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2일 수요일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시즌2 6~10화)/김창대

#6. 쓰다

D-17
 
논문을 쓴다는 건 뭘까? ‘쓰다’는 대개 글자와 관계된다. ‘답안을 쓰다’, ‘소설을 쓰다’[1]처럼 무언가를 글자로 표현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하지만 ‘논문’을 목적어로 갖는 순간 완전히 달라진다. 물론 결과물은 글자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글자는 생각도 안 한다.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아이디어를 구현한다. 구현한 것으로 실험을 한다. 좋은 숫자가 나왔는지 확인한다. 절망한다. 개선 방안을 생각한다. 다시 구현한다. 실험한다. 숫자가 좋아졌는지 확인한다. 절망한다. 그리고 무한 반복. 영겁을 견뎌 열반에 이르러야 윤회를 멈출 수 있다. 글자를 고민할 수 있게 된다.[2]

학회에 논문을 내기로 한 지 4. 길영은 글자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준상이 해준 첫 실험 결과가 잘 나왔기 때문이다. 비교군들에 비해서 9~13%의 성능이 향상됐다. 성능 향상이 클 것 같은 프로그램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나머지 프로그램들에서 특별히 나쁜 결과만 안 나온다면, 이걸로 됐다. 남은 실험들은 준상에게 맡겨두었다.
‘전체 흐름을 어떻게 짠 담...
사실 별로 고민할 건 없다. 논문의 흐름이야 늘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 서론 - 아이디어 - 구현 방법 - 실험 방법과 결과 - 관련 연구 - 결론
2. 서론 - 관련 연구 - 아이디어 - 구현 방법 - 실험 방법과 결과 - 결론
보통 새로운 연구 분야인 경우 1번을 선택한다. 아이디어를 먼저 설명한 뒤 관련 연구를 소개한다. 반면 꾸준히 연구되어 온 분야라면 2번을 선택한다. 기존 연구와 관련성이 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기존 연구를 정리하고 나서 아이디어를 설명한다. 길영의 연구 주제는 2번을 선택하면 좋을만한 것이다.

하지만 길영은 석사 2년차다. 젊다. 기똥찬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실험 결과가 중간중간에 나오는 방식은 어떨까?
길영이 새로 만든 기법은 세 가지다. 세 가지 기법이 점층적으로 합쳐져서 성능이 올라간다. 그러니 기법 하나를 설명한 뒤 그 기법만 적용한 성능 결과를 보여주고, 다시 하나를 설명한 뒤 하나를 더 적용한 성능 결과를 보여주는 식으로 하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각 기법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점점 올라가는 성능에 읽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다른 논문들은 이런 경우에도 ‘아이디어’ 장에서는 아이디어만 추상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니 좋다고 설명을 해도 얼마나 좋은지 감이 잘 안 잡힌다.
‘그래, 내친김에 관련 연구 장에서도 데이터들을 많이 보여주자! 그러자면 실험을 더 추가해야 할 텐데…. 실험 방법은 관련 연구 초반에서 설명해야겠다!
길영은 가슴이 뛰었다. 추가할 실험을 재빠르게 정리하여 준상에게 메일로 보냈다. 이제 첫 문장이 문제다. 어느 책에선가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3] 논문의 전체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간결한, 흥미를 유발시키면서도 격식 있는, 과감하면서도 가감 없는 그런 문장 없을까? 생각보다 빨리, 한 문장이 머리를 스쳤다.
When is prefetching worth?
길영이 찾던 바로 그 문장이다. 이 연구를 시작했던 이유이자 본질, 제안한 기법들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 길영은 드디어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열반에 올랐다. 이 주제로 연구를 시작한 지 1년만이다.


D-16
 
길영이 열반에 이르렀을 때, 정원은 삼엽충 상태였다. 몇 번이나 더 환생해야 할는지.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바퀴벌레는 됐어야 했다. 하지만 웬걸, 다시 아메바가 될 기세다.

일마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캔디크러시소다[4] 게임은 언제나 손에 착착 감기는데. 공대 바닥 인물이라면 학부생부터 총장까지 예외 없이 성립한다는 듀의 법칙(Dues Law)이란 것이 있다. 마감 기한(Due date)이 가까울수록 일의 능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른다는 법칙이다.[5] 이에 따르면 어제보다 오늘 능률이 더 올라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일까?

바로 능률 리듬 법칙(Efficiency Rhythms Law)[6] 때문이다. 바이오리듬[7]처럼, 일의 능률도 주기적으로 오르내린다. 거시적으로 보면 듀의 법칙이 맞다. 마감이 가까울수록 압박이 커져서 더 열심히 하게 되고, 또 욕심을 버리고 일을 되게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감이 가까울수록 ’기한 내에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점점 더 커진다. 그래서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걱정이 정신을 지배하게 되고 능률이 바닥을 친다. 그런데 사람이 집중 가능한 시간에 한계가 있다. 능률이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이유다. 그러면 능률이 주기적으로 다시 올라가는 이유는? 마감이 멈추지 않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심장 더 쫄리니까 어떻게든 다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듀의 법칙에 따라 능률이 오른다.

정원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원래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공부‘에 대해서는 더 많이 공부하기 마련이니까.[8] 잠시 커피나 마시며 마감 시간이 더 다가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믹스 커피를 하나 탔다. 막 일어서려는데 보영이 부른다.
전보영(2): 오빠, 어디 가시려고요?
김정원(4): 아니, 잠깐. 뭐 코드 이상한 데 있어?
보영이와 함께 일은 하자고 해두었지만 뭘 시켜야 할지 몰라서, 코드 리뷰[9]를 부탁해두었다.
전보영(2): , 여기, 여기가요,
정원은 보영 옆으로 갔다. 보영은 분홍색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팔에도 핑크빛이 돌았다. 정원은 약간 긴장했다.
김정원(4): 음…. 여기가 왜?
전보영(2): 여기 이 부등호가 이상해서요. 오빠가 전에 설명해주실 땐, 이 값보다 작아야 이걸 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김정원(4): , 그러니까 이 값이 위에서 보면 cache miss 값에서 cache hit 값을 뺀 값이 들어오잖아. 그러니까 여기서는 부등호가 이렇게 되는 거야.
전보영(2): 근데 여기 보면, 빼는 데가 반대로 돼 있어서요.
김정원(4): ... . 진짜 반대로 돼 있네. 여기 제일 신경 써서 본 건데….
전보영(2):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코드 리뷰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좀 전에 해봤는데, 이거 부등호만 반대로 하면 정상적으로 동작하는 거 같아요. 나머지 부분을 좀 더 봐야겠지만.
김정원(4): 벌써 해봤어? 이야, 짱인데. 그럼 너 믿고 계속 코드 짜면 되는 거지?
전보영(2): 그렇다고 너무 믿진 마시구요...
김정원(4): 버그도 찾았는데, 커피 한 잔 할래?
전보영(2): , 저는 커피는 안 마실래요. 요즘 잠이 잘 안 와서….
김정원(4): 그럼 캔 하나 뽑아줄까?
전보영(2): 그래요.
정원과 보영은, 캔 음료 하나를 뽑아들고 자판기 앞 소파에 앉았다.
김정원(4): 제출할 수 있을까?
전보영(2): 하는 데까진 해봐야죠.
정원은 보영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할 수 있을 거예요‘라며 희망고문 하곤 하니까.
김정원(4):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할 게…. 구현 마무리 짓고, 실험하고, 그래프 그리고, 논문 쓰면 된다. 그치? 그러니까… 그냥 다 해야 되네….
전보영(2): 그래도 아이디어는 있잖아요.
김정원(4): 아이디어대로 잘 될까?
전보영(2): 안 해봤으니 모르는 거긴 하지만, 잘 되는 케이스가 분명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모든 경우에서 좋아지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김정원(4): 그렇긴 한데….
보영인 냉철하게 따뜻했다. 정원의 능률이 다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D-15

준상은 길영이 쓴 논문 서론을 받았다. 첫 문장은 “When is prefetching worth?”였다. 그리고 세 가지 답안을 제시한다. 각 답안은 논문이 제안하는 아이디어와 연결됐다. 짜임새가 좋았다. 질문으로 시작하니 흥미도 느껴지고.

하지만 난감했다. 이건 인터넷 블로그 글이면 적당할 것이었다. 제목은 “당신이 prefetch를 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쯤으로 하고.

이걸 지금 말해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어차피 교수님께로 넘어가면 뒤집어엎으실 것 같다. 아니면 다시 쓰라고 하시거나. 논문이란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가장 형식적인 글이다. 하긴, 이걸 길영이가 깨닫기는 좀 이르긴 하다. 석사 2년차니까.

준상은 내용이 엄밀하게 보면 틀렸거나 논리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만 지적해주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스스로 신나서 연구할 때가 연구가 가장 잘 될 때니까.


D-8

주말 점심 학교 식당은 한가했다.
심정길(3): 다들 논문 내는 거 때문에 출근한 거지?
전길영(2): , 할 일은 해야죠.
전보영(2): 오빤, 원래 주말에 나오세요?
심정길(3): 기숙사에 있어 봐야 할 게 있어야지. 연구실에 오면 모니터도 크고 좋잖아.
김정원(4): 보영이 네가 안 와서 그렇지, 주말에 생각보다 많이들 나와. 솔로들 위주로.
심정길(3): 보영이도 남자친구 없지 않나? 그럼 출근해야지!
전보영(2): , 그런 거였어요?
선배의 무리수엔 영혼 없는 리액션이 답이다.
심정길(3): 근데 이번에 낼 수는 있겠어?
전길영(2): 교수님께 초안은 드렸는데, 아직 많이 고쳐야 할 것 같아요.
김정원(4): 너넨 정말 내겠네. 우린 아직 쓰는 건 시작도 못 했는데...
전길영(2): 형도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보통은 이런 반응이란 말이다. 근거 없는 좋은 말들. 정원은 다시 보영의 말이 떠올랐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죠.”였나?
전길영(2): 그런데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제가 이 연구 시작한 지가 1년아 다 돼가거든요, 근데 이번에 12쪽짜리 논문[10]을 쓰잖아요, 한 달에 한 쪽씩이더라고요. 한 달 내도록 A4 용지 한 쪽 분량 만들어낸 셈이잖아요. 그렇게 보면 좀 허망하기도 하고...
심정길(3): 한 달에 한 쪽씩이나 썼다고? 대단한데…. 3년 동안 딱 5쪽짜리 논문 하나 쓰고 말았어, 임마.
박사 4년차가 되도록 논문이라곤 3쪽짜리 국내 학회 논문 하나 써본 정원이나, 그마저도 없는 보영이는 그저 조용히 했다.

논문을 쓴다는 건 뭘까? 새로운 지식을 형식과 격식을 갖춘 글로 나타내는 과정일까? 몇 달 간의 잠복과 추적 끝에 글 하나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열애설 기사 같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청춘을 덜렁거리는 종이 몇 장에 기록해놓고는 나 잘 살았느냐고 검사받는 과정일까?

