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2일 수요일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시즌2 1~5화)/김창대


#1. 멘탈파쇄

“내가 한겨레 대학교로 옮기게 됐다.
교수가 오랜만에 학생들을 불러모아놓고 던진 말이다. 학생들은 알아듣질 못했다. 음파가 고막과 달팽이관을 거쳐 측두엽[1]까지 안전하게 도달했지만 측두엽은 에러만 내뿜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달린 건물 들어갔는데 목탁 소리 들리는 판국이다.
“너희들에겐 별로 변할 게 없을 거야. 너희들은 졸업할 때까지 지도할 거다. 몇몇 교수님께 말씀드려 놓았으니, 서류상 지도교수만 그 쪽으로 옮겨두면 돼. 물론 나를 따라 한겨레 대학교로 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학교랑 얘기해뒀어. 몇몇 수업은 다시 들어야 할 수도 있지만. 물론 원한다면 다른 교수님 학생으로 옮겨가도 좋다.
드디어 해석에 성공했다. 지도교수가 학교를 옮긴다는 것. 청소노동자로 치자면 소속 용역업체가 자신의 일터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 <미생>으로 치자면 오상식 차장이 회사를 옮기는 것. 무한도전으로 치자면 유재석이 하차한다는 것.

멘탈파쇄가 일어난다. 바람이 분다. 가루 멘탈들이 온 세상으로 날라다닌다. 닿는 사람마다 매달린다. 꽃에도 앉아본다. 티끌만큼의 평안을 위해서. 사자 코털 끝에도 내려 않는다. 담력을 위해서일까. 어서 날 잡아먹으라는 걸까.
“가을학기까지는 여기에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준상이나, 길영이, 또 누구 있지? , 보영이는 그냥 하던 대로 졸업 준비 하면 돼. 원식이랑 정원이도 가능하면 올해 말에 졸업할 수 있을 거고. 다른 사람들은 여기 남든, 다른 교수님께로 가든, 한겨레 대학교로 옮기든, 선택해서 알려주면 그대로 해주도록 할게. 다른 질문?
지은 죄도 없건만 다들 묵비권을 행사한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없어? 질문이 생기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하도록 해. 그럼.
교수님이 세미나실을 빠져나간다. 도어클로저가 문을 천천히 닫는다. 문 바닥에 붙은 고무가 바닥에 끌린다. 스스슥. 문이 문틀과의 도킹에 성공한다. . 세계와 단절된다. 교수님과도 단절된다. 흩날렸던 멘탈도 조금씩 돌아온다.

박원식, 김정원, 강준상, 김국현, 심정길, 하주성, 전길영, 전보영, 서연정, 이한길 (이상 연차 순), 모두가 아무도 없는 앞만 바라본다. 헛기침도 함부로 못할 정적이다.

정길이 정적을 깬다.
심정길(3): 얼마 전에 권선필 교수님이 갑자기 너네 교수님 요즘 어떠냐고 물어보시던데, 이것 때문인 건가? 아씨.
강준상(4): 그럼, 우리 교수님 테뉴어[2] 떨어진 거야?
김국현(3): 그런가 보죠.
전보영(2):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주성(1): 말 못 들었어? 넌 그냥 이번 학기에 졸업하면 되고, X된 거지.
김정원(4): 왜 그래, 우리끼리 그러지 말자.
하주성(1): 아 진짜 빡치네. 우린 어쩌라고 지금.
김정원(4): 어쨌든 끝까지 지도해주신다잖아.
하주성(1): 당장 학교 옮기면, 솔직히 그게 되겠냐고요.
갑자기 원식이 일어났다. “아이씨” 욕인지 감탄산지 모를 외마디를 내뱉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기관지가 아니라 동맥을 타고 흘러나온 듯한 소리였다. 문을 워낙 거칠게 열어버려서, 도어클로저가 문을 닫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전보영(2): 누가 좀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주성(1): 교수님이 졸업시켜 준다는 데 왜 저러는 거예요?
심정길(3): , 모르면 조용해. 저 형, 석사 때도 교수님이 다른 학교로 옮겨서 박사를 우리 교수님한테 온 거잖아.
전보영(2): 정말요? 난 몰랐는데.
심정길(3): 나한테도 딱 한 번 얘기했어.
그렇다. 원식은 견딜 수 없었다. ‘왜 나에게. 두 번이나. 액땜이 부족했단 말인가. 박사 따위 때려치우고 신내림이라도 받아야 하는 운명인 건가. 이미 박사만 7년째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했단 말인가. 매년 5,000명 넘게 박사를 받아 가는데,[3] 그 중에 한 명이 되고 싶다는 게 그렇게도 큰 욕심이란 말인가.

