비신부): , 와인 죽이네. 고맙다, 신영아.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내가 노처녀 소리를 골백번 듣더라도 결혼 안 하고 끝까지 버틸게! 그래서, 돈 많이 벌어서, 평생 와인 사줄게! 너 유부녀 됐다고 막 못 나간다 그러고, 그러면 안 된다아!
박가영(예비신부): 니가 부르는데 내가 못 나가겠냐. 오빠한테도 백만 번은 강조해놨어, 너네가 진짜 좋은 애들이고 평생 갈 친구라고.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우리 가영, 신영, 보영! 우리 쓰리-제로는 평생 가는 거다! 알았지?

보영은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석사과정이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니었다. 학교 밖이 야생 정글이라면, 학교 안은 최첨단 동물원이었다.

보영이 조용한 걸 신영이 눈치 챘다.

이신영(디자이너): 보영아, 근데, 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졸업하면?
전보영(대학원생): ? , 나….
박가영(예비신부): ? 너 혹시 나처럼 시집가고 막 그러는 거 아니지? 그치?
전보영(대학원생): , 박사과정 지원했었는데, 떨어졌어.

잠시 정적.

전보영(대학원생): 교수님이 학교를 옮기신 것도 있고, 다른 연구실도 남는 자리가 없대서. 그래서 이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나, 다른 대학원이라도 지원해봐야 하나, 고민 중이야.

또 잠시 정적. 가영이 뭔가 결심한 듯 정적을 깼다.

박가영(예비신부): 와우! 보영인 나랑 같은 백수가 되는 거네! 축하해! 이 길이 외롭진 않겠어!

신영과 보영도 가영의 진심을 읽었다.

이신영(디자이너): 야이씨, 너네 나 출근한 사이에 맨날 단 둘이 만나서 놀고 그럴 거야?
전보영(대학원생): 그러엄! 난 가영이랑 놀아야지. 백수끼리!
박가영(예비신부): 넌 돈이나 많이 벌어서 밤에 와인이나 사와!
이신영(디자이너): , 이 직장인의 설움이여!
박가영(예비신부): 보영아, 그러지 말고 너도 결혼해라! 이왕 같이 백수 되는 김에 유부녀 백수되자.
전보영(대학원생): 결혼은 혼자 하니? 남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이신영(디자이너): , 너 연구실에 그 오빠 있잖아. 전에 천문대 같이 갔던![5]
박가영(예비신부): 그래, 그 오빠 착해보이더만. 하는 짓도 좀 귀여운 것 같고. 잘 해봐.
전보영(대학원생):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냥 연구실 선배야.
이신영(디자이너): 그 오빠가 너한테 먼저 밥 먹자고 했다며, 천문대도 먼저 같이 가자고 하고. 너한테 호감 있는 거 아냐? 남자들은 허툰 데 시간 안 써.
박가영(예비신부): 맞아, 나 기억났어. 그 때 헤어지려니까 노래방도 가자고 했다가 술 한 잔 하자고 했다가 그랬다며, 그건 백프로지!
전보영(대학원생): 그냥 우연히 만나서, 심심하니까 같이 논 거야. 그게 다야. 그 다음에 아무 일도 없었어.
박가영(예비신부): 에이, 너도 그 오빠한테 호감 있잖아. 그치?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너 그 때 천문대 갔다 온 거 되게 신나서 얘기했잖아.
 
보영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호감이라니. 정원 오빠는 착한 오빠다. 거기까지다. 그냥 거기까지.

전보영(대학원생): 아니야아, 그냥 선배라니까.
박가영(예비신부): , 내가 그 분을 잘 모르긴 하지만, 너한테 들은 걸로 생각해보면 진짜 착한 사람이야. 너 그 사람 놓치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연구실 선배니까, 연구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되겠네. 연구하다가 모르는 건 무조건 그 오빠한테 물어보란 말이야.

사실 이미 그러고 있다.[6] 연구 분야가 겹쳐서이긴 하지만. 연구 분야가 겹친 것도 사실은 정원 덕분이다. 보영이 석사과정에 처음 입학했을 때 보영을 챙겨준 유일한 사람이 정원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논문을 읽었고, 그러다보니 비슷한 분야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영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정원은 착한 오빠니까. 다른 사람들도 곧잘 도와주니까. 아마 다른 여학생이 있었다면 그 학생도 잘 챙겨줬을 거니까.

전보영(대학원생): 에이, 됐어. 이제 다른 얘기하자. 무슨 얘기할까? 가영이 첫 날밤 대책 같은 거?
박가영(예비신부): 우와, 보영아. 너 이렇게 구식이었니? 요즘 시대에 첫 날밤 대책이라니.
이신영(디자이너): 너야말로 뭘 모르네. 요즘 시대니까 더더욱 대책이 필요한 거야. 더 특별해야 할 거 아냐.

셋은 더 이상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포근한 필터가 적용된 과거 이야기나 밝음 필터가 적용된 미래 이야기만 했다. 직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잡은 여자와, 결혼을 포기하고 직업에 매달리는 여자와, 아직은 순진한 학생일 뿐인 여자에게, 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 지금도 죽을 만큼 차갑다. 하지만 애써 탈출해봐야, 더 차갑다.

지구는 돈다. 매우 빨리 돈다. 우리는 모두 그 위에 올라 타 있다. 내려갈 수 없다.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얘기한다. 노력해서 현실을 이겨내라고.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빨리 돌아가는 세상을, 더 빨리 돌아서 이겨내라고 한다. 인간의 최고 시속은 37.6km.[7] 혹자는 얘기한다. 아예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남들 다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새로운 길로 가라고. 그러면 현실을 뛰어넘어 성공할 수 있다고. 자전에서 탈출하면, 우주미아밖에 안 될 텐데.

[1] 두산백과에 따르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007&cid=40942&categoryId=32287 ), 지구의 반지름은 6400km 정도다. 따라서 지구의 둘레는 40192km 정도다. 어림잡아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한다고 하면, 40192km / 24 hours = 1674km/h이다.
[2] 음악에서 한 옥타브 차이(낮은 도와 높은 도의 차이)는 물리학적으로는 음파의 진동수가 2배 차이나는 것이다. , 진동수를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한 옥타브 낮춘 음으로, 낮게 이야기 한다는 의미다.
[3] 지난 이야기에서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박사를 받기까지 최소한 3년 정도 더 걸리는 것으로 추산했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6) 참이슬 - http://scienceon.hani.co.kr/334267
[4] 노답: 영어 단어 No와 한자어 답()의 합성어. ‘답이 없다’는 의미다. 국적을 뛰어넘는 합성어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간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에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말도 순우리말은 아니라는…. (페이스북 ‘소피스트봇’ 페이지에서 인용 -https://www.facebook.com/sophistbot/posts/271792946496739)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8) 힐링 - http://scienceon.hani.co.kr/347008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9) 샛길 - http://scienceon.hani.co.kr/350763
[1][7]
국제육상경기연맹에 따르면, 1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은 우사인 볼트(Usain Bolt) 2009년에 세운 9.58초이다. 이를 환산하면 시속 37.6킬로미터이다. -http://www.iaaf.org/records/toplists/sprints/100-metres/outdoor/men/senior

#23. 평가

연구하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논문을 읽고, 논문 쓸 거리를 찾고, 구현을 해보다가, 잘 안 돼서 짜증이 난다. 초등학교 일기로 제출하면 딱이다. 속으로야 세계 최초를 추구하지만, 겉모습은 평범한 사무직이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나 두들긴다. 매일 매일.