학자들은 논문을 보고[11], 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논문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논문 뒤의 이야기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


D-7

정원은 교수님의 메일을 받았다.
“이거 한 번 읽어봐. 차이점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논문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1] 답안을 쓰다. 소설을 쓰다. 이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닐 때가 많다.
[2] 송은경은 <영어 논문 쉽게 쓰기>(교보문고 출판)에서 “문제의 발견, 해결과정, 결과 등의 사전 준비가 논문 쓰기의 75%에 해당한다.”고 쓴 바 있다. 하지만 전산학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사전 준비가 95%도 훨씬 넘는다. 논문 쓰기는 연구의 마무리 작업쯤 된다. (송은경의 전공은 영어학이다.)
[3] 강원국은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 출판)에서 “말과 글의 성패는 첫마디, 첫 문장에서 판가름 난다”라고 단언했다.
[4] 캔디크러시소다: King.com에서 개발한 스마트폰, 스마트패드용 퍼즐 게임. 유희열 등등이 광고에 출연해 꽤 인지도 있다. 이 소설 시즌1 2화에는 같은 회사가 출시한 ‘캔디크러시사가’가 나왔었다. 광고비를 받은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내가 좋아하는 게임일 뿐이다.
[5] 듀의 법칙(Dues law)에서 두 가지를 유추해낼 수 있다. 첫째, 일의 능률은 마감 기한에서 멀수록 0으로 수렴한다. 난 늘 이 소설을 미리 써놓고 오랜 기간의 퇴고를 거쳐서 올려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늘 올려야 하는 날짜 직전에야 완성하곤 한다. 듀의 법칙 때문이다. 둘째, 마감 기한이 정해지지 않으면 일의 능률은 정의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소설 쓰는 걸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해둔 소재도 몇 가지 있다. 재밌을 것 같고, 꼭 쓰고 싶다. 하지만 마감 기한이 없다.
[6] 능률 리듬 법칙(Efficiency Rhythms Law): 출처는 없습니다. 제가 만든 말이니까요.
[7] 바이오리듬(Biorhythm): 사람의 신체, 감성, 지성이 일정 주기를 가지고 능력이나 효율의 높아졌다 낮아졌다가 한다는 가설. 입증된 적은 없다. 사이비 과학이다.http://ko.wikipedia.org/wiki/%EB%B0%94%EC%9D%B4%EC%98%A4%EB%A6%AC%EB%93%AC
[8] 쓰라는 논문은 못 쓰고 논문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매우 찔린다.
[9] 코드 리뷰(Code Review):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프로그램을 만들 때 실수를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프로그램은 컴퓨터가 읽는 것이므로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작성한 프로그램을 눈으로 읽으며 작성자의 의도대로 구현되어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이를 코드 리뷰라고 한다.
[10] 전산학 분야는 국제학회에 제출하는 논문이 보통 12~14쪽 정도다. 학술지에 내는 논문과 분량이 크게 차이나지는 않는다. 다른 분야(특히 자연과학분야)는 학회는 초록만 제출해서 심사 받은 다음 구술발표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전산학 분야는 학회도 완성된 논문으로 심사를 받는다.
[11] 한 해에도, 각 분야에 대해 너무도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다보니 논문을 ‘읽기’보다는 ‘보는’, 즉 훑어 읽는 경우가 많다. 논문을 어떻게 훑어 읽을 것인가에 대한 논문도 있다. S. Keshav. 2007. How to read a paper. SIGCOMM Comput. Commun. Rev. 37, 3 (July 2007), 83-84.



#7.
최초

연구자들은 인터넷을 만들었다. 모든 지식을 선으로 연결했다. 더 빠르게 지식에 접근했고, 더 빠르게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연구자들을 옥죈다.

논문은 세계 최초여야 한다. 최초가 아닌 논문은 애초에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심사에서 탈락해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게 뭐 쉬운가. 기똥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들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라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기 일쑤다. 더 놀라운 건 매해 수많은 논문들이 그 거미줄을 통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미줄을 더 촘촘하게 한다.


D-7

정원은 교수님이 보내주신 논문을 뽑았다. 실험이 제때 끝나려면 실험 스크립트[1]를 다듬고 재빨리 실험을 돌려야 한다. 보영이가 코드 리뷰[2]까지 해줬지만, 보나마나 버그[3]가 잔뜩 숨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논문이 정원이 쓰려던 것과 똑같은 거라면 말이다.

정원은 놀이동산 귀신의 집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잔뜩 긴장하며 논문을 읽어내려 갔다. 금방이라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아이디어가 논문에서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분명 비슷한 내용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수님이 보내주셨겠지. 하지만 얼마나 똑같을까? 당장이라도 연구를 그만 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이번 제출은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비슷한 것이 나와 버렸으니, 논문이 학회에 붙으려면 내용을 더 붙여야 할 테니까.

내심 포기해버릴 만큼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2주간 애 키운다는 심정으로 밤잠 설쳐가며 매달리긴 했지만, 애초에 너무도 희미한 희망이었으니까. 어쩐지 구현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더라니. 운이 좋다 싶더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하긴, 3년간 놀아제껴 놓고 3주 열심히 해서 박사를 거머쥐는 것도 순리는 아니지 싶었다. 논문 제출을 포기하게 되면, 이걸 핑계삼아 술이라도 퍼 마셔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늘어지게 잠이나 퍼 자야겠다. 우울함은 속쓰림으로 달래고, 속쓰림은 순대국밥으로 달래야지. 논문 제출을 포기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뭐. 늘 그래왔잖아? 이게 박사우울증이란 건가?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어 한다니.

정원은 일단 논문을 계속 읽었다. 교수님께 답장은 보내야 할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단 달랐다. 꽤 비슷하긴 하지만, 이란성 쌍둥이 정도의 차이점은 보였다. 신선하진 못해도 비린내를 잘 잡아내면 요리가 될 순 있을 것 같다. 괜히 심하게 쫀 것 같다.

정원은 뒤를 돌아 보영을 불렀다.
김정원(4): 보영아, 너 교수님 메일 봤지?
전보영(2): 논문 보내주신 거요?
김정원(4): .
전보영(2): 지금 그 논문 보고 있는데요, 되게 비슷해 보이는데...
김정원(4): 지금 어디 보는데? (보영이가 들고 있는 논문을 본다.) 3장 보는 거야?
전보영(2): 꼼꼼하게 읽진 않았는데요, 2장까진 거의 같고, 3장도 크게 다르지 않던데...
김정원(4): 풀고자 하는 문제가 같으니까 2장까진 거의 같을 수밖에 없어. 꽤 비슷하긴 한데, 내 생각엔 차이점을 찾으라면 찾을 순 있을 것 같아.
정원은 자신이 얼마나 절망했었는지는 숨겼다. 부끄러우니까.
전보영(2): 차이점이 뭔데요?
김정원(4): 일단 이 논문은 하드웨어를 추가해서 넣었잖아. 그런데 우리 것은 이미 나와 있는 하드웨어를 약간만 개선시켜서 사용했잖아. , 뭐더라…. 잠깐, 이러지 말고 좀 정리를 해보자.
정원은 노트를 가져와서 보영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차이점을 적어가며 설명해주었다. 설명하다가 정원이 침이 허공으로 튀었다. 보영은 이 오빠가 열심히도 설명하는 구나, 하면서 못 본 척했다. 보영은 질문을 했다.
전보영(2): 그런데 classification을 쓴 건 똑같은 거 아니에요?
김정원(4): 아니지, 여기를 보면 이건 classification을 썼다기 보다는 하드웨어를 추가해서,
전보영(2): 그러니까 하드웨어로 classification을 한 거잖아요.
김정원(4): 어라? 그러네?
정원은 보영의 말에 무턱대로 “아니지”로 대답하기 시작한 걸 후회했다. 엄마가 여자 말 잘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도 떠올랐다.
전보영(2): 오히려 우리 것이 classification을 사용한 게 아니라 프로그램의 특성을 직접 파악해서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린 counter를 써서 그 값을 사용하잖아요.
보영이 말이 맞았다. 역시 여자 말은 잘 들어야 한다.
김정원(4): , 좋은데. 고마워. 그럼 교수님께 말씀드리러 가자. 어차피 교수님이 똑같다고 하면 접어야 하니까.
정원과 보영은 교수님 방으로 갔다.
권대성(교수): 메일 보낸 거 봤어?
김정원(4): , 그거 읽어봤는데요,
정원은 보영이와 논의한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의 두뇌가 빛의 속도로 돌아가버렸음이 느껴졌다.
권대성(교수): , 알았어. 그럼 이거 구현할 수 있겠어? 이거랑 비교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김정원(4): ?
권대성(교수): 시간이 없나? 그렇다고 비교군에서 빼버리면, 왜 비교 안 했냐고 리뷰어[4]들이 뭐라고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바르다 권선생[5]이다. 논문은 세계 최초임을 입증하는 동시에 세계 최선임을 입증해야 하는 거니까. 비슷한 아이디어라면 더더욱 정량적 비교를 해봐야 한다.

정원은 암담했다. 여자친구 부모님 만났는데 나한테 돈봉투를 쥐어주시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이제 일주일 남았단 말이다. 일단 계산을 해보았다. 실험이 최소한 이틀은 걸릴 것이다. 물론 아주 아주 운이 좋을 때의 얘기다. 적어도 사흘은 잡아두어야 한다. 실험 결과 가지고 그래프 그리고 글 쓰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면 구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사흘. 게다가 오늘은 벌써 저녁이 다 되어 가니까….
권대성(교수): 안 될 것 같아?
김정원(4): 하는 데까진 해봐야죠.
정원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6]
권대성(교수): 그래, 그럼 가 봐.
정원과 보영은 교수님 방을 나왔다.
전보영(2): 오빠,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정원(4): 그렇다고 교수님께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전보영(2): 아…. 그러네요. 어쨌든 그럼 다른 일은 최대한 저에게 넘기세요. 관련 연구 정리하는 거라도 좀 해두고 있을까요?
김정원(4): , 아니, 그건 시간 남으면 하고, 일단 실험 스크립트[1] 짜는 걸 좀 해주라.
전보영(2): 그럼 무슨 실험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세요.
김정원(4): , 바로 보내줄게.
정원은 자리로 돌아와 보영에게 메일을 하나 썼다. 그리고 논문을 다시 쳐다봤다. 답답하다. 믹스커피를 하나 탔다. 어차피 밤을 새야할 운명 같으니. 논문과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언제 또 이런 논문이 나왔단 말인가? 몇 달만 늦게 나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럼 아직 희망을 품고 있을 텐데. 아니다. 내가 논문을 조금만 열심히 찾아봤으면, 평소에 논문 읽는 습관만 있었어도 진작 발견했을 논문이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다른 비교군 대신 이걸 구현했겠지. 그러면 지금쯤 희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비교군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지금 발견한 게 최상의 경우일 수도 있다. 듀의 법칙[7]에 따르면 갈수록 능률이 올라갈 테니까. 나는 이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풍부한 비교군을 가진 논문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수…있을까?…’

정원은 보영을 떠올렸다. 교수님을 떠올렸다. 물러설 데가 없었다. 논문을 더 자세히 읽었다. 자기가 구현하던 시뮬레이터(simulator)의 구조를 떠올렸다. 어떻게 구현할지 구상했다. 몰입했다.


D-6

정원이 완성과 싸운다면, 길영은 완벽과 싸우고 있었다. 길영은 D-14에 모든 실험 데이터를 다 뽑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2주 정도는 글을 쓰는 데 집중하려고 했다. 아무리 실험 데이터가 중요하대도 논문은 일단 ‘글’이니까. 길영은 2주가 남기 전에도 짬짬이 초안을 작성했다.[8] 그는 계획적인데다 성실하니까.