그 자리의 누구도 모른다. 지도교수가 학교를 옮기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람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독서를 통한 대리경험 따위, 대리기사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면 운전 실력이 늘더냐.

그 때, 원석은 석사 2년차였다. 이제 막 석사 졸업 준비에 열을 올리려 할 때, 지도교수가 학교를 옮겼다. 그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끝까지 지도할 거라고.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시겠다던 교수님은 한 주씩 빼먹기 시작했다. 간단한 질문도 메일로 보내면 이틀쯤 지나야 답장이 왔다. 이 학교로 배당된 연구비가 없으니 실험 장비를 사기도 어려웠다. 눈치 보며 얻어 썼다. 부모님께 다시 용돈을 받기 시작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아래아() 하나쯤 들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래된 격언을 그제야 깨달았다. 석사과정 학생이 혼자 준비하다시피 한 디펜스[4] 수준은 뻔했다.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도교수도 없는 학생을 졸업시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그래서 도장을 찍어주었다.

물론 권대성 교수님은 다를 수도 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분이니까. 우릴 버리지 않고 지도해주시리라 믿고 싶다. 하지만, 결코 지금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옮겨가는 학교에서 새로 연구실을 꾸리는 것만 해도 간단치 않은 일이니까. 그도 인간이다.

원식은 연구실로 가서 자기 자리에 있는 3대의 컴퓨터를 모두 꺼버렸다. 가방을 대충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까. 졸업만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친구에게는 도저히 갈 수 없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일단 학교부터 벗어났다. 걸었다.


세미나실은 아직도 ‘이공계 위기’다. 분석과 대책은 많은데 결론이 안 난다.
심정길(3): 국현아, 넌 어쩔거냐.
김국현(3): , 전문연구요원 때문에 학교 옮기면 안 돼요. 다시 박사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거 아니에요.
하주성(1): 그게 아니더라도 한겨레 대학교로 가긴 좀 그렇잖아요. 아무리 우리 교수님이 좋은 분이긴 하지만.
이들이 현재 있는 꿈꾸는 대학교는 초등학생들도 꿈꾸는 대학교다. 반면 한겨레 대학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모의고사를 보고서야 목표 대학 목록에 등장한다.
심정길(3): 아씨, 이러려고 회사 때려치우고 대학원 온 거 아닌데.
전길영(2): 그러게, 형은 진짜 어떡해요.
하주성(1): , 다 똑같아. 나도 잘못하면 군대 끌려가는 거라고. 이럴 거면 난 왜 받았어? 박사 시작하기 전에 언질이라도 줬어야 할 거 아냐.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강준상(4): 하주성. 진정해. 목소리 높인다고 해결되는 거 아냐.
주성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어차피 해결 안 될 거잖아. 분이라도 풀면 안 되나?
김정원(4): 미안하다. 내가 논문만 많이 썼어도 테뉴어 될 수도 있었을 건데.
전보영(2): 그게 왜 오빠 탓이에요. 오빤 열심히 했잖아요. 저야말로….
정원은 보영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0분짜리 실험 돌려놓고 한 시간짜리 예능프로그램 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졸음 좇는다고 게임 시작했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퇴근해버렸던 날들이 떠올랐다. 몇 권 읽은 자기계발서도 떠올랐다. 그대로만 해볼 걸. 의지박약을 탓했다. 나 때문에 후배들까지 이런 상황에 몰린 것만 같다. 준상인 논문도 꽤 썼으니까, 부족했다면 내 탓이다.
심정길(3): 너무 그러지마. 교수님이 정치에 실패했을 수도 있어. 학과장님하고도 사이가 별로 안 좋았잖아.
김정원(4): 그래도 실적이 좋으면 붙었겠죠.
하주성(1): 혹시 모르죠. 한겨레 대학교에서 돈 많이 준다고 했을지.
강준상(4): 넌 교수님을 그렇게 밖에 생각 안 해? 그리고, 이유가 뭐가 중요해? 앞으로 어떡할 건지나 고민하면 되지.
그렇다. 이유가 뭐가 중요한가. 교수님은 꿈꾸는 대학교에서 잘릴 예정이다. 그리고 한겨레 대학교로 옮기겠다고 천명하셨다. 계약서도 썼을 것이다. 붙잡는다고 해도 붙잡히기 어렵다. 아쉬울 게 없는 꿈꾸는 대학교에서 붙잡을 리도 없다.
하주성(1): 어쨌거나 학교를 옮기는 건 너무 손해잖아요. 선택지는 지도교수를 바꾸느냐, 마느냐, 아니에요?
강준상(4): 정확히 말하면, 서류상으로만 바꾸느냐, 진짜로 바꾸느냐지. 어찌됐건 바꾸긴 바꿔야 해.
물론 둘 다 아무도 원한 적 없는 선택지다. 하긴, 태어나는 건 뭐 선택해서 태어났던가. 선택한 적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선택 전문가가 되길 강요받는다.
강준상(4): 일단 석사 2년차들은, 한 학기만 더 하면 졸업할 거니까 안 옮기는 게 낫지.
전길영(2): 솔직히 그렇죠. 그냥 빨리 졸업해야죠.
전보영(2): 박사를 가기는 힘들겠죠?
심정길(3): 갈 거면 다른 연구실로 가야지. 원식이 형처럼.
김정원(4): 나도 이제 와서 바꾸기는 좀 그렇잖아. 아무리 프로포잘도 못 했다지만, 그래도 벌써 4년찬데.
김국현(3):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솔직히 우리 교수님만한 분 만나기도 쉽지 않잖아요.
심정길(3): 그래도, 대충 요건만 채워도 졸업시켜주시겠지?
김국현(3):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강준상(4): 냉정하게 얘기해서, 석사 1년차들은 다른 연구실로 가는 게 나아. 어차피 봄학기 땐 수업 듣는 거 말곤 별로 한 거 없잖아. 어때?