물론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긴다. 새로 만든 것이 잘 돌아가면 짜릿하다. 어이없는 실수[1]로 실소할 때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낸 논문도 재밌다. 하지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배경지식이 너무도 많이 필요하니까. 웃긴 동영상 하나를 보기 위해 다큐멘터리 한 편을 시청해야 한다면, 누가 그 동영상을 보겠는가. 더군다나 그 다큐멘터리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한다는 수학이나 과학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이 이 소설에서 정원의 프로포잘 준비 과정이 통편집된 이유다. 한 달여 만에 프로포잘을 준비하느라 수많은 밤을 샜고, 수많은 낮을 잤다.[2] 구현[3], 실험[4]도 열심히 하고, 발표 자료도 수없이 다듬었다.[5] 인고의 시간이었다. 인고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재미는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정원이 프로포잘을 하고 준상이 디펜스를 하는 날이다.

그렇다고 통편집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한 번만 봐주시라. 이제껏 연구 이야기를 재밌게 하려고 수없이 노력하지 않았는가. 위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처럼 이미 한 번씩 다룬 소재들이기도 하다.


“이게 왜 안 되지?

정원은 프리젠터(프리젠테이션용 컴퓨터 리모콘)를 꾹꾹 눌러보았다. 컴퓨터가 반응하지 않는다. 왜지? 수신기를 다시 뺐다 꼽아봤다. 남은 시간 8. 충분히 일찍 왔었다. 그런데 노트북이 갑자기 업데이트를 시작하는 것이다. 자동업데이트는 누가 걸어놓은 거야. 겨우 끝마쳤다 싶었는데, 이번엔 프리젠터가 문제라니. 하아.

“왜, 뭐가 잘 안 돼?

준상이 물었다.

“프리젠터가 안 되네. 어제도 여기서 썼는데….
“좀 전에 업데이트 했다더니, 그러면서 디바이스 드라이버[6]가 꼬인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분석을 순식간에 해내다니.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 건가.[7]

“내 꺼 한 번 써볼래?

준상이 프리젠터를 하나 내민다. 노트북에 꽂았다. 몇 초 만에 반응한다. 정원은 버튼을 눌러봤다. 발표자료가 잘 넘어간다. . 안도했다. 준비성 철저한 녀석.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 거다. 분석도 훌륭하고 대책도 훌륭하다.

“잘 된다. 고마워.

준상은 다시 세미나실 뒤쪽에 가서 후배들과 함께 앉았다. 준상은 바로 뒤이어 디펜스를 해야 한다. 그런데 정원의 발표를 들으려 하다니.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 거다.



그제야 심사위원석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 발표자료 인쇄본이 놓여 있다. 주변을 둘러 음료와 간식이 빼곡하다. 아메리카노, 생수, 과일 음료부터, 쿠키 두 가지, 과일 세 가지, , 견과류, 초콜릿 까지. 심사위원들이 혹여나 목마르실까, 출출하실까, 당이 필요하실까 싶어 준비하는 것이다. 후배들이 대신 준비해준다.

“우와, 이건 누가 만들었니?

책상 위엔 사과를 깎고 잘라 오리 모양을 만들어둔 것이 있었다.

“저요!

뒤쪽에 앉아 있던 보영이 생글 웃으며 답한다.

“대단한데! 고마워!

정원도 한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성이 고마웠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간식이 점수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도 사람 아닌가. 잘 차려놓은 음식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심사도 조금 더 너그럽게 하지 않을까?

정원은 이어서 음식 배치를 확인했다. 여기에도 법칙이 있다. 먼저 건동수서(乾東水西)라 하여, 물기가 있는 과일 등은 왼쪽, 과자 등 마른 것은 오른쪽에 둔다. 오른손잡이 심사위원의 경우 펜을 오른손에 쥐고 잡고 왼손으로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다. 물기 있는 음식을 오른쪽에 두면, 왼손으로 집어서 가져오는 동안 책상 중앙에 있는 자료에 물기가 떨어질 수 있다. 이걸 방지하려는 것이다. 또한, 쇄설순근(碎屑脣近)이라 하여, 견과류 등 가루가 생기기 쉬운 음식은 최대한 입 가까이에 둔다. 비슷한 목적이다. 음료수 배치는 서고동저(西高東低)를 따른다. 왼쪽 끝에 생수병 등 상대적으로 높은 것을 두고 가운데로 갈수록 캔이나 병 음료 등 작고 낮은 것을 둠으로써, 심사위원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함이다.

“배치도 완벽하네. 진짜 고마워, 내가 다음 주쯤에 크게 한 번 쏠게.


 때 권대성 교수님이 들어왔다.

“준비 잘 됐지?
“아, . 열심히 고쳐 보긴 했는데요,

정원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때 얘기했던 거 있지.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들을 잘 정리하고 나서, 그걸 어떻게 해결했고 더 해결할 것인지를 잘 설명해야 해. ? 이야, 이거 사과야?

교수님이 잔소리 도중 오리사과를 발견했다.

“네, 보영이가 준비했습니다.

교수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뒤를 돌아 보영을 찾았다.

“대단한데, 시집가도 되겠어.[8]

그래, 바로 이래서 음식을 준비한 것이다. 정원은 흐뭇했다.

뒤이어 네 분의 교수님이 더 들어와서 앉았다. 다들 오리사과를 보고 칭찬을 던진다. 정원은 보영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보영은 손으로 조그맣게 브이(V)를 그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프로포잘을 하게 된 박사과정 4년차 김정원입니다. 제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준비하고자 하는 내용은 멀티코어 환경에서의 캐시 간섭 문제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협력을 통해 더 잘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딸깍. 프리젠터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제 시작이다.

이걸로 프로포잘을 해도 될까?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다. 프로포잘이란 “이런 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하고 묻는 것이다. 그를 위해 한 분야의 박사라고 불려도 괜찮을 만큼의 넓이와 깊이를 가진 연구 계획을 구체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또한 전반부에 대해서는 결과까지 함께 제시함으로써 연구 주제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정원은 영 자신이 없다. 자신이 풀려는 문제가 박사를 받을 만큼 중요한 것인지 부터가 의문이다. 실험 결과가 약간 있긴 하지만 약점이 많고, 앞으로의 연구 계획도 허술하다.

정원이 박사 1년차 때 꿈꿨던 프로포잘은 이런 게 아니었다. 더 넓은 주제와 더 많은 연구 결과와 더 구체적인 연구계획을 담은 것이었다. 연구 결과는 이미 두 편 정도의 논문으로 발표되어 있으며, 연구 계획으로는 이미 한, 두 편 정도의 논문 제출을 준비 중인 상태로 말이다. 이게 안 되어서 프로포잘을 미뤄왔던 것이었는데. 꿈을 좇으려다 시간에 쫓겨버렸다.

어쨌거나, 오늘은 해내야 한다. 이미 시작해버렸는데 물러날 순 없지 않은가. 선배들도 그랬을까? “프로포잘? 난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했어”라고 했던 게, 엄살이 아니었던 걸까?

정원은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설명했다. 교수들은 표정이 없다. 이따금 간식을 먹을 때만 얼굴 근육을 썼다.



발표를 마쳤다. 질의응답 시간이다. 지도교수이자 심사위원장인 권대성 교수가 진행 멘트를 한다.