하지만 일주일도 안 남은 지금, 길영은 여전히 구현과 실험 중이다. 교수님 덕분이다. 길영은 D-14에 교수님께 실험 데이터를 보여드렸었다. 잠시 고민하던 교수님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그 질문에 해석까지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1. threshold를 이 값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 ⇒ 대충 정한 값이지? threshold를 다양하게 해서 실험해봐라.
2. 여기서 다른 논문에 나온 B를 하지 않고 A를 새로 만든 이유가 있나?  B도 구현하고 실험해서 둘을 비교해봐라.
3. 이 부분에서 C D를 순차적으로 하는 이유가 있나?  C D를 병렬로 처리하게끔 구현해라. 그러자면 당연히 문제가 많이 생기겠지만 알아서 해결해라. 그리고 실험 결과를 뽑아라.
교수님은 데카르트라도 빙의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세 치 혀로 천냥 빚도 갚는댔나? 세 치 혀로 천 일짜리 야근이라도 만들어 줄 기세였다.

하지만 길영은 일주일만에 해냈다. 그리고 준상과 함께 교수님을 찾아갔다. 드디어 논문 작업을 하게 되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교수님은 다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셨다. 그러니까, 다시 몇 가지 일을 시키셨다. 학생이 무슨 빠삐코도 아니고, 끝까지 쭉쭉 빨아먹을 기세였다. 길영은 조금 불안해졌다.
전길영(2): , 이래가지고 논문 낼 수 있을까요? 이미 논문에 넣을 내용은 충분하지 않아요?
강준상(4): 교수님이 보기엔 안 충분한가 보지.
전길영(2): 다른 논문 보면 이거 보다 덜 하고도 논문 잘만 붙던데.
강준상(4): 그럼 니가 교수해라~ 논문 마음대로 내게~
전길영(2): 그게 아니라요, 이러다 못 내면 어떡해요?
강준상(4): 내가 봤을 땐, 니가 너무 잘해서 그래.
전길영(2): ?
강준상(4): 니가 전에 시키셨던 걸 다 못 했으면 더 이상 안 시켰을 거야. 있는 것만 가지고도 그럴듯하게 논문을 만들어내셨겠지. 근데 그걸 다 해냈잖아. 아직 6일이나 남았고. 그러니까 더 시키는 거야.
전길영(2): 아니 그럼 쓰는 건 언제 쓰구요.
강준상(4): 알아서 하시겠지. 내용이 이쯤 완성됐으니, 어떻게든 내긴 내실 거야.
전길영(2): 계속 네댓 시간 밖에 못 자서 진짜 피곤한데.
강준상(4): 그럼 오늘이라도 푹 자고 와. 내가 봤을 땐, 데드라인까지 충분히 잘 기회가 없을 거야.
전길영(2): 오늘 시키신 게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강준상(4): 그래, 그게 니 병이야. 근데 그러다 진짜 병 걸린다. 조심해라.
본인도 별 다를 것도 없으면서 준상은 충고를 했다. 길영은 충고를 듣지 않았다.


D-5

정원의 구현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실험을 간단하게 해서 테스트해 봤더니 결과도 잘 나온다. 이제 전체 실험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면 안 될 텐데. 실험에 걸리는 시간을 예측해보았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3일이면 충분하다. , 됐다. 드디어 되는 건가. 보영이가 만들어둔 스크립트를 약간 고쳐서 마지막 실험에 대한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김정원(4): 보영아! 드디어, 요 엔터만 누르면 마지막 실험 시작이다!
전보영(2): , 진짜요?
김정원(4): 요거 엔터 눌러놓고, 음료수 하나 마시고 오자. 왜냐면, 어차피 한 번은 죽을 거거든. 안 그럴 수가 없어.
전보영(2): 그럼 테스트를 좀 해보고 돌리는 게 낫지 않아요? 시간이 조금만 남으니까...
김정원(4): 당연히 해봤지. 짧은 실험은 잘 끝나. 근데 전체 실험을 한 번에 넣으면 또 모르는 거잖아. 일단 음료수가 마시고 오자. 잘 돌고 있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고치면 되고 뭐.
전보영(2): 그래요!
정원은 힘차게 엔터를 눌렀다. 그리고 보영과 음료수를 마시고 왔다. 10분쯤 걸렸나? 그런데 실험은 아직 죽지 않고 잘 돌고 있었다. 별 일이네, 싶었다. 보영이가 코드 리뷰를 훌륭하게 해준 덕이라고 추켜세웠다. 정원은 논문 얼개를 구상했다. 아직 실험은 안 끝났지만, 아이디어 설명은 써둘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득 불안했다. 이번 논문에 유독 운이 잘 따라주는 게. 유독 버그도 별로 없는 게. 큰 수의 법칙[9]에 따르면 행운이 많이 따라줄 수록 그 다음에 불행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니까.


D-3

길영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매점에 다녀왔다. 컵라면과 즉석밥을 몇 개 사왔다. 시리얼과 우유도 사왔다. 남은 3일간은 연구실에서 끼니를 때우려고 한다. 기숙사는 찜질방처럼 쓸 계획이다. 씻고 잠시 자고 나오는.

길영의 눈 밑은 부어 있다. 속도 약간 안 좋았다. 대뇌피질[10]과 두개골 사이에 온천수라도 들어찬 듯하다. 뜨듯한 게 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3시간 간격으로 기면증[11]이 온다. 15분이라도 눈을 감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온다.

하지만 3일만 버티면 된다. 3일만 버티면 쉴 수 있다.

길영은 이제 논문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남은 실험이야 준상이 해줄 것이고, 관련 연구 정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글을 쓰는 건 교수님께로 넘어갔다. 교수님이 퇴고를 부탁하기 전까진 손 대선 안 된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 아니다. 사실 그림은 글보다 중요하다. 연구자들이 논문을 볼 때 대개 각 장의 소제목과 그림 중심으로 훑어보기 때문이다.[12] 이 과정을 통해 논문의 대강을 파악한다. 그리고 자세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논문만을 자세히 읽는다. 그러니 그림은 논문의 첫인상이다. 논문 전체를 통틀어 초록(abstract) 바로 다음으로 많이 보여지는 것이다.

단 하나의 흑백 그림으로 논문의 핵심을 담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길영이 디자인을 공부한 적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해야지. 이렇게 그리다 지우고, 저렇게 그리다 지우고, 를 반복했다.

다시 극심한 졸음이 온다. 어느덧 꾸벅, 하고 졸았다. 마우스가 화면 끝으로 가 있다. 화면엔 원치 않는 선 하나가 그려져 있다. 졸음을 깨울 기운조차 부족하다. 눈에만 힘을 줘서 떠 보았다. 시계를 봤다. 저녁 10시다.
‘아, 찜질방 계획이고 뭐고, 첫 번째 그림만 마치면, 오늘은 잠 좀 충분히 자야겠다. 어차피 마지막 이틀은 밤을 새다시피 할 테니까.
어차피 낼 힘은 없으니 가만히 앉아 마우스 클릭을 계속했다. 거진 다 그렸다고 생각할 찰나, 교수님께 메일이 왔다.
“쓰다 보니 생각났는데, 우리가 제시하는 기법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성능 향상을 이루는지, 그에 대한 수학적 분석이 있었으면 좋겠어. 3장 각 절 앞부분에 잠깐씩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
방에 가서 담요라도 하나 가져오는 게 취침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학생휴게실에 소파가 있다고 했었나?

논문은 세계 최초여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도 그래야 한다. 알겠다. 어떻게든 해보겠다. 그런데, 그럴 거면, 쓰는 거나 좀 쉬우면 안 되나? 뭐가 이리 힘드냐….


D-2

이제 정원도 관련 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본문은 대충 들어갈 내용만 정리해서 교수님께 넘겼다. 보영은 그래프를 만들고 있었다. 실험이 끝나는 대로 숫자만 적어 넣으면 완성되게끔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보영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 실험이 안 끝나는데요…” 

[1] 스크립트(Script): 일반적으로 다른 프로그램을 조종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지칭한다.
[2] 코드 리뷰(Code Review):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프로그램을 만들 때 실수를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프로그램은 컴퓨터가 읽는 것이므로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작성한 프로그램을 눈으로 읽으며 작성자의 의도대로 구현되어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이를 코드 리뷰라고 한다.
[3] 버그(bug): 직역하면 ‘벌레’. 프로그램에 개발자가 의도치 않은 오류가 있을 때 이 오류를 ‘버그’라고 한다. 컴퓨터 초창기에, 컴퓨터에 실제로 벌레가 들어가 오작동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4] 리뷰어: 논문을 심사하는 사람을 리뷰어라고 한다. 본 소설은 의도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한글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왜래어 수준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는 데다, 소설에서 대화문 안에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영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5] 바르다 권선생: 최근 뜨고 있는 김밥 전문 음식점인 ‘바르다 김선생’의 패러디. 광고료나 협찬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에서 전보영이 김정원에게 했던 말이다.
[7] 듀의 법칙(Dues Law): 마감 기한(due date)이 가까이 올수록 일의 능률이 올라간다는 법칙. 자세한 설명은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를 참고하라.
[8]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 - http://scienceon.hani.co.kr/274724
[9] 큰 수의 법칙: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은 이론상 1/2이다. 그런데 동전을 4번 던졌을 때 앞면만 4번 나오는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하지만 동전을 10,000번쯤 던지면 앞면이 나오는 횟수는 5,000번에 근접하며, 더 큰 숫자만큼 던져볼수록 앞면이 나오는 횟수는 전체의 1/2에 가까운 숫자가 된다. 이를 ‘큰 수의 법칙’이라 한다. 다르게 말하면, 큰 수로 갈수록 실험상 결과 값이 이론적 확률과 비슷해진다는 법칙이다.
[10] 대뇌피질: 대뇌 표면에 위치하는 신경 세포들의 집합. , 대뇌의 껍질이라고 보면 된다.
[11] 기면증: 일상생활 중 발작적으로 졸음에 빠져드는 신경계 질환이자 수면장애. -http://ko.wikipedia.org/wiki/%EA%B8%B0%EB%A9%B4%EC%A6%9D
[12] 다음 논문에서 권유하고 있다. S. Keshav. How to read a paper. SIGCOMM Comput. Commun. Rev. 37, 3 (July 2007), 83-84.


#8. 직감

D-2

정원이 석사 졸업을 한 학기 앞뒀을 때, 선배들이 자주 물었다. 무슨 주제로 졸업할 거냐고. 생각하던 주제를 말하면, 늘 물었다. 플랜 비(Plan B, 두 번째 계획)는 없냐고. 교수님이 “만약 안 되면 이거 해서 졸업하면 돼요” 하시던 게 있어 답해 줬다. 그러면 꼭 그랬다. 그걸로 졸업하게 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선배들이 맞았다.

나쁜 일은 당연하게 다가온다. 좋은 일은 운명이라 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성공을 성취하려다 옴짝달싹 못하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게 인생이다. 보영이 힘없이 정원을 불렀을 때 정원은 직감했다. ‘역시나.