석사 1년차들은 여태 말 한 마디도 못 꺼내고 있었다. 대학생 티도 채 못 벗은 그들이 끼어들 대화가 아니었다. 질문을 받고서야 한길과 연정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치만 살폈다.
강준상(4): 남아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될 거야. 정길이 형이나 국현이도 비슷하게 남아있을 테니까. 어떻게 생각해?
준상이가 재촉했다. 사실 그들은 교수님이 “다른 교수님 학생으로 옮겨가도 좋다”는 말을 할 때 자신들을 쳐다봤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답이 정해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고 신입생 환영회를 거친 건 아니었지만.
이한길(1):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서연정(1): 저도요.
겨우 한 마디씩 내뱉었다.
강준상(4): 그래, 그럼 잘 알아봐. 이제 어떤 연구실이 좋은지도 감이 좀 잡혔을 거 아냐. 새로운 분야 시작하기에도 늦지 않았어.
연정은 원래 잘 운다. 하지만 지금은 울 수 있는 분위기조차 아니다.
하주성(1): 그래서 결국 저만 남은 거네요? 아이씨.
강준상(4): 너도 남겠다고만 하면 끝까지 잘 지도해주실 거야. 교수님이 학계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학교만 옮기는 거잖아. 어차피 거기서도 학생들 지도하고 논문 계속 쓰시고 할 거 아냐.
인생에 별 굴곡이 없다 못해 박사과정에서도 때마다 논문 하나씩 터뜨려준 강준상. 그는 참 낙관적이다.

하지만 주성인 그렇지 않다. 지도교수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상태로 4~5년을 버티는 일은 쉬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원식이 형처럼 7년을 버텨야 한다면? 그렇다고 다른 연구실로 옮기는 건? 애초에 권대성 교수님만 바라보고 박사를 진학했던 그였다. 박사과정을 계속 밟을 건지부터 다시 고민해봐야 한다.

자기 상황만 복잡한 것도 짜증났다. 연구실에 동기가 없다는 게 이런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더 이상 삐 처리를 고민해야 하는 말을 내뱉기도 미안했다. 혼자 거칠어 봐야 듣는 사람도 없는 정치 팟캐스트 꼴이나 날 테니까.
하주성(1): 전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일단 여기서 나가죠.