권대성(교수): 이제 교수님들께서 질문도 해주시고 조언도 많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 많이 지적해주시면 디펜스 때까지 많이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의례적인 수사였을 것이다. 준상의 프로포잘 때도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원은 찔렸다. 정말 부족해서다. 그런데 정말로 ‘많이’ 지적해버리면, 디펜스는 얼마나 늦어져야 하는 건가?

교수들 간에 눈짓, 손짓이 오간다. 그 결과 첫 질문자는 A 교수로 정해졌다.

A 교수: 그래서 학생이 한 게 뭐죠?
김정원(4): ?

처음부터 세다.

A 교수: 멀티코어에서 캐시 간섭 문제야 오래된 문젠데, 오래된 문제를 다시 한 번 풀었다, 이게 끝이에요?
김정원(4): 저는 이 문제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협력 체계를 통해 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하나만 이용했을 때보다 더 다양한 옵션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정원은 발표 때 이미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A 교수: 그럼 오래된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풀었다?
김정원(4): .
A 교수: 그럼 이 문제가 정말 ‘풀렸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지?

상상도 못 했던 질문이다. 정원은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A 교수: 이 방식을 쓰면 캐시 간섭 문제가 정말로 해결이 된 건지 그걸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캐시 간섭 문제가 아예 없으면 성능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하는데, 이 연구에서 거기의 90퍼센트 정도까지는 따라잡았다든가. 뭐 그런 분석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90퍼센트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적 값이 얼마나 되는지는 분석을 해줘야, 이 연구 결과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거고, 앞으로 어디까지 더 할 수 있을 거다 이런 것도 알려주고,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안 했어요?
정원(4): 아직 못 했습니다.

‘내가 그걸 이미 다 했으면 디펜스를 하고 있지 이제 프로포잘을 하고 있겠냐.’ 정원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A 교수: 적어도 박사학위 논문이라면 내가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끝까지 고민해봤습니다, 하는 게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문제 하나 풀어낸다고, 새로운 기법 하나 제시한다고 박사를 받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제시한 기법의 장점과 단점, 한계점까지 정량적, 정성적으로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내가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너무 세다 싶자, 권대성 교수가 나섰다.

권대성(교수): 교수님, 아직 프로포잘입니다. 살살하시죠.
A 교수: 어쨌든, 내가 디펜스에서 다른 거 안 보고 이거 하나만 딱 볼 거야. 이거 안 하면 싸인 안 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김정원(4): , 알겠습니다.

A 교수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끝났다는 의미다. 이어서 B 교수다.



B 교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협력을 해서 문제를 풀었다고 했잖아요.
김정원(4): .
B 교수: 아까 그런 게 하나 더 있다고 했죠?[9] 그거랑은 뭐가 다르죠?
김정원(4): 그건 하드웨어를 추가해서 하드웨어로 충분히 해결을 한 상태에서 스케줄러가 약간 도와주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고요, 제가 제안한 것은, 이미 탑재되고 있는 하드웨어 기능을 스케줄러가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B 교수: 그런데, 학생도 똑같이 시뮬레이터(simulator)를 써서 연구한 것 아닌가요?
김정원(4): .

정원은 B 교수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B 교수: 이미 비슷한 기법이 나와 있는 상황이면 여기서 그치면 안 되지 않나? 제안한 기법이 실용적이고 이미 나온 하드웨어로도 구현 가능한 것이라면, 실제로 구현을 해서 보여줘야지. 단지 성능 몇 퍼센트 더 올라가는 걸로만 보여줄 게 아니라.

그러니까, 결국, 운영체제에 구현하란 말이다. 누가 몰라서 안 한 줄 아나. 시뮬레이터에서 하는 게 훨씬 쉬워서 그랬다. 훨씬 쉬운 게 이미 몇 달이 걸렸다. 대체 언제 졸업을 하란 말인가.

그래, 당신이 운영체제를 연구하는 교수인 건 알겠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B 교수: 그런데, 그게 시간이 좀 걸리긴 할 텐데. 지금 몇 년차라고 했죠?
김정원(4): 4년차입니다.
B 교수: , 그래요? 그럼 충분하겠네. 권대성 교수 생각은 어때요?

정원은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아까 그 분석까지는 하겠다고 했지만, 이건 아니다. 몇 달이 걸릴지, 해서 잘 되기나 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B 교수에겐 남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설득을 시킬 만한….

권대성(교수): 그게 제품이 나오고 있긴 한데, 아직 시제품이기도 하고요, 기능도 완벽하진 않다고 들었습니다.

정원은 6년째 함께 해온 교수님이 이렇게 마음에 드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B 교수: , 그래요? 그래도 구현을 하면 좋을 텐데.
김정원(4): 시제품이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능에 대해서도 좀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심사 받는 주제에 어렵다고만 할 순 없지 않은가? 교수님이 충분히 안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러니 정원은 노력해본다고 답하는 게 예의다. 결국 안 할 거지만.



C 교수님 차례. “왜 이제까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협력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안 나왔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은데”로 포문을 열었다. 정원은 또 말문이 막혔다. 나름 창의적이라고 생각해서 연구한 거란 말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 답하나?

정원이 머뭇거리자 공격을 잇는다. 이제까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시도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본인은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설명하란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 질문은 C 교수님이 들어가는 모든 프로포잘과 디펜스에서 나오는 단골 질문이다.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발표 자료 준비하느라 이런 것까지 챙길 시간이 없었긴 하지만. 한편으론, 준비하면 답이 나왔을까 싶다. 아니, 다른 사람이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정원은 발표했던 내용 중 그나마 관련 있을 만한 내용들을 다시 읊었다. 역시나 만족하진 못하신다. 어쩌랴. 이 순간만 지나가길 바랄 뿐.

다음은 D 교수님. 구현에 대해서 치고 들어온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교수님이다. 정원이 사용한 시뮬레이터를 박사과정 때 많이 써봤나 보다. 정원이 조금이라도 대충 구현해놓은 모든 부분을 지적한다. 엠아르아이(MRI)라도 찍히는 기분이다.

프로포잘 리허설을 몇 번 했었다. 후배들과 함께 했다. 그 때마다 여러 질문과 지적들이 나왔다. 연구의 장점을 더 강조했다. 논리가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어수선한 말을 빼고 쉬운 그림을 넣었다. 연구가 가진 한계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후배도 있었다. 그런 질문들에 대비하기 위해 보충 발표자료도 꽤 만들어두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교수들은 그런 걸 지적하지 않았다. 후배들이 포탄을 쏜 것이라면, 교수들은 지진을 일으켰다. 아예 판을 흔들고 엎어버렸다.

정원은 오래된 노래가 떠올랐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10] 목이 말랐다. 프로포잘이니 지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연구 방향을 함께 잡아가자는 목적이니까. 하지만 너무 많다. 너무 세다. 이걸 언제 다 한단 말인가. 벌써 박사 4년차인데.

다행히도 권대성 교수는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끝났다. 프로포잘은 어쨌거나 끝났다. 정원은 자율신경계에게 감사했다. 정신이 완전히 빠져나가버렸지만, 걸어서 나갈 수는 있었으니.


 
떠나는 게 맞다. 비행기라도 타러 가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정원은 다시 준상의 디펜스에 들어왔다. 웨딩박람회를 쫓아다니는 예비부부의 마음으로.