운전을 오래 하면 엔진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 났는지 안다고 했던가. 보영이가 컴퓨터에 띄워 놓은 창을 보자마자 정원의 머리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김정원(4): 이거, 무한루프[1] 같은데….
전보영(2): 어떻게 알아요?
김정원(4): 그냥 느낌이 그래….
그제야, 다시 한 번 뭔가 떠올랐다.
김정원(4): 보영아, 혹시 A B랑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어?
전보영(2): ?
정원은 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스코드를 열었다. 방금 떠올랐던 부분을 살폈다. A 상황에서는 B 상황이 아닌 걸 확인한 뒤에 C를 하도록 했지… 그래, 그리고 B 상황에서는 A 상황이 아닌 걸 확인한 뒤에, C를 하도록 했고…, 만약 A B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A를 확인한 다음에 B를 확인하러 가고, B가 맞으니까 다시 A를 확인하러 오고, 그러면 A가 또 맞으니까 다시 B를 확인하러 가고, 다시 A를 확인하러 오고…. 그래 이거지! 아니 근데, A B가 동시에 일어날 리가 없는데….
전보영(2): 오빠, 근데, 가능할 것 같아요.
김정원(4): ?
전보영(2): 만약 두 프로그램에서 동시에 cache miss가 났는데요, 그게 같은 set에 속해 있는데다가, 하필 그때 그 set에 해당하는 데이터가 prefetch라도 되면...
김정원(4): 우리 prefetch 꺼놓지 않았어?
전보영(2): ? 꺼놓기로 했어요? 기본 설정이 켜져 있는 거길래….
김정원(4): 내가 그 말을 안 했구나.
그러니까 정원이 prefetch를 끄라는 말만 했다면, 아니면 정원이 구현은 조금만 대충해서 A일 때 B임을 확인하는 걸 빼먹었다면, 반대로 아주 철저히 해서 A, B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도 고려했다면, 혹은 보영이 이 문제를 미리 발견했다면…. 이 중 어느 하나만 일어났어도 문제는 없었을 거란 말이다. 1%의 확률[2], 거기에 기어코 걸려들었다.

포기다. 어차피 마감은 못 맞춘다. 실험엔 3일은 필요하니까. 쉽게 고쳐지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걸 고친다고 완벽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언젠가 일어날 일이 약간 늦게 일어났을 뿐이다. 정원은 그렇게 느꼈다.


정원과 보영은 교수님을 찾아갔다. 상황을 말씀드렸다.
권대성(교수): 그래프 포맷이랑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숫자만 넣으면 되잖아.
김정원(4): 그게, 실험을 하는데 최소한 3일은 필요해서요.
권대성(교수): 더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어디서 컴퓨터라도 더 구해온다든가.
김정원(4): 그게… 길영이 것도 실험이 돌아가고 있어서요.
권대성(교수): 혹시 어디까지 가서 멈췄는지는 알아? 중간 결과라도 없어?
김정원(4): 실험이 다 끝난 다음에만 결과를 찍도록 해놓아서….
교수님의 말을 전부 반박해낸 것도 오랜만이다. 정원은 왜 안 되는지 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몰랐지만. 교수님은 잠시 침묵했다. 평소엔 그리도 두뇌회전이 빨랐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시간이 걸렸다.
권대성(교수): 그럼 방법이 없는 거네. 알았다. 일단 버그 고치고, 연구 계속 진행하도록 해. 다음 주쯤 다시 얘기해보지.
땅땅땅. 포기를 승인 받았다. 정원과 보영은 재판장을 나왔다.
전보영(2): 미안해요. 제가 좀 더 잘 봤으면 괜찮았을 텐데.
김정원(4): 아냐, 내 책임이야. 열심히 도와줬는데 내지도 못하고…. 내가 미안해.
전보영(2): 오빠가 뭐가 미안해요.
정원은 정말 미안했다. 보영은 석사 1년차 때도 정원과 같이 연구하다가 접은 적이 있다.[3] 그 후로 늘 부채감이 있었다. 연구란 게 한 번은 뭔가 되는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맛에 중독돼서 계속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정원은 그 맛을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맛을 못 본 사람과 맛을 본 사람의 차이는, 유니콘을 찾는 사람과 낙타를 찾는 사람의 차이쯤은 될 테니까.
김정원(4): 이제 넌 졸업 준비에 집중해. 도와 줄 거 있으면 말만 하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전보영(2): 오빠도 고생 많았어요.
둘은 연구실로 돌아갔다. 정원의 책상에 논문이 널브러져 있다. 관련 연구를 정리한답시고 잔뜩 뽑아놓은 논문들이다. 정리할까, 하다가. 대충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보영이 곧 갈 것 같기 때문이다. 눈치를 봤다. 보영이 짐을 챙기다 말고 자리에 앉아 뭔가를 한다. 정원도 스팸 메일함을 비우고, 다운로드 폴더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 보영이 일어났다.
전보영(2): 오빠, 안 들어가세요?
김정원(4): , 들어가야지. 지금 가려고? 잠시만….
정원은 후딱 가방을 멨다.

조금만 걸어도 샤워는 필수고 짜증은 선택인 여름 밤. 에어컨 한기 덕에 닭살 돋은 팔도 금세 습기를 머금는다. 정원의 가슴도 습기를 머금는다. 울적하다. 옆에서 걷는 보영에게도 면목이 없다. 이럴 거면 왜 같이 나왔을까?
김정원(4): 기분도 그런데, 소주나 한 잔 할까? 날도 더운데 맥주도 괜찮고.
전보영(2): 저는 좀 피곤해서요. 오늘은 바로 들어갈래요.
오늘‘은’ 그냥 들어간다니 다음번에 같이 마시자는 건지, 완곡어법이지만 대놓고 거절한 건지…. 정원은 헷갈렸다. 온도가 높으니 소리는 빨리 전달될 텐데,[4]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김정원(4): , 그래? 그래, 들어가서 푹 쉬어. 졸업 준비도 하려면 빡셀 텐데….
정원은 보영을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보영이 거기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정원은 혼자 남았다. 곱게 기숙사에 들어갈 순 없었다. 졸업은 고사하고 논문 제출마저 실패한, 박사 4년차이기 때문이다. 같이 고생한 보영과 한 잔 하면 딱 좋겠지만, 거절했으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불러낼 친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옛날엔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졸업해서 학교에 없는 친구가 절반이고, 통 연락도 안 하는 ‘페친’[5]으로만 남은 친구가 절반이다. 그래도 이참에 연락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졸업은 고사하고 논문 제출마저 실패한, 그런데 같이 술 한 잔 할 친구마저 없는, 박사 4년차가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술 마시고 행패를 부려도 정상참작 될 것만 같다.

이런 우울함은 어떻게 즐겨야 좋을까? 정원은 술집에 혼자 갈 용기는 없었다. 대신 한 야식집에 들러 양념삼겹살을 샀다. 기름진 삼겹살을 숯불에 구운 다음 매콤짭짜름한 양념에 잰 것이다. 그야말로 소주의 절친이다. 성인 남자 둘이서 식사로도 먹을 양이다. 하지만 소주와 함께라면 문제없다.[6] 편의점에 들러 소주 두 병을 샀다. 한 병만 살까도 했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기숙사 휴게실로 갔다. 마침 아무도 없다. 텔레비전을 틀었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나온다. 속도감 있고 재미도 있고 승부욕과 식욕마저 자극해준다. 좋다. 양념삼겹살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조근조근 씹는다. 입천장에 기름이 끈적하게 붙는다. 소주로 씻어달라고 난리다. 매콤한 맛에 한 방, 짠맛에 두 방 맞은 혓바닥도 소주로 어루만져 달라고 난리다.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양념삼겹살과 한 몸으로 엉켜 식도를 매끈하게 쓸어내린다. 키야. 식도에도 미각세포가 있었던가.

또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정원은 열심히도 먹었다. 혼자 먹으면 빨리 먹게 돼서 안 좋다고 했던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으면 빨리 먹게 돼서 안 좋다고 했던가. 이따금씩 그만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먹었다. 지금 생각이란 걸 하다간 논문 생각마저 날 테니까.

다 넣었다. 소주도, 양념삼겹살도. 정원은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침을 계속 삼키며 눌렀다. 거울은 없지만 얼굴이 벌개진 게 느껴졌다. 방으로 갔다. 룸메이트가 없다. 씻으려다가 귀찮아서 말았다. 옷만 대충 벗어던지고 에어컨을 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 진탕 마셨으니, 이제 잊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뭐.
박사 4년차의 하루가 결론 없이 끝나간다.



D-13:00

아침 8. 권대성 교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학생들은 아직 안 왔다. 늦게 들어갔을 테니까.

논문 마감일. 이쯤 되면 교수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 논문에 들어갈 재료를 만드는 과정엔 학생의 역할이 크다. 아이디어를 내고 구현을 하고 실험을 하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하지만 재료를 요리하고 조미료를 첨가해서 좋은 논문을 만드는 과정엔 교수의 역할이 크다. 논지를 매끄럽게 만들고 문장을 유려하게 만드는 일은 짧은 시간 내에 가르치기 어렵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학생에게 해보라고 시키고 첨삭을 해주겠지만, 벌써 마감일이니까.

마감까진 13시간이 남았다. 날짜로 치면 어제까지였다. 하지만 기준 시간대가 AOE(Anytime On Earth, 지구상 아무데나). 서울 시간대가 +9:00이고, -12:00까지 있을 테니까, 한국시각으로 오늘 밤 9시까지다. 논문을 낼 때마다 해야 하는 시간 계산, 지구의 자전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다.



D-7:00

길영은 갑자기 척추가 시렸다. 머리에 시원한 피가 돌았다. 직감이 좋지 않다. 침대에 누워 있음이 느껴졌다. 극도의 안락함. 침대, 육체, 이불이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기숙사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극도의 불안감. 심장이 진동한다. 시간을 봐야겠다.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이 안 느껴진다. 문득 등 밑에서 진짜 진동이 느껴진다. 어렴풋이 알람 소리도 들린다. 등 밑을 더듬는다.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핸드폰이다. 눈을 질끈 감은 뒤, 한쪽 눈만 겨우 떠서 핸드폰 빛을 견딘다.

“헉.” 오후 2시다. 5시간만 자려고 했는데, 9시간이나 자 버렸다. 원래는 밤을 새려고 했다. 마감일이니까. 하지만 피곤에 쩔어 있는 길영을 보다 못한 교수님이 잠 좀 푹 자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5시간은 자려고 했던 것이다. 9시간이라니, 이건 논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귀신을 만난 꿈, 논문 4번 그래프, 아이유 노래가 뒤엉킨다. 홍대 클럽처럼 어지럽다. 덕분에 몸도 파업이다. 평소 같았으면 잘 달랬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캡사이신라도 발포해야 하는 걸까.

길영은 옆으로 굴러 침대 밑으로 떨어지다시피 해서 일어났다. 겨우 샤워 바구니를 챙겨 샤워실로 향한다. 물을 맞으면 정신이 들겠지. 9시간이나 잤으니까.



D-6:30

길영이 연구실 문을 연다. 준상이 반긴다.
강준상(4): ! 왔네. 오늘은 잠 좀 잤냐?
전길영(2): , 제가 너무 늦었죠. 늦어도 11시까진 나오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어? 정원이 형도 와 있었네요?
김정원(4): 교수님이 네 논문 오타나 이상한 거 있나 좀 봐달라고 하셔서. 마침 잘 됐다. 이거 좀 물어볼게.
전길영(2): , 그래요? 뭔데요?
길영은 정원의 질문에 대답했다. 분명 대답을 잘한 것 같지 않은데, 정원은 빨리도 이해한다. 길영은 정원이 머리가 좋다고 느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논문이 없지? 모르겠다.
김정원(4): 내가 오타 다 잡아줄 테니까, 너 논문 꼭 붙어야 한다.
전길영(2):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강준상(4): 너 논문 붙을 확률이 얼만지 알아?
전길영(2): , 작년엔 이 학회 논문 통과율[7] 18%쯤 되지 않았어요?
강준상(4): 50%. 붙는다, 안 붙는다.
김정원(4): 얘 또 아저씨 개그 하네. 어쨌든, 내 논문 포기한 거 알지? 니가 우리 연구실 마지막 희망이야. 그럼 수고해.
길영은 자리에 앉아 그래프를 다듬었다. 글자가 너무 작은 걸 좀 키웠다. 막대가 너무 얇은 걸 좀 굵게 했다. 훑어만 봐도 명쾌한 논문을 만들고 싶었다.



D-3:00

“길영, 좀 와봐”
교수님이 메시지를 보냈다. 길영은 반사적으로 뛰어서 교수님 방으로 갔다.
권대성(교수): 여기 이거, Onur[8]가 쓴 논문이랑 차이점이 뭐지?
전길영(2): ? 음… 적용하려는 환경이 다르죠. 그 논문은 CPU GPU가 섞여있는 상황에 특화된 것이고 저희 것은 좀 더 일반적인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권대성(교수): 그럼 직접적인 비교를 하는 건 좀 불공평하겠네? 그렇다고 빼기는 좀 그렇지? 그럼 직접적인 비교가 불공평한 면이 있다는 걸 언급하도록 하자. 2장은 내가 고칠 테니까, 5장을 고쳐. (시계를 본다.) 그럼 난 30분 정도 더 2장을 고치고, 그 다음에 3, 4장을 쭉 보도록 할게. 지금 뭐하고 있지?
전길영(2): 5장 보고 있는데요.
권대성(교수): 그래, 다 보고 나면 2장부터 다시 보도록 해. 6장은 준상이한테 맡기자. 내가 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럼 가봐.
말 참 빠르다. 길영도 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5장을 열었다.



D-2:00

똑똑똑. 길영이 급히 교수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길영(2): 교수님, 3장에 여기 이거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논문에서 제시한 건 GPU를 위한 prefetcher가 아니거든요.
권대성(교수): 오케이. 그럼 니가 고쳐.
전길영(2): 그리고 저, 결론 부분을 아직 안 보신 것 같은데….
권대성(교수): 잘 써놓지 않았어? 거기까지 살펴볼 시간 없을 것 같은데….
전길영(2): 써두긴 했는데요...
권대성(교수): 그거 심사할 때 잘 안 읽어. 니가 고쳐.
길영은 자기가 쓴 영어 문장을 그대로 심사 받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D-1:00

교수님이 길영의 방으로 왔다.
권대성(교수): 지금 학회홈페이지 들어가서 하나 제출해놓아. 막판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서 느려질 수 있으니까, 일단 제출해놓고 계속 고치자. 내가 1장을 중심으로 고칠 테니까, 너희들이 나머지 부분 보고 오타 없나 찾아봐.
길영은 떨렸다. 꼼꼼히 확인하고 논문 파일을 업로드 했다. 이제, 어쨌거나 심사는 받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마이크로(MICRO)[9]!

하지만 감격에 젖기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다시 뚫어져라 2~5장을 훑었다. 보고, 또 봐도 오타가 나오고 어색한 문장이 나온다. 단수, 복수가 틀린 것도 발견된다. 오타란 청소부들의 쉼터와 같다. 그냥 볼 땐 안 보인다.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다.[10]



D+0:00:05

전길영(2): 아이, 닫혔네.
강준상(4): 벌써? 너무 칼 같다.[11]
전길영(2): 마지막에 오타 몇 개 고친 거 못 올렸어요.
강준상(4): 어쩔 수 없지 뭐.
둘은 교수님 방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까지 열심히 수정 중이던 교수님이 고개를 든다.
권대성(교수): 그래? 아직 고칠 게 남았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수고했어. 그럼 들어들 가.
길영은 정원에게도 찾아갔다.
전길영(2): ,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김정원(4): 잘 냈어?
전길영(2): 내긴 냈어요. 근데 오타 몇 개 발견했는데 닫혀서 못 냈어요..
김정원(4): 에이, 오타야 니가 완벽하다고 생각했어도 남아 있는 거고. 어쨌든, 부럽다. 논문도 내고.
전길영(2): 내면 뭐해요. 붙어야죠.
길영은 나름 정원을 배려한 것이다. 논문을 내지도 못한 정원에게 위세를 떨 순 없지 않은가.
김정원(4): 에이, 낸 게 어디야. 제출을 해야 붙을 수도 있는 거지. 고생 많았어.
전길영(2): , , 고마워요.
김정원(4): 그래, 논문 냈다고 술 마실 성격은 아니니, 들어가서 쉬어라.
전길영(2): 내일 봐요.
하지만 정원은 길영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논문을 제출하는 건 로또를 사는 것과 같다. 안 될 가능성은 높지만,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행복하다.



D+2:00

“여보, 나 왔어.
권대성 교수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불 켜진 거실엔 아무도 없다. 안방 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다. 침대 위로 두 점이 반짝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당신, 지금 몇 시야?


[1] 무한루프(infinite loop): 프로그램의 특정 부분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선생님이 학생에게 벌을 주려고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계속 운동장 돌고 있어”라고 했다고 하자. 학생은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선생님이 깜빡하고 퇴근해버린다면, 학생은 끊임없이 운동장을 돌아야 한다. 비슷한 실수를 프로그래머가 하면 무한루프가 생긴다.
[2] 다음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조건과 해당 사건이 일어날 확률의 추정치다.
 1. 정원이 prefetch를 꺼놓으라고 보영에게 말했다. => 70%. 석사 2년차에게 실험을 시킨다면 세세한 설정을 모두 알려주는 게 당연하다. 정원도 그래왔고.
 2. 보영이 알아서 prefetch를 껐다. => 10%, 기본 설정을 바꾸기엔 보영은 석사 2년차다. 하나 하나 의심해보고 물어보기엔 정원이 너무 바빠 보였다.
 3. 정원이 구현을 대충했다. A 상황일 때 B 상황인지 점검조차 하지 않는다. => 80%. 어차피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왜 그런 쓸 데 없는 짓을….
 4. 정원이 구현할 때 A B가 동시에 성립하는 상황도 예외처리 했다. => 30%, 이왕 쓸 데 없는 짓을 하려면 끝까지 했어야지….
 5. 정원이 구현을 더럽게 했다. A 상황일 때 B 상황인지 점검하는 것을, B 상황인지 점검하는 코드를 사용하지 않고, 따로 구현했다. => 70%. 평소 정원이 구현에 깔끔떨지는 않는다.
 6. 보영이 코드 리뷰를 하면서 A B가 동시에 성립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 10%. 보영은 이제 석사 2년차니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30% X 90% X 20% X 70% X 30% X 90% = 1.0206%이다.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1) 새벽 세 시 - http://scienceon.hani.co.kr/153375
[4] 소리의 전달 속도는 온도에 비례한다. 정확하게는 절대 온도(섭씨 온도 + 273.15)의 제곱근에 비례한다. Hugh D. Young, Roger A. Freedman. University Physics with Modern Physics 11th Edition 601. http://en.m.wikipedia.org/wiki/Speed_of_sound
[5] 페친: ‘페이스북 친구’의 준말.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좋은 근황들과 정치적 의견들만을 전해 듣고, 정신적 소통 없이 이따금씩 클릭만 주고받는 관계.
[6] 2013 4 25 XTM에서 방영된 <남자의 기술>에서, 의사 박상준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술만 먹으면 이상하게 많이들 드시죠? 초인적인 위를 가지고 막 먹기 시작해요. 왜 그러냐 하면, 술은 전체적으로 모든 걸 억제해요. 포만감도 마찬가지에요. 원래는 포만감을 느껴야 되는데 그 느낌을 억제하는 거예요. 술이. 그러니까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7] 논문 통과율(accept ratio): 제출된 논문 대비 선정된 논문의 비율. 논문 통과율이 낮은 학회에 논문이 선정되었다면, 상대적으로 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셈이 된다. 따라서 논문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 학회의 저명도를 나타내는 지표로도 활용된다. 저명한 학회일수록 연구결과를 제출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논문 통과율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명한 학회일수록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연구결과만 제출하기 때문에 논문 통과율이 심하게 낮아지는 일은 드물다.
[8] Onur Mutlu: 카네기 멜론 대학 교수. 컴퓨터 구조 분야에서 논문을 많이 쓰기로 유명하다.http://users.ece.cmu.edu/~omutlu/
[9] 마이크로(MICRO): 컴퓨터구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회들 중 하나. 정식명칭은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이며, 보통 줄여서 마이크로(MICRO)라 부른다.
[10] 2015 5 12 PD수첩 1037회 “근로자 점심시간과 휴게공간”에서 청소부들의 휴게실 실태를 고발한 바 있다.
[11] 논문 제출 시스템이란 것이, 되게 철저하고 기계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되게 인간적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닫히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20~30분에서 몇 시간까지 더 열려 있는 경우도 많다.

#9. 역할
밤하늘이 숨막힐 때가 있다. 얼마나 광활하면 도시의 모든 휘황찬란함을 다 받아내고도 어두운가. 어둠에 짓눌려 있노라면 별빛이 쏟아진다. 저들은 얼마나 밝기에 이 어둠을 뚫고 내게 비추는가.

권 교수는 밝은 거실에서 불 꺼진 안방에 있는 아내를 보고 있다. 방안은 어두웠다. 그 안에서 아내의 두 눈만 반짝인다. 반짝임이 날카롭다. 숨이 막혔다.
“지금 몇 시냐고!
권 교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애 깨겠어.
“허이구. 언제부터 그렇게 애들을 끔찍이 챙기셨디야. 그런 분이 이 시간에 들어오셔? ?
“내가 오늘 늦는다고 말했잖아. 논문 제출 있다고.
“그놈의 논문 제출은 1년에 300번쯤은 있나 보지?
애들은 친정에 맡겨놓은 것 같았다. 자신 있게 큰 소리 내는 걸 보면. 아예 작정하고 싸우겠다는 건가. 저녁도 거른 권 교수는 현기증마저 나려 했다.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권 교수와 아내는 미국 유학 중에 만났다. 박사과정 동기였다. 논문에 대한 걱정을 나누며 친해졌다. 논문 쓰는 서로를 챙겨주다 관계가 발전했다. 그러다 결혼했다. 아내가 대학원에 안 다녀본 사람이라면, 작금의 상황은 남편의 책임이다. 15년 동안 이해시키지 못한 거니까. 하지만 아내도 같은 분야 박사다. 권 교수는 아내가 날이 갈수록 ‘여자’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순간 끔찍한 정적이 돌았다. 어둠보다 무거운. 진공보다 고요한.
“알긴 뭘 알아? 나 다 까먹었어. 논문 제출이 뭔지, 논문이 뭔지도 하나도 생각 안 나. ? 박사씩이나 되는 아내가 이해를 못 해주니까 서운해?
아차, 싶었다. 권 교수는 장기전을 준비했다. 적어도 오늘은 소파에서 자야할 것 같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같은 해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나란히 근처 회사로 취직을 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다 남편이 꿈꾸는 대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교수는 남편의 꿈이었다. 아내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같이 들어왔다. 교수로 부임하면 굉장히 바쁘다. 그러니 자신이 한 달 정도 쉬면서 자리를 잘 잡아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 연구소 자리를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생겨버렸다. 입사하자마자 출산휴가부터 써야하는 사람을 누가 받아주겠는가? 게다가 입덧이 심해 면접 보는 것조차 무리였다. 입덧이 잦아들 때쯤부터는 짬짬이 논문을 봤다. 연구 동향이라도 파악해두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2년이 날아갔다. 취직은커녕 논문도 못 봤다. 아이 곁을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남편에게 뭘 바랄 수도 없었다. 주말에도 같이 저녁 먹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아이가 예뻐서 좋았다.