디펜스와 프로포잘은 형식이 비슷하다. 학생의 발표 뒤에, 심사위원의 매서운 공격이 이어진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완성판’이라는 것이다. 학생의 발표는 완성된 연구 결과여야 한다. 장점들은 충분히 가치 있어야 하고, 단점마저 모두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어야 한다. 심사위원의 공격도 끝장을 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박사를 줄지 말지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탈락이 있다. 디펜스가 끝나면 심사위원들이 회의를 하고 합격 여부를 결정 짓는다.

준상의 디펜스도 정원의 프로포잘과 비슷했다. ‘완성판’이라는 차이점만 빼면. 발표도 발표지만 질의응답도 훌륭했다. 교수님들은 이번에도 판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디스코 팡팡이라도 타는 듯이 꿋꿋이 버텼다. 정말,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구나, 싶었다.

정원은 한 명의 박사가 탄생하는 순간을 함께 했다.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박사란 무엇인가? 누가 박사라 불리는가? 결국, 박사가 박사라고 불러야 박사다. 아무리 좋은 시를 써봐야, 시인들이 시인이라고 불러주기 전엔 시인이 될 수 없듯이. 과학적 결과들이 있지 않느냐고? 과학적 결과라고 모두 인정되는 게 아니다. 그중 가치 있는 것만 인정된다. 그리고 ‘가치’의 기준은 기존의 박사들이 세운다. 이거야 말로 카르텔[11] 아닌가. 물론 정원도 안다. 교수들이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얼마나 우리의 실력을 평가할 만 한 존재인지.[12]

그래도, 1시간 만에 평가해버리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준상이가 4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데. 준상이니까 4년이지, 5, 6, 7, 8, 9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끝내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병원의 짧은 진료 시간이 싫은 건 의사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다. 내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디펜스가 끝나고 30분 뒤, 준상이 연구실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이 오늘 회식 한 번 하자고 하십니다.
6시에 출발하겠습니다.
장소는 제가 예약해두겠습니다.

- 강준상

교수님이 학교를 옮긴다고 발표하신 뒤로,[13] 첫 회식이다. 

[1] 한 프로그래머는 설치파일에 띄어쓰기를 하나 잘못 넣는 바람에, 자신의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용자 폴더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사용자_폴더/특정폴더/특정폴더/특정파일’을 지워야 하는데, /사용자_폴더 /특정폴더/특정폴더/특정파일’를 지워버린 탓이다. (두 개 이상의 파일을 지우고 싶을 때 파일 이름들을 띄어쓰기해서 나열한다.) -https://github.com/MrMEEE/bumblebee-Old-and-abbandoned/issues/123
[2]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8) 직감 - http://scienceon.hani.co.kr/282571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9) 샛길 - http://scienceon.hani.co.kr/350763
[4]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7) 최초 - http://scienceon.hani.co.kr/277956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9) 마케팅 - http://scienceon.hani.co.kr/176519
[6] 디바이스 드라이버: 마우스 같은 기기를 컴퓨터와 연결했을 때, 컴퓨터가 기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이를 디바이스 드라이버라고 한다.
[7]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디펜스를 통과해야 한다. 이 시점은 아직 디펜스를 시작하기 전이다. 하지만, 디펜스는 사전에 지도교수의 검증을 거친 뒤에 하게 된다. , 다른 심사위원들과도 프로포잘을 통해 어느 정도하면 디펜스를 통과할 수 있을지 미리 이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디펜스 때 떨어질 확률이 크지는 않다. 애초에 디펜스를 안 시켜주니 어려운 것이다. 물론, 디펜스에 떨어져서 다시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8] 왜 여자가 음식을 잘 하면 “시집가도 되겠네”라고 하는 걸까요? 음식을 잘하면 요리사가 되기를 권유하는 게 좀 더 논리적이고 매끄럽지 않나요?
[9]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 마지막 부분에서 교수님이 보내준 그 논문이다. -http://scienceon.hani.co.kr/274724
[10] 1993년에 발매된 듀스(Deux)의 앨범 <Deuxism>의 타이틀곡인 “우리는”의 가사이다.
[11] 카르텔: 기업 간의 담합을 의미하는 경제용어. 담합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경우를 비판하려는 경우에 주로 쓴다. 확장된 의미로,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담합을 통해 특권을 유지하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물론, 박사가 된다고 대단한 특권이 있지는 않다. 정원이 혼자만의 생각이다. 작가의 생각은 아니다.
[12] 맥락상 소설 속에 심사위원으로 등장하는 교수에 한정된 말이다. 물론, 내 주변의 교수들도 다 실력 있고 머리 좋다. 절대 카이스트 총장님이 볼까봐 사족 다는 것이 아니다.
[1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 멘탈파쇄 - http://scienceon.hani.co.kr/242496


#24. 마지막

마지막이다. 그런 느낌이 왔다. 모두가 그랬다. 오늘은 연구실 마지막 회식이다. 교수님도 그런 느낌이 왔다. 오늘이 그 날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이유는 없다. 그냥 느낌. 그래서 회식을 하자고 했다.

늘 그렇듯 삼겹살집이다. 우리보다 먼저 마지막을 맞이했던 돼지의 살코기들. 그들이 또 다른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 불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교수님이 말한다.

권대성(교수): 몇 달 전에 얘기 했지만,[1] 1월부터는 내가 더 이상 꿈꾸는대학교에 있지 않을 거다. 사무실도 없어질 거고.

치이익. 치이익. 삼겹살이 익는다. 지방이 녹아내린다. 뜨거운 불에 튀어 나간다.

권대성(교수): 그동안 나랑 조금씩 얘기를 해 본 사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최대한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학생들이 제일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교수님은 말을 이었다.

권대성(교수): 지도교수를 아예 바꿀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고, 꿈꾸는대학교에 남아 있으면서 내 지도를 받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다. 한겨레대학교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좀 힘들 순 있지만.

고기 겉면에 육즙이 차오른다. 학생들도 할 말이 많다. 국현이 고기를 뒤집는다. 육즙 오른 면이 감춰진다. 학생들이 할 말이 없어진다. 오만 원짜리 지폐 색깔로 변한 면이 드러난다. 학생들이 점잖아진다.

권대성(교수): 다들 생각은 많이 해봤겠지. 그래, 석사학생들은 어쩔 거니?

육즙과 기름이 뒤섞여 흐른다. 불판 한 쪽 끝 종이컵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다. 길영이 말한다.

전길영(2): 저는 그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김동석 교수님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깔끔하다. 요리책 속 문장처럼.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고 다음은 어느 단계여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처럼.

요리책대로 했다고 꼭 요리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길영도 불안하다. 요즘 따라 ‘박사탕수육’에서 탕수육을 시켜먹기가 겁난다. 정말 박사를 따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 흘러 흘러 탕수육 장사에 뛰어든 사람일까봐. 회식을 하고 있는 이 삼겹살집 주인장도 박사라는 소문이 있다.

석사과정 동안 논문도 써봤다. 수업 성적도 좋다. 영어도 웬만큼 늘었다. 그렇다고 박사를 꿈꿔도 되는 걸까? 박사를 딴 후의 삶을 꿈꿔도 되는 걸까?

하지만 길영은 티 내지 않았다. 교수님 앞이라서는 아니다. 그나마 자기는 좋은 상황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권대성(교수): 그래, 길영이는 그렇고, 보영이는?

치이이익! 녹은 지방이 불로 떨어졌다. 불길이 한 번 확 오른다. 보영이 깜짝 놀랐다. 흐익! 그 소리에 다 같이 웃는다. 정원만 빼고.