드디어 아이가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3년이나 쉰 사람을 어느 연구소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3년이면 강산이 바뀐다. 녹슨 지식만 가진 사람을 누가 뽑겠는가. ‘여성 과학자 우대전형’에도 지원해 보았다. 갓 박사를 받은, 아이는커녕 결혼도 먼 젊은 여자들만 뽑혔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년쯤 하니 다시 감을 찾았다. 하지만 ‘4년이나 쉰 사람’이 됐을 뿐이었다. 흔히 보수와 진보의 정치 싸움 환경을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한다. 남자와 여자의 직업 싸움은 평평한 곳에서 한다. 때론 여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여주기도 한다. 다만 골대가 한쪽에만 있을 뿐이다. 남자와 똑같이 일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집에만 있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닥치는 대로 취직을 했다. 연구소이긴 했다. 사무직일 뿐. 해외파 박사는 사라졌다. 청춘이 지워졌다. 40대 워킹맘만 남았다.


그러니 아내가 남편 말에 열 뻗칠 만도 하다. 남편도 그 부분은 이해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평소엔 안 그랬기 때문이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건 늘상 있는 일, 그때마다 고생했다며 토닥여주던 아내다. 그런 배려 때문에 남편은 더 미안했다. 아빠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도 미안했다.

사실 그래서다. 한겨레 대학교로 옮기기로 한 것이. 아내에게도 더 잘해주고 싶고 아이에게도 더 좋은 아빠가 되어주고 싶어서다. 꿈꾸는 대학교에 있는 동안은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그래서 실적 압박도 적고 수업 시수도 적은 한겨레 대학교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다. 이번에 무리해서라도 논문을 내려고 한 것이. 권 교수만 바라보던 학생들이다. 떠나기 전에 논문 실적이라도 꼭 하나 만들고 주고 싶었다. 그래야 어딜 가더라도 내보일 게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올해까지만 좀 참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내팽개치는 건 아내도 싫어할 것 아닌가. 그러니 이 모든 게 아내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권 교수는 짜증이 났다.
“당신, 아직도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는 거야?
드디어 나왔다. 끝판왕. 그걸 알았으면 지금 컴퓨터 연구를 하고 있겠는가. 이미 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일 텐데. 젊었을 땐 끝판왕을 깨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끝판왕을 깨고 나니 다시 1판으로 돌아가더라.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게임이 끝나는 편이 빨랐다.

열 받아 차오른 숨을 일거에 뱉었다. . 그래, 또 저러다 말겠지. 늦어도 내일 오후엔 아이를 데려올 것이고, 월드컵 앞의 대한민국처럼 하나가 될 것이다.

어쨌거나 남편이 답할 차례였다. 하지만 도무지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 보너스판의 시작이다.

저녁을 거른 남편은 배가 고팠다. 너무 고팠다. 그렇다고 우는 아내를 두고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엄마 생각이 났다. 매섭게 싸우다가도 밥 때 되면 밥상은 차려놓고 들어가 버리시곤 했는데. 결혼 15년차.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방을 돌아봤다.

이상하다. 식탁 위에 뭐가 많다. 그릇도 많고 전기 그릴도 올라와 있다. 애가 친정에 간 게 아니라 방에 있나? 심지어 초도 있다. 저건 케이크인가? 남편이 주방으로 향한 건 척수반사였다.

세 발자국 쯤 뗐을까? 한 줄기 강풍이 느껴졌다. 아내였다. 순식간에 식탁으로 왔다. 그리고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음식이 담긴 채였다.
“왜 그래!
 남편은 아내를 붙잡았다. 아내는 기어이 음식을 싱크대로 부었다. 파스타 면발이 개수대에 처박혔다. 그릇을 버려두고 다시 식탁으로 가려 했다.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더 세게 붙들었다.
 “왜 그래!
 “놔! 이거 놔!
 “말로 좀 해! 말로! 왜 그러는 거냐니까!
 “당신은 이거 먹을 자격 없어! 다 버릴 거야!
 “알았어. 안 먹으면 될 거 아냐.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아내는 단전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정말, 모르는구나. , 리가, 없구나. 청춘을 지워버린 아내. 이제 중년을 지워버릴 차례일까. 아내는 든 것 없는 이불처럼 내려앉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남편의 시냅스 하나에 자극이 들어왔다. 논문 마감일이 며칠이었더라? 8 3일이었지? 그런데 우리나라로 치면 8 4일이었던 것이고. 그런데 결혼기념일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어?
아내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X 됐다. 남편은 서른 살 이후로 한 번도 안 썼던 표현이 떠올랐다. 그제야 식탁 위의 케이크가 보였다. Anniversary’라고 쓰여 있는 장식이 보였다.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스타와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보쌈이 혼재하는 상차림도 보였다. 빌어야 한다. 빌어야 한다.


신혼 첫날밤, 남편은 약속했다. 결혼기념일은 자기가 근사한 요리를 차려주기로. 거창한 것 약속하면 못 지킬까봐 그런다며,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했다. 물론 ‘근사한’까지는 못 지킨 적도 많다. 중국집 탕수육이 메인 요리인 적도 있다. 하지만, 지난 14년간 빼먹은 적은 없었다. 밥 먹고 다시 야근을 하러 갈지언정, 꼭 꽃 한 송이와 요리 재료를 사들고 집에 들렀다.

하지만 오늘은 권 교수의 논문 마감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아내가 직접 ‘근사한’ 요리를 차려놓은 것이다. 요리하는 시간까지 논문에 투자하라는 의미다. 사들고 온 재료는 내일 요리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남편을 응원하고 싶었다.

죄인은 내려앉은 아내 옆으로 무릎을 꿇었다. 어깨를 감쌌다. 나오는 대로 빌었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 내가 논문 마감 때문에…. 그래서 오늘을 8 3일인 걸로만 생각했어. 알잖아, 논문마감 시간이 우리나라 시간대가 아닌 거. 결혼기념일이 8 4일인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근데 내가 다른 나라 시간대로 살고 있었다니까. 정말, 미안해. 미안해.
그렇다고 너무 ‘미안해’만 반복해도 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자들이 이것에 대해 써놓은 논문은 없을까? 국문학 논문을 찾아봐야 하나?
“엄마는 왜 지금 애를 보고 있는 건데! 엄마한텐 뭐라고 말하냐고! 이게 다 뭐야! 뭐냐고!
아내는 결혼기념일의 오붓한 저녁을 위해 아이까지 친정에 맡겨놓은 것이다. 남편은 후회했다. 아내가 화를 내면 그냥 빌기나 할 걸. 당연히 화날 짓을 했으니 화를 냈겠지. 아까 큰소리는 왜 쳤을까? 남편은 신혼 첫날밤의 약속마저 후회할 뻔했다.
“여보, 내가 어떡하면 용서해줄래? 지금 우리 드라이브라도 갈까? 자기 강변 드라이브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면, 심야영화라도 보러 갈래? 그 뭐야, 당신 좋아하는 류승범이 영화 안 나왔어? , 케이크도 정말 예쁜 거 샀네. 이거 촛불 붙이자. ? 간만에 내가 노래도 불러줄까? 프러포즈 때 불러준 노래 있잖아.
“필요 없어!
아내는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 문 닫는 소리에 이어, 잠그는 소리도 났다.

남편은 급히 접시에 보쌈 몇 조각을 담았다. 그리고 문 앞으로 갔다. 급히 입에 넣고 소리 내어 먹으며 말했다.
“여보, 이 보쌈 당신이 만들었어? 이야, 진짜 기가 막힌데. 당신 보쌈은 역시 최고야! 여보, 그냥 회사 그만 두고 보쌈집이나 차리자. 완전 대박 날 거 같아! 나도 교수 그만두지 뭐. 우리 같이 보쌈집 하면서 꼭 붙어서 살자, ?
“조용해!!!! 조용하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창이 떨렸다. 남편은 모를 것이다. 청춘 시절을 포기하고 잡은 직장을 그만두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청춘시절과 맞바꾼 남편의 교수자리를 그만두겠다는 건 또 어떤 느낌인지.

아내가 계속 운다. 남편은 자신을 잘못을 재보았다. 첫째, 결혼기념일을 잊고 늦게 들어온 것. 둘째, 잘못을 빨리 못 깨닫고 큰 소리 몇 번 친 것. 셋째, 그게 하필 자신을 배려해서 아내가 근사한 저녁을 차린 날인 것. 조금 전에 날린 독설은 당연히 목록에 없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엔 대처법을 생각했다. 첫째, 일단 시간이 필요하다. 아내의 감정이 정리되기까지. 둘째, 내일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휴전 상태는 될 것이다. 가끔 국지전은 벌어지더라도. 셋째, 빽 사준 지가 오래된 것 같으니 빽을 하나 사주자. 이번만큼은 잔소리를 꾹 참고 비싼 걸로.

남편 배가 소리를 낸다. 진공을 못 견뎌 공기라도 꿀꺽이는 것이다. 남편은 밥이나 먹기로 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조용하라고도 했으니까. 이왕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거, 잘 먹기나 하면 점수를 좀 만회할까도 싶었다.

들고 있던 보쌈 접시를 마저 비웠다. 오늘 내놓은 김치는 장모님 손맛이다. 사큼하고[1] 아삭한 게 보쌈에 딱이다. 파스타도 먹어보았다. 원래 느끼한 음식을 싫어하는데 이번 파스타는 괜찮다. 어떻게 만든 걸까? 금세 비웠다. 떡갈비도 있다. 한 입 베어 물자 양념 밴 육즙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젤리보다 부드럽고 아이스크림보다 달콤하다. 다 식은 떡갈비가 이렇게 맛있다니. 혼자 먹는 밥상이 아니었다. 음식과 내가 하나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배가 부르고 나니 그제야 씻고 싶어졌다. 옷은 죄다 안방에 있다. 속옷 갈아입기를 포기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화장실 앞에 속옷과 잠옷이 던져져 있다. 아내가 꺼내줬나 보다. 조용히 갈아입었다. 식탁을 대충 정리했다. 소파로 가서 누웠다. 텔레비전을 틀까 하다가 눈치가 보여 말았다.

‘아, , 인생 한 번 빡세다. 교수자리 한 번 옮기기도 참 빡세다. 그래도 오늘 논문을 하나만 내서 망정이지, 정원이 논문까지 냈으면 얼마나 더 정신이 없었을까. 정원이도 빨리 논문 만들어서 졸업시켜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보영인 또 어떻게 졸업시켜야 할지. 그나저나 아내는 정말 어떡하지. 오래갈 것 같은데…. 장모님 얼굴은 또 어떻게 봐야 하나.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저 사람 커리어 끊겨서 나 싫어하시는데. 그나저나 이번 주말엔 애하고도 시간을 좀 보내야 할 텐데. 맞다, 근데 수업 계획서가 오늘까지였나? . 주말 되기 전에 다 끝낼 수 있을까?


 교수는 수업계획서 제출 일정을 보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새로 온 메일이 쌓여 있다. 교수회의 공지가 와 있다. 교과과정 개편 같은 쓸데없는 공지도 여러 개 와 있다. 한 학부생이 가을 학기에 졸업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한다. 한 학생은 다음 학기에 열릴 수업에 대해 문의했다. 정길이가 실험 결과라며 엑셀 파일을 보내왔다. 국현이는 연구실 엠티를 가겠다며 허락을 구한다. 한겨레 대학교에서 서류를 몇 개 보내달라고 한다. 한숨이 나왔다. 내일도 한동안 메일 답장이나 하고 있어야겠다.

문득 한 메일 제목이 크게 다가왔다. 심사위원을 맡은 학회에서 온 것이다. 논문 리뷰를 제출해 달라는 것이다. 나흘 남았단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정확히 주말까지다. 아빠 노릇은 개뿔, 논문 리뷰에 주말을 바쳐야겠다.

정말, 다들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것 같다. 권 교수는 피곤마저 가셨다. 잠이 오지 않았다.

[1] 사큼하다: 상큼보단 날카롭고 새큼보단 부드러운 맛을 뜻합니다. 제가 생각해낸 말이에요. 사전에 없어요.


#10.

늪에 빠졌을 땐 빠져나오려 애쓰면 안 된다. 허우적대면 안 된다. 그러면 더 깊이 빨려 들어간다.[1] 그래서다. 정원이 슬럼프에 빠져 가만히 있는 것이. 이젠 슬럼프가 익숙하다. 지난주까지 했던 논문 작업이 아련하다.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정원도 슬럼프를 극복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한 번은 큰 목표라도 하루 단위로 생각하고 계획해야 좋다는 말을 들었다.[2] 그래서 일 단위로 계획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불가능했다. 아이디어가 있어야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좀 이상했다. 어쩌다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마찬가지였다. 뭐부터 시작할지가 막막했다. 어떻게든 시작하고 보면 금세 말이 안 되는 아이디어인 게 드러났다. 접어야 했다. 제아무리 교수님이 준 아이디어라도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소요 시간을 예상하는 건 늘 틀렸다. 일 단위 계획을 세우긴 개뿔, 매일 계획만 세워야 했다.

늦잠을 탈피하고 출근을 일찍 해보려 한 적도 있다. 어머니께선 늘 말씀하셨다. “아침을 챙겨 먹어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것도 실험적으로 입증해보려 했다. 일찍부터 일하면 시간 박치기라도 될 것 같았다. 해보니,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기분이 좋았다. 아침 햇살은 기똥찼다. 그리고 뿌듯했다. 하지만 결정적 단점이 있었다.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제 보고서 때문에 단 한 번 늦게 잤을 뿐인데, 한동안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간간이 있는 회식도 같은 효과를 냈다. ‘질량 보존의 법칙’보다 무섭다는 ‘기상 시간 보존의 법칙’이었다. 슬럼프에 절망감이 더해졌다. 그럴 때면 누군가가 얘기해줬다. “자기 생체리듬에 맞춰서 해야 능률이 오르지.” 그 오른 능률이 문제인 게 함정이지만.

집중력을 높이고자 노력한 적도 많다. 문제는 게임과 예능이라 생각했다. 몇 분만 기다리면 실험 결과가 나올 때, 그 몇 분을 한 시간으로 늘려주는 게 게임과 예능이었다. 적어도 연구실에서는 끊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다른 딴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연예계 소식에 박식해졌다. 맛집 정보를 줄줄 읊었다. 이게 뭔 짓인가 싶었다. 차라리 적당한 게임 하나 골라 성실하게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연구 잘하는 친구들도 게임 한 두 가지는 하니까.

이벤트 풍선 바람이 빠지면 손님도 빠져버리는 빙수가게처럼, 정원도 자꾸 제 궤도로 돌아갔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싶었다.


준상도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실 그도 마이크로(MICRO)에 논문을 내고 싶었다. 구현도 다 끝났고 실험도 어느 정도 해놨던 터였다. 교수님께도 말씀도 드렸다. 하지만 마감 3주 전, 교수님께서 선택하신 건 길영과 정원이었다. 자신에겐 아무 말씀 없으셨다.

물론 그 둘이 급하긴 하다. 길영은 내년이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지금 연구하는 주제를 이어서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논문 쓰는 걸 더 늦출 수 없다. 그리고 정원은 아직 프로포잘[3]못한 박사 4년차다. 더 신경 써주시는 게 맞다. 하지만 논문을 꼭 두 개만 내란 법도 없지 않은가. 가능성으로 치자면 자신의 것을 내는 게 맞는데.

그 와중에 교수님의 메일이 왔다. 한국연구재단 과제 보고서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원식이 형과 주성이가 하던 연구와 관련 있는 과제다. 원식이 형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주성인 연구실을 옮겼으니 다른 학생에게 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인가. 졸업이 덜 급한 3년차들도 있는데. 게다가,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올해 졸업시킬 생각은 있으신 건지….

하라니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하기 싫었다. 잘 아는 분야도 아니다. 새로 공부해서 써야 한다. 잘못하면 실험도 몇 가지 해야 할지 모른다. ‘뭘 도와주냐. 내가 다 쓰면 제목이나 몇 개 고쳐서 낼 거면서.’ 볼멘소리가 혀끝까지 차올랐다.

준상은 옆을 쳐다봤다. 길영에게 떠넘길 건 없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웬걸, 길영이 예능을 보고 있다. 길영은 예능도 계획 세워두고 봤다. 일과시간엔 절대 보지 않았다.
강준상(4): 이야, 니가 웬일이야. 이 시간에 예능을 다 보고.
전길영(2): 공부하기 싫어서요.
강준상(4):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길영(2): 그런 건 아니에요.
강준상(4): 그래, 논문 쓰느라 고생했는데. 좀 쉬기도 해야지.
준상은 잠시, 쓰지도 못한 자신의 논문을 생각했다.


논문 제출 뒤 이틀 동안, 길영은 잠만 잤다. 배고픔에 깨서 밥을 먹고 오면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배고플 때까지 잤다. 평소 15분이 넘는 낮잠은 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끊어진 고무줄이었다. 논문 쓴다고 너무 당겨댄 탓이다.

이틀이 지나니 겨우 깨어 있을 수 있었다. 논문을 쓰자는 메일을 받은 지 23일째였다. 23일치 계획이 미뤄져 있었다. 명절에도 영어단어장과 하루에 한 개씩 읽을 논문은 챙겨가던 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밀린 계획만 따라잡을 수도 없다. 전 여친 편지 버리듯 싹 포기하고 새로 시작할까 싶었다. 바로 그 때, 2주 남은 박사 입시 면접이 떠올랐다.

‘아… 제기랄.’ 이건 계획도 아직 안 세워둔 것이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공부할 게 엄청났다. 대학원 전공필수 과목들은 한 번씩 훑어봐야 할 테니까. 준상과 함께 썼던 논문들도 기억을 되살려 놔야 한다. 영어로 자기소개를 시킬지도 모른다. 스크립트 정도는 써 놓아야 한다.

불안함보다 막막함이 더 컸다. 3주만 무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려 했는데, 다시 2주를 무리해야 하는 것도 짜증난다. 그래서다. 온갖 밀린 계획들 중에 예능부터 챙기고 있는 것이.

그렇다면 보영인 어쩌고 있을까? 평소와 같았다. 슬럼프는, 내려온다는 것은,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본 사람들의 전유물이니까.


지잉!
한 방에 있는 준상과 길영과 정길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단체 메일이다.

올해도 연구실 엠티를 갑니다. 교수님께 물어봤는데 바빠서 참석을 못 하시겠다고 하시네요. 우리끼리 편한 시기에 가라고 하십니다. 아래 후보 날짜 중에 가능한 날짜를 모두 표시해주세요.
- 김국현 드림

그리고 잠시 뒤, 정원, 국현, 보영이 준상의 방으로 함께 들어왔다.
김정원(4): 어차피 우리 6명밖에 안 되는데, 단체 메일로 얘기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다 있는데, 지금 정하자.
강준상(4): 근데 정말 교수님 빼놓고 가도 괜찮은 거야?
김국현(3): 본인이 안 가시겠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순 없잖아요.
강준상(4): 매번 같이 가셨잖아. 우리가 일정을 좀 맞춰드리면 되지 않을까?
김국현(3): 제가 이미 말씀드렸어요.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되시는 날짜만 말해달라고요. 근데 그냥 일이 많아서 안 되겠다고만 하시는 게, 뭔가 딱 자르는 느낌이었어요.
강준상(4): 그래도 어떻게 빼놓고 가. 내가 한 번 더 말씀드려볼게.
김정원(3): 근데, 이 상황에 교수님이 우리랑 엠티를 가고 싶을까? 나 같아도 민망해서 못 갈 것 같은데.
권대성 교수의 생각도 그랬다. 학교 옮기는 건 개인 사정으로 인한 거긴 하다. 하지만 학생들을 버리는 모양새인 걸 부정할 순 없다. 연구야 일이니까 계속 함께해야 하겠지만, 엠티까지는 좀 민망했다.
강준상(4): 아니, 그럼 엠티를 아예 안 가야 되는 거 아냐?
심정길(3): , 그냥 좀 가면 안 돼? 요즘 연구도 잘 안 되는데.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야. 올해 너 나갈 거고, 길영이랑 보영이도 졸업하면, 내년엔 뭐야, 세 명 남네.
준상은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슬픈 소식 밑에 달린 ‘좋아요’를 바라보는 듯한 상태였다.
전보영(2): 근데…, 원식 오빠는요?
슬픈 소식이 하나 더 올라왔다. 젠장. 이럴 때를 대비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메뉴가 있는 건가.
심정길(3): , 맞다. 원식이 형. 아 몰라. 휴학하고 연락도 안 받는 사람을 뭘 어떡해.
김국현(3): 아까 그거, 단체 메일이니까 원식이 형에게도 갔어. 오고 싶으면 연락을 하겠지 뭐.
김정원(4): (잠시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 날짜랑 장소 정한 거, 단체 메일로 다시 보내놓자. 혹시 원하면 오실 수 있게. 그럼 됐지? (보영이를 바라본다.)
전보영(2): 네….
보영이라고 어쩔 건가. 연락해도 답도 없는 사람에게.
김정원(4): , 그럼 드디어 날짜를 정해 봅시다!
강준상(4): 교수님도 같이 안 가시는데, 주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 , 범생이. 교수님 엄청 신경 쓰네. 아까만 해도 섭섭해 했으면서.
심정길(3): 난 주말은 안 돼.
김국현(3): 왜요?
심정길(3): 나 요즘 교회 다니거든.
전길영(2): 아 진짜요? 어느 교회요?
심정길(3): 학교 옆에 빛과 소금 교회라고….
김국현(3): 거기 그 건물 큰 데요? 거기 지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치읓에 점이 잘 안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빚과 소금 교회로 보이던데. 교회에 빚만 엄청 많아서 소금처럼 짜게 돈 쓰는 거 같고 막, 크큭.
전길영(2): 왜 그래요, 정길이 형이 다닌다는데.
김국현(3): 에이, 왜 그래. 웃자고 한 소리지. 근데 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전도하는 거 진짜 싫더라. 그걸 왜 강요하는 거예요?
정길은 고민했다. 그는 이제 교회 경력 4주차다.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강준상(4): 너도 아이폰이 안드로이드보다 좋다고 맨날 아이폰 사라고 하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지.[4]
김국현(3): 헐… 아… 저 방금 진짜 깨달음 왔어요. 전도하는 거 이해해줘야겠다.