일동: 하하하하하.
김정원(4): 보영아, 괜찮아?
전보영(2): , . 그냥 좀 놀라서 그래요.

국현은 다시 한 번 고기를 뒤집었다. 학생들이 마저 웃었다.

그 누가 놀랐어도 이 사람들은 이렇게 웃었을 것이다. 이것은 비웃음이 아니다. 보영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너무 익숙했다. 이공계를 선택한 뒤부터 남자애들과 오빠들은 늘 보영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광대가 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자기들보다 곡률[2]이 큰 몸매와 높은 톤의 목소리와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탓이겠지.

이런 관심이 학교를 벗어나면 어떻게 작동하는 지, 보영은 많이 들었다.[3] ‘여자가 일을 잘 하네.’ ‘이렇게 회사에서 열심이면 집은 어쩌고?’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어.’ 이런 말을 듣고도 열심히 웃어야겠지. 삐에로처럼 웃는 화장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아니, 그러면 화장을 예쁘게 안 했다고 뭐라 하려나.

권대성(교수): 그래, 진정 됐으면, 보영이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여자가 박사가 되는 데 유리천장[4]은 없다. 적어도 보영 주변은 그렇다. , 물론 ‘시집은 안 가냐’는 잔소리만 견뎌낸다면. 하지만 그 후는 모르겠다. 모르고 싶다.

박사과정 진학을 안 한다면 취직일 것이다. 그래도 학력이 있으니 취직을 아예 못 하진 않을 것이다. 전공을 못 살리고 돈을 적게 받을 순 있어도. 그리고 그 후는, 역시 모르고 싶다.

이거나 저거나 똑같다면 박사가 되는 게 낫겠지. 학부 때부터 꿈꿔온 거니까. 하지만 말하긴 그렇다. 이미 입시조차 떨어진 주제에.[3]

전보영(2):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졸업부터 하고 좀 쉬면서 생각해볼까 싶어요.

제일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교수님도 보영이 박사과정 입시에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게 자신 때문인 것도 알았다. 지도교수가 없으니 별 부담도 없이 떨어뜨렸겠지. 다른 계획이 있었으면 했다. 아니었구나.

삼겹살의 살코기가 굳어간다. 조금씩 마른다. 국현이 다시 고기를 뒤집었다. 타버리기 전에 먹어야 한다.

권대성(교수): 혹시 박사과정 하고 싶은 생각 있으면, 한겨레대학교로 와. 내년에 입학하는 건 일정이 이미 늦었으니, 일 년 정도는 연구원으로 있고, 그 다음 해에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보영이 뚜렷한 성과를 낸 적은 없다. 미팅 때도 말을 많이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일을 줄 때면 보영은 어딘가 행복해보였다. 그 때마다 교수님은 아내가 생각났다. 지금은 원치 않게 전공을 버리다시피 했다.[5] 하지만 늘 ‘그래도 박사 할 때가 참 행복했는데’라고 한다. 어차피 보영의 인생을 책임질 순 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행복한 몇 년을 선물할 순 있지 않을까?

전보영(2): , 생각해보겠습니다.

보영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김국현(3): 교수님, 고기가 다 익었습니다.
권대성(교수): 그래, 먹자.

교수님은 자기가 먼저 고기를 집어 들었다. 입으로 넣는다. 조근 조근 씹는다. 학생들도 뒤따라 고기를 집는다. 교수님이 술병을 든다. 상추쌈을 싸던 손들이 일제히 멈춘다. 잔을 집는다. 교수님이 한 명 한 명 잔을 채워준다. 건배 제의도 없이 짠을 한다. 그리고 마신다.

권대성(교수): 그 다음이 누구지? 국현인가?
심정길(3): 저랑 국현입니다.

박사 1년차였던 주성이가 연구실을 옮겼으니 국현과 정길이 맞다. 박사 3년차. 애매하다.

권대성(교수): 너희는 나 따라서 오면 좀 더 편할 거다. 학교에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쉬울 거고. 박사 밟던 학생들이니까 행정 절차는 좀 있겠지만 입시 안 거치고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여기 남아 있으려면 그래도 되고.

교수님이 고기 한 점을 앞접시로 가져온다.

김국현(3): 저… 사실…

교수님은 가져오던 상추를 그냥 앞접시에 뒀다. 그리고 국현을 바라봤다.

권대성(교수): 얘기해봐.
김국현(3): 전 의전(의학전문대학원)을 갈까 생각 중입니다.

교수님이 상추를 집어든다. 고기를 얹는다. 파채도 얹는다. 입에 넣고 씹는다.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것이리라.

다른 학생들도 말이 없었다. 조용히 놀랐다.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상추쌈을 꾹꾹 씹던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권대성(교수): 생각 중인 거야, 결심한 거야?
김국현(3): 결심, 했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권대성(교수): 지금 얘기했으면 됐다. 학교는 그만 두려고?
김국현(3): 아직 부모님껜 말씀을 못 드려서….

지금 불편한 건 국현만이 아니다. 교수님 앞에서 박사를 그만 둔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것, 모두 편치 않았다. 교수님이 가장 불편하다면 거짓말일까?

 
권대성(교수): 그래, 정길이는?

교수님은 바로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순 없었는지, 절반 남은 술잔을 마저 비웠다. 옆에 앉은 준상이 얼른 소주병을 들었다. 교수님이 잔을 잡았다. 잔이 채워졌다.

정길은 고민이 깊었다. 교수님이 학교를 옮긴다고 할 때만 해도,[1] 어떤 형태든 박사는 따려고 했다.[6] 하지만 얼마 전 예은이의 아버지를 만난 후로,[3] 생각이 많아졌다. 결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아버지도 벌이 좋은 사위를 원하신다. 하지만 박사를 따려면 몇 년 간은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예은은 이미 서른이다. 스물이래도 믿을 만큼 귀엽고 청순하긴 하지만.

예은과도 이야기해 봤다. 언제 결혼하느냐보다 누구랑 결혼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결혼할 사람이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정길은 말문이 막혔다. 정길은 예은이 행복한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무한루프[7]. 젠장.

결국 결정은 정길이 내려야 했다. 어느 편이 예은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정길은 추정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험을 해볼 수도 없고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도 없으니….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어쨌든 물어보셨으니 대답을 하긴 해야 한다. 그런데 말해버리면 결정을 해버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순식간에 결정해도 되는 걸까? 아니 근데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 거지? 기다려주지 않는 삶이 원망스러웠다.

심정길(3): 교수님 밑에서 계속 박사를 하고 싶긴 한데요, 꿈꾸는대학교에 남아 있고 싶습니다.

정길은 타협했다. 자신의 꿈인 박사를 부여잡고, 이곳에 사는 예은을 부여잡았다. 잘한 걸까? 이 결정이 어떤 미래를 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정길은 아직도 박사를 꿈꾸고, 예은과의 결혼도 꿈꾸는 걸. 그래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권대성(교수): 그래? 날 따라 옮기더라도 학적은 꿈꾸는대학교로 유지하는 방법도 있긴 할 텐데.
심정길(3): , 제가 여기서 여자친구가 생겨가지고요….

평소 같았으면 여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묻기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묻지 않았다.


권대성(교수): 정원이 넌?

꿈꾸는대학교에 남을 것인지, 한겨레대학교로 옮길 것인지, 둘 중에 선택하라는 의미다. 정원은 프로포잘도 마쳤으니까.