모두 한바탕 웃었다. 정길도 깨달음을 얻었다.
심정길(3): 근데 국현이 너, 곧 훈련소 가지 않냐? [5]
김국현(3): , 2주 뒤면 가요.
심정길(3): 훈련소 가면 종교 활동 가잖아. 거기서 교회 한 번 가봐.
김국현(3): 이해해준다고 벌써 전도 들어오는 거예요?
강준상(4): 근데, 정말 교회로 가봐. 교회 가야 여자구경 한다.
심정길(3): 내가 백마부대 나왔는데, 거기 훈련소 교회 별칭이 ‘백마나이트’였어. 여자들이 나와서 춤추거든.
김국현(3): 오케이. 이런 전도, 인정할 게요.
전길영(2): , 근데 전 2주 뒤에 박사 면접 보러 가야 해서요…. 그 후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국현(3): 박사 면접? 그거 면접장에서 똥만 안 싸면 합격이야.
김정원(4): 내가 면접 볼 때도, 그냥 석사 논문 뭐 쓰는지만 대충 물어보고 넘어갔어. 너 성적도 좋잖아? 성적 나빠 봐야 한소리 듣고 불안해 하다가 합격하느냐, 기분 좋게 합격하느냐, 그 정도 차이지만.
전길영(2): 근데…. 저는 다른 연구실로 가야 하는 거라서요….
일동 묵념. 자꾸 안 좋은 소식만 올라오는 게, 페이스북이 아니라 신문인가 보다.
김국현(3): 그래도 여기서 석사한 건데, 성적만 좋으면 면접 때 별 말 없을 거야. 가서 모르는 거 있으면 교수님이 잘 못 가르쳐줘서 그렇다고 해버려.
심정길(3): 내가 여기 박사부터 시작했잖아. 나도 입시 엄청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안 물어보더라고. 그보단 진학할 연구실에 미리 얘기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
강준상(4): 맞아, 연구실 안 정해져 있으면 아무리 좋아도 떨어뜨린다던데. 연구실 컨택은 해놨어?
전길영(2): , 동기 중에 박사 안 가는 애가 있어서, 그쪽 교수님께 말씀은 드렸거든요.
김정원(4): 그럼 됐지 뭐.
전보영(2): , 얘기 해놓아야 되는 거예요?
김정원(4): 너도 박사 가려고?
전보영(2): , 그러려고 했는데….
김정원(4): , 진짜?
전보영(2): 저 박사 가면 안돼요?
김정원(4): , 아니.
평소 박사과정 진학만 한다고 하면 뜯어말려왔던 정원이다. “박사 가지 말라고 백 번쯤 말해줄 테니 그래도 갈 거면 가라”는 게 정원의 주된 레퍼토리다.[6] 하지만, 보영에게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7]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영이는 아직 연구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자신과 했던 두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대체 무슨 매력을 느껴서 박사까지 간다는 걸까. 정말 잘 모르고 가는 건 아닐까?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그래도 말을 꺼내진 않았다. 술이라도 들어가면 모를까,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심정길(3): 근데 우리 왜 엠티 얘기를 이제야 하는 거냐? 더 일찍 안 가고.
김국현(3): 길영이랑 정원이 형이 마이크로(MICRO) 논문 썼잖아요.
김정원(4): 정확히 얘기하자. 난 쓰진 않았어.
정원은 우울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꺼내곤 한다. 맷집이라도 키우려는 건지.
김국현(3): 근데 정말 어떡하죠? 보영이 너 아직 연구실 안 알아본 거지?
전보영(2): .
김국현(3): 그럼 면접 준비 좀 해야 할 텐데….
전보영(2): 전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김정원(4): 그래도 한 명 뿐인 여학생을 어떻게 놓고 가냐?
전보영(2): 저 가면 괜히 숙박비만 더 들잖아요.
그렇긴 하다. 남자 6명이면 큰 방 하나면 뒹굴기 충분하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이 여자면 방을 2개 잡아야 한다.
김정원(4): 에이, 그건 오빠들이 다 엔(N)[8]해줄게. (다들 남학생들을 둘러보며) 그치?
한 명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국현(3): 그럼 지금, 절 버리든지 보영이를 버리든지 해야 하는 거예요?
전길영(2): 저랑 보영이를 버리는 거죠. 저도 박사 면접 본다니까요.
김국현(3): 넌 얘기 끝났다면서, 진짜 괜찮다니까. 설사 안 하게 식이섬유나 많이 먹어.
강준상(4): 그래, 걱정 안 해도 돼.
길영이는 이미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는 삶에 짜증나 있다. 이렇게 또 바뀌어 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준상마저 저리 말하는 걸 보니 면접 걱정은 덜 해도 되나 보다 싶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
전보영(2): 저…, 그냥 다음 주쯤 엠티 가는 걸로 해요.
김정원(4): 숙박비는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
전보영(2): 아뇨, 저도 갈게요.
김정원(4): 진짜?
전보영(2): 컨택하는 게 더 중요하다면서요. 지금부터 연구실을 더 알아볼게요. 그리고, , 박사는 한겨레 대학교로 갈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김정원(4): 교수님 따라서?
전보영(2): .
심정길(3): 보영아, 그건 잘 생각해봐라. 한겨레 대학교 박사 따는 게 별 이득이 안 될 수도 있어. 어차피 4~5년 이상은 걸릴 텐데, 알잖아, 우리 학교 정도가 아니면 국내 박사들 별 대접 못 받는 거. 우리 학교 다른 교수님들부터 잘 알아봐봐.
김정원(4): 그래, 정길이 형 말이 맞아. 일단 컨택을 열심히 해봐.
전보영(2): 컨택은 해볼게요. 어쨌든 엠티는 다음 주에 가는 걸로 해요.

이제 와서 국현이 훈련소에 가는 일정을 바꾸긴 힘들다. 훈련소에서 나오면 이미 개강 후다. 학기 중에 엠티를 갈 수도 없다. 처음부터 길영과 보영이 희생해야 하는 문제였다.

정원은, 여전히 보영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보영과 친한 자신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김정원(4): 그러면, 다음 주에 가는 걸로 하자. 그래도 박사 면접 코앞에 앞두고 가긴 그러니까, , 목 정도로 가면 좋지 않을까?
심정길(3): 난 괜찮은데.
강준상(4): 나도 괜찮아.
길영은 여전히 불만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보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국현(3): 당장 다음 주 수요일이면, 좀 급박하긴 한데…. 숙소가 약간 비싸도 이해해주세요.
김정원(4): 그래, 우리끼리 가는데 서로서로 이해해야지 뭐.
김국현(3): , 그럼 밥은 뭘 먹죠?
김정원(4): 점심은 가는 길에 사먹고, 저녁은 고기 굽고, 아침엔 라면 먹고 그러면 되는 거 아냐?
강준상(4): 그래, 오후엔 물놀이하는 거고. 밤엔 술 마시겠지 뭐. 안주나 충분히 싸가고.
김정원(4): 벌써 다 나왔네. 아무 데나 바닷가로 숙소만 알아봐.
늪에 빠졌을 땐 빠져나오려 애쓰면 안 된다. 하늘을 봐야 한다. 늪에 자신을 맡기고 드러누워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배영을 하듯 자신을 밀어내면 된다. 늪 밖으로.[1] 이들의 엠티가 하늘을 보는 과정이 될 수 있을까? 

[1] 2013 8 16일에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 182회에서 김호중 교수는 늪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펄도 마찬가지로 계속 우리가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깊숙이 들어가고, 장화 자체가 아예 그냥 고정돼 있고 맨발만 나오는 경우를 보셨을 것 같아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딱 한 가지가 있죠, 바로 드러눕는 거죠. 드러누워서 배영을 하듯이 발을 앞으로 차고 나오는, 그런 상황으로 해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아직은 유일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Lewis, Neil A., and Daphna Oyserman. When does the future begin? Time metrics matter, connecting present and future selves. Psychological science (2015): 0956797615572231. 다음 인터넷 기사에서 핵심 내용을 다룹니다. 유하늘, “미루는 습관을 버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 한국경제 2015 5 14 
[3] 프로포잘(Proposal):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보통 다섯 명의 박사(주로 대학 교수들)에게 구두 발표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심사를 받기 전에(몇 개월에서 2~3년 전) 같은 심사위원들에게 박사학위 내용에 대해 예비 심사(역시 구두 발표로 진행됨)를 받으면서 조언도 듣게 되는데 이것을 프로포잘이라고 한다.
[4] 이 비유는 연구실 선배인 ‘김환주’ 형의 것을 빌린 것이다. 컴퓨터 분야 대학원생에게 ‘종교’ 같은 것은 이것 말고도 많다. 리눅스 유저들은 ‘우분투’, ‘센트오에스(Cent OS)’ 등의 어떤 버전이 더 좋으냐를 두고 논쟁하기도 한다. 텍스트편집기를 놓고도 ‘vim, emacs, nano’ 등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전도하려고도 한다. 프로그래밍언어 분야가 제일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종교다”라는 격언은 유명하다. 결국엔 모두 0, 1, 0, 1일진대….
[5] 박사학위 과정 동안에 연구하는 것으로 병역 의무를 대체하는 ‘전문연구요원’ 제도라는 것이 있다. ‘산업기능요원’으로서 병역특례업체에서 근무하는 것과 비슷한데, 근무지가 학교라고 보면 된다. ‘산업기능요원’과 마찬가지로 병영생활은 하지 않지만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은 받는다. 이를 간단히 ‘훈련소 간다.’라고 표현한다.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II (3) 독기  http://scienceon.hani.co.kr/249663
[7]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II (4) 여자  http://scienceon.hani.co.kr/253126
[8] (N): x가 ‘미지수’의 의미로 많이 쓰이듯, n은 ‘정해진 어떤 숫자’를 나타낸다. 아마도 ‘number’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이 n명일 때 n명이 돈을 똑같이 나누어 내는 것을 엔(N)빵이라고 부르는 건 알겠는데 왜 ‘빵’이 붙는 건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아는 분 계시면 알려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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