하지만, 사실 정원은 어제 밤에 자퇴원을 썼다.[8] 채워보니 별 거 없었다. 자퇴 사유도 길게 묻지 않았다. 한 줄만 비워져 있었다. 이렇게 썼다. “박사를 받지 못 할 것 같아서요.

정말 자퇴하려는 건 아니었다. 영원히 학생일 것만 같던 자신이 프로포잘까지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그랬다. 프로포잘까지 4년이 걸렸으니, 디펜스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교수님이 학교를 떠나고, 준상이도 졸업하고, 길영이 보영이도 졸업하면,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상상도 안 돼서 그랬다.

불판이 비어간다. 무거운 분위기라 가만히 먹어서 그렇다. 국현이 새로운 고기를 올린다. 하얀 피부의 빨간 덩이가 소리를 낸다. 치이익. 치이익. 반항도 못 하고 익어간다.

김정원(4): 일단은 여기 남아 있고 싶습니다.

정원은 떠오르는 대로 답해버렸다. 무의식이 잘 결정해주었을 거라 믿으며.

결국 미련 때문 같았다. 박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다. 프로포잘을 마치면서 미련이 더 깊어져버린 거다. 꿈꾸는대학교에 대한 미련도 못 버린 거다. 학부에 입학한 지 12.[9] 눌러 앉은 지도 너무 오래됐다. 일어나려다간 다리라도 저릴 것 같다.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박사가, 이렇게 익숙함에 집착해버려도 되는 걸까? 정원은 자신이 박사에 적합한 인물인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권대성(교수): 그래. 서류 절차 같은 건 내가 문의해보마.

새로 올린 고기를 채 뒤집기도 전에, 고기가 동났다. 잠시간은 밑반찬을 안주 삼아 술이나 마셔야 한다.

권대성(교수): 그래, 준상이 포닥[10] 알아본 건 어떻게 됐어?
강준상(4): 몇 군데는 연락이 왔는데 다들 돈이 없답니다.
권대성(교수): 그래? 지금이 좀 다 같이 포닥 자리 알아보는 시기라서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 안 된다고 했다고 그냥 포기하지 말고 나중에라도 연락 달라고 답해놓고 그래.
강준상(4): .
권대성(교수): 넌 실적도 괜찮으니까 좀 더 기다리면 될 거야.

새로 올린 고기 겉면에 육즙이 차오른다. 국현이 고기를 뒤집는다. 육즙 오른 면이 감춰진다.

준상은 오늘만큼은 다 잊고 싶었다. 무려 디펜스를 하지 않았는가. 기쁜 날이고 싶었다. 그런데 굳이 포닥 결과를 물어봐주시다니.

박사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다. 뭔가 이뤄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할 것 같았다. 연구자 자격증을 땄으니 실컷 연구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박사가 되어보니, 그저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삶이란 그저 갈수록 가팔라지는 계단 같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여기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박사 되기 힘들어서 힘들어하는 후배들 앞에서.

어쨌거나 한 바퀴 훑었다. 길영이부터 준상이까지. 그리고 모두가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박원식. 교수님이 학교를 옮긴다고 하자 바로 연구실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박사 7년차 학생.

강준상(4): 근데 교수님, 혹시 원식이 형 소식은 들으셨나요?
권대성(교수): 얼마 전에 연락이 오긴 했어. 자세한 건 말 안 하고 곧 찾아 온다고 하더라. 학기 끝나기 전까지 꼭 찾아오라고 했다. 서류 정리를 하긴 해야 하니.

교수님도 모른다는 말이다.

어차피 먹을 고기도 없겠다, 할 말도 없겠다, 말 할 기분도 안 나겠다, 모두 자연스레 텔레비전으로 시선이 향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김정원(4): ? 저거 케이팝스타[11] 아냐? 올해 꺼 시작한 거야?
김국현(3): 지난주에 시작했어요. 형 진짜 프로포잘 열심히 준비하셨나보네요. 이런 거 모를 분이 아닌데.
김정원(4): 교수님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이런 걸 안다고 뭐라고 할 교수님은 아니기에, 둘은 웃어 넘겼다.

김국현(3): 어어어? , 저거 봐요! 저거 원식이 형 아니에요?

소설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원식이 형이 케이팝스타에 나왔다.

전보영(2): ? 진짜네? 원식 오빠!
김국현(3): 사장님! 텔레비전 소리 좀 키워주세요!

한 직원이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다. 음식점엔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았다. 웅성웅성하긴 했지만, 집중하면 들을 수 있는 정도는 됐다.


텔레비전 속 원식은 인터뷰 중이었다.

유희열: 박원식씨, 꿈꾸는대학교 박사과정? , 박사에요?
양현석: 케이팝스타가 이렇게 발전하네요.

자막은 ‘박사의 케이팝스타 입성’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박원식: 박사는 아니고요,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유희열: 아니 그래도 그렇지, 박사가 연구는 언제 하고 여기 나오는 거에요?
박원식: 지금 휴학 중입니다.

아무리 박사가 아니래도, 원식이 형은 박사로 불렸다. ‘박사’가 케이팝스타에 나온 이유를 한참이나 얼버무리고 나서야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진영: 오늘 부를 노래가… 자작곡이네요?
박원식: .
박진영: 제목이 뭐죠?
박원식: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입니다.
유희열: 오우,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제목 말하는 것부터가 되게 슬퍼!
박진영: 어떤 노랜지 좀 소개해주실래요?
박원식: 제목 그대로인데요, 내가 정말 박사를 꿈꿔도 되는 건지, 그러면 행복할 건지, 그런 걸 담아봤습니다.
박진영: 그럼 한 번 들어보죠.

원식은 들고 온 기타를 차분하게 붙잡았다. 담담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난 여기까진가 봐요
시작은 원대했는데
난 정말 열심히 했어요
누군가 먼저 한 것 뿐이죠

난 정말 어떻게 할까요
누가 좀 알려주세요
, 알려줄 수 있는 거라면
논문으론 못 쓰겠죠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앞이 안 보이는데
다시 꿈꿔도 될까요
더는 자신 없는데
 
모두가 기대가 커요
난 그저 기대고픈데
언제 졸업하냐는 그 말
, 이젠 대답하고 싶어요

박사 되면 행복할까요
결혼하고 야근하던데
정말 열심히만 하면 되나요
수능 때도 속았는데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앞이 안 보이는데
다시 꿈꿔도 될까요
더는 자신 없는데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미련을 못 버렸어요
다시 꿈꿔도 될까요
제발 된다고 해주세요




‘감성 넘치는 자작곡’, ‘박사과정의 애환을 담은’ 등의 자막이 이어졌다. ‘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마지막 자막으로, 복잡한 표정의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비춰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심사위원들이 마이크를 잡는다.

양현석: 어… 곡은 좋아요. 곡 자체는 좋고,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싶은데… 뭐랄까, 이게 대중적인 감성은 아니에요. 같은 분야의 사람들은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지 저는 판단이 잘 안 되지만, 케이팝스타에는 어울리지 않는 곡이에요. 그래서 저는 불합격 드릴게요.

이번엔 카메라가 유희열을 비췄다. 유희열이 심사할 차례인 것 같다. 유희열은 한참이나 고민을 하더니 박진영에게 순서를 넘겼다.

박진영: 저도 일단 현석이 형의 말에 동의를 해요. 곡은 좋지만 이게 얼마나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가사에 보면 “정말 열심히만 하면 되나요, 수능 때도 속았는데“ 이런 부분은 좋은데 나머지 부분은 좀….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해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노래가 음정이 좀 불안할 때가 있어요. 물론 노래가 감성을 잘 담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은 맞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불합격 드릴게요.

유희열이 한참 더 고민하는 모습이 나왔다. 자막이 깔렸다. ‘심사 차례까지 양보한 유희열, 그의 고민은?

유희열: 저는 주변에 가방끈 긴 사람들이 좀 있거든요. 박사까지 하신 분들도 있고, 어렵게 유학 가신 분들도 있고. 그래서 이 곡이 얼마나 좋은 곡인지는 여기 세 사람 중에선 가장 잘 알 것 같아요. 그리고 대중적일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일단 우리 세 사람이 동의가 되잖아요. 이 노래가 좋다고. 내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니고 느껴봤던 감성도 아니지만, 그 감성이 전달이 되잖아요. 느껴지잖아요. 대중들이 꼭 자기가 해봤던 것들만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이 느낌, 충분히 전달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또 박진영씨가 말했지만, 음이 불안한 건 맞는데, 이 부분은 연습만 충분히 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노래 시작한지 얼마나 됐죠?
박원식: 휴학하고 시작해서요, 5개월쯤 됐습니다.
유희열: 그럼 지금 이게 첫 자작곡이에요?
박원식: .

뭔가 크게 놀란 유희열의 표정이 나왔다. ‘무슨 고민을 하는 걸까?’ 자막이 깔렸다.

유희열: 이게 5개월 만에 만든 첫 작품이라고요?
박원식: .

잠시 뜸을 들이던 유희열이 말했다.
 
유희열: , 진짜 미안해요. 나 잠깐만 생각 좀 할게요.

그리고 다시 가사가 적힌 종이를 꼼꼼하게 보는 유희열이 나왔다. ‘가사를 꼼꼼하게 다시 보는 유희열, 그의 선택은?’ 자막이 나왔다.

유희열: 남들이 겪지 못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훌륭하게 감정 전달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고요, 이게 첫 작품이 그게 되었다면 정말 재능이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노래야 연습하면 되는 거예요. 5개월 밖에 안 됐다잖아요. 노래 시작한 지.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는 유희열.

유희열: 그런데, , 박사 하세요. 제가 다시 가사를 꼼꼼히 보면서 생각해봤는데요, 원식씨는 지금 박사가 되고 싶어요. 앞이 안 보인다고, 더는 자신 없다고, 박사 돼봤자 뭐하냐고 하면서도, 원식씨는 지금 박사가 되고 싶잖아요. 그게 너무 느껴지거든요.

원식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표정이 너무 복잡해서 무표정처럼 보였다.

유희열: 저는 오늘 불합격 드릴 거예요. 그런데 그게 노래가 나쁘다거나 재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노래 계속 하시고요, 곡도 계속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유튜브 같은 데도 많이 올리니까, 그렇게 계속 활동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일단은, 박사가 꼭 되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공부 열심히 하시라고, 불합격 드리는 거예요.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이다. 연구실 회식도 마지막이다. 원식의 케이팝스타도 마지막이다. 마지막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박사를 꿈꿔도 되냐고. 석사 때 잘 했다고 박사도 꿈꿔도 되냐고. 여자가 박사를 꿈꿔도 되냐고. 도무지 자신이 없는데, 결혼도 하고 현실도 살아내야 하는데, 박사를 꿈꿔도 되냐고. 박사가 됐다고 뭐 그리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이 고생을 하면서, 박사를 꿈꿔도 되냐고.

답은 없다. 답해줄 사람도, 답해줄 교과서도 없다. 다만 우리가 있을 뿐이다. 꿈꿔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꿈꿔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꿈꿔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꿈을 살아내고 있는.

그러니 마지막이 아니다.


[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 멘탈파쇄 - http://scienceon.hani.co.kr/242496
[2] 곡률: 선이 굽은 정도를 표현하는 수치. 미분, 적분 개념이 들어가는 것이라 너무 복잡하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22) 현실 - http://scienceon.hani.co.kr/389441
[4] 유리천장: 오늘날 법적으로는 남녀가 평등하다. 여자라서 못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자가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 ‘보이지 않는 벽’이라는 의미로 ‘유리천장’이라고 한다. 오늘날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여성분들은 유리천장을 부수고 피를 흘리신 분들이다.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9) 역할 - http://scienceon.hani.co.kr/286135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6) 참이슬 - http://scienceon.hani.co.kr/334267
[7] 무한루프(infinite loop): 프로그램의 특정 부분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선생님이 학생에게 벌을 주려고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계속 운동장 돌고 있어”라고 했다고 하자. 학생은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선생님이 깜빡하고 퇴근해버린다면, 학생은 끊임없이 운동장을 돌아야 한다. 비슷한 실수를 프로그래머가 하면 무한루프가 생긴다.
  이번 이야기는 무한루프의 좀 더 복잡한 예다. 예은은 정길에게 물어야 하니 묻는데, 그 답을 해주려면 정길이 다시 예은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답을 하려면 다시 정길에게 물어야 하고 다시 정길이 예은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니 무한루프다.
  데드락(Dead-lock)으로도 비유할 수 있지만, ‘무한루프’가 더 쉬운 개념이라 이렇게 비유했다.
[8] 시즌1 1화에서 자퇴원을 다운로드 받아뒀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1) 새벽 세시 -http://scienceon.hani.co.kr/153375
[9] 소설 속의 ‘김정원’은 현재 31살이고, 박사 4년차입니다. 20살 때 꿈꾸는대학교 학부에 입학했고, 군복무로 인한 휴학 2년을 포함해 총 6년간 학부를 다녔습니다. 이후 석사과정을 2년 걸려 마치고, 박사과정을 4년째 하는 중입니다.
[10] 포닥: 포스트닥터(Post-Doctor)의 줄임말. 한국어로는 ‘박사 후 과정’이라고 한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 학교 연구실에 소속이 되어 연구하는 기간제 계약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 연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남아서 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학교(해외를 포함한)로 가서 새로운 연구 경험을 하는 경우도 많다.
[11] 케이팝스타(k-pop star): SBS에서 매년 방영하는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 타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기획사 차원에서 직접 나와 심사를 하고 우승자는 직접 소속사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순위에 올라간 참가자들이 캐스팅되거나 데뷔하는 비율도 높은 편이다. 현재 시즌 5까지 방영됐다. 보통 일요일에 방영하며, 이번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평일이지만, (프로포잘과 디펜스가 있던 날이다) 한 번 만 봐주세요. 이야기 진행상 케이팝스타가 제일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에필로그. 감사의 글


은 밤. 정원은 박사학위논문 감사의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잡았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제가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보통은 지도교수님을 가장 먼저 쓰죠.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요. 그리곤 심사위원님들을 언급하죠.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서요. 물론 감사하죠. 지도교수님이 지도해주지 않았다면, 심사위원님들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면, 저는 박사가 되지 못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분들이 날 버티게 해준 건 아니에요. 외롭던 순간들, 절망하던 순간들에 함께 해줬던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날 정말로 박사로 만들어준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그게 진정한 ‘감사의 글’이 아닐까요?

보영이가 제일 먼저 생각나요. 정길이 형이 여자친구 이름 함부로 쓰는 거 아니랬는데. 결혼 날짜까지 잡았으니 괜찮겠죠. (정길이 형은 석사논문 감사의 글에 전 여자 친구 이름을 써버려서 지금은 전량 폐기처분 했대요.) 때로는 비타민제 같고 때로는 수술용 매스 같은 말들, 정말 고마웠어. 실험을 도와주던 모습, 논문에 오타 없나 꼼꼼히 살펴주던 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아? 네가 없었다면 난 절대 박사가 되지 못 했을 거야.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여자. 보영아 사랑한다.

아직도 아쉽긴 해요. 보영이가 박사를 그만 둔 거요. 보영이가 이 말을 하던 순간이 선명히 기억나요. “이젠 그만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만 할래.” 그 때 제가 뜯어말렸다면 좀 달라졌을까요? 전 보영이가 당당한 박사가 되길 바랐거든요. 여자라서 더 그랬어요. 여성으로서의 모든 어려움을 뚫어내고 훌륭한 박사로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있는 힘껏 도우려고 했어요. 나 혼자서 사회 구조는 못 바꿔주겠지만 내 여자의 버팀목과 안식처는 되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리지 않았어요. 여자라고 꼭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포기하는 것도 있는 거니까. 내가 운좋게 버텨내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니까. 전업주부를 한다고 해도, 다시 박사과정을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언제나 내가 옆을 지켜줄 거니까요

너무 팔불출이죠? 이제 넘어갈게요. 다음은 연구실 사람들이에요. 보통 연구실 사람들을 형용사 한두 개, 길어야 한두 문장으로 언급하곤 하죠.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요.

하나뿐인 내 동기 준상이부터. 지금은 미국에서 취직해서 살고 있는 준상이. 역시 넌 잘 될 줄 알았어. 그렇게 머리가 좋고 성실하고 연구밖에 모르는 네가 잘 되지 못한다면 그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걸 테니까. 때로는 질투도 느꼈어. 열등감도. 하지만 이젠 널 진심으로 응원한다. 넌 꼭 교수도 될 수 있을 거야. 그 때 나 모른 척하지마. 나도 교수 친구 좀 둬 보자.

그리고 원식이 형. 형의 그 노래,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있잖아요. 지금도 자주 들어요. 엄청 슬픈 노랜데, 힘이 돼요. 엄청 절망적인데, 희망이 느껴져요. , 절망 끄트머리에서 건져 올린 희망이 진정한 희망이라고 하잖아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끝내 박사를 따낸 형.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평범한 가장, 평범한 월급쟁이가 되었지만, 요즘 평범하게 살기가 오죽 힘든 가요? 박사과정을 버텨냈던 그 끈기라면 어디서든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지난 번에 형수님이 해주신 음식 참 맛있었는데! 이제 박사 대 박사로 한 번 만나요. 형수님도 (절대 음식 때문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뵙고 싶고!

정길이 형! 같이 졸업하게 된 거 정말 축하드려요. 포닥에 가게 되신 것도요. 이왕이면 결혼해서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형 같이 건실한 청년 아니면 대체 누구한테 딸을 보내려고 하시는지. 형에게도 어려운 결정이었겠죠. 그 분을 참 많이 좋아했으니까요. 형을 보면 연구가 그렇게 좋으신가 싶어요. 박사과정 시작할 때도 멀쩡하게 다니던 대기업을 포기하고 오신 거였잖아요. 응원할게요! 준상이처럼 잘 되시기를!

다음은 국현이. 얼마나 바쁜 건지 페이스북에서도 못 본 지가 꽤 된 것 같구나. 같이 연구실 생활할 때 재밌었는데. 의사는 언제 되는 거니? , 이게 우리로 치면 ‘졸업 언제 하세요?’ 같은 질문인 건가? 그럼 취소할게. 넌 거기서도 잘 하고 있으리라 믿어. 나중에 꼭 한 번 만나서 소주 한 잔 하자.

길영아. 요즘도 가끔 너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곤 해. 새 연구실 서버에서 개설한 그 홈페이지 말이야. 처음엔 두 번째 세 번째 저자로 논문에 이름을 잘도 올리더니, 요즘은 좀 뜸하더구나. 아마도 홀로서기를 시작한 거겠지? 잘 버텨봐. 넌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웃기네. 선배들이 나한테 ‘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면, ‘대체 무슨 근거로요?’라고 되묻고 싶었었는데. 선배가 되면 다 이런 건 가봐. 근데 감사의 말에 너에 대해 쓰려니 너의 석사논문 감사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논문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해서만’ 감사 표시를 하라고 써 있다면서 딱 한 줄만 썼지. “지도교수님인 권대성 교수님과 연구를 많이 도와준 준상이 형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박사논문엔 안 그럴 거지?

아직 몇 명 더 남았어요. 교수님이 학교를 옮겼을 때 바로 연구실을 옮겨간 주성이. 연구실에 네가 없으니까 웃을 일도, 술 먹을 일도 반으로 줄더라. 빈자리는 허전했지만 너의 새 자리를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어. 조만간 프로포잘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파이팅! 그리고 아주 잠깐뿐이지만 연구실의 일원으로 함께 했던 한길이와 연정이도.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으로나마 응원할게!

마지막으로 아버지, 어머니. 제일 감사한 건 맞는데, 왠지 보영이를 처음에 써야 할 것 같아서 부모님은 제일 마지막에 썼어요. 제가 수없이 설명 드렸죠? 마지막 저자도 첫 번째 저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부모님, 제가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징징대기만 했을 때도 그저 맛있는 밥 차려주시고 용돈 쥐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부모님이 참고 기다려주신 덕분에 저도 버틸 수 있었어요. 그리고 보영이와 결혼 허락해주신 것도 정말 감사드려요. 보영이가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잖아요. 보영이를 평가하지 않고 내 딸처럼 함께 고민해주시는 거, 정말 감동 받았어요. (제가 봐도, 자식 키워봐야 헛 거 맞네요. ^^) 부모님, 사랑합니다.

아참, 그렇다고 지도교수님을 정말로 빼먹을 뻔 했네요. 박사 4년차, 중요한 시기에 교수님이 학교를 옮기신다고 했을 땐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그래도 돌이켜 보니 고마운 게 더 많네요. 불필요한 일은 최대한 안 시키고 월급은 최대한 주려고 노력하신 것, 잘 알아요. 연구하다 막힐 때도 최선을 다 해 도와주시고, 저희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것들도요. 연차가 쌓이고서야 더 잘 알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부디 저보다 좋은 학생 많이 만나시길.

기까지 쓰고 나서야 정원은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논문에 실을 순 없을 것이다. 다시 쓰기 시작했다.

참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에 박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권대성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지도편달 덕분에……



사의 글을 쓸 때 다른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정원은 어이없게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어느 덧 감사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게 너무 웃겼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너무도 금세 끝나버리는 것 같았다. 매순간 허망하고 절망하던 순간들이었는데, 어느 순간에 성공해 버린 것 같았다. 정말 박사가 되긴 되는 건가?

기쁠 줄 알았는데 얼떨떨하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을 뺏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우울하기만 한 시절이라 생각했는데, 행복했나보다.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제 또 새로운 꿈을 꾸어야겠지. 남편의 꿈. 아빠의 꿈. 승진의 꿈. 남들 다 꾸는 꿈을 새롭게 꾸어야겠지. 꿈을 이루는 건 의미가 없다. 꿈을 살아내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새벽 세 시. 새로운 꿈이 시작됐다.

마지막으로 퀴즈. 지금 정원은 박사과정 몇 년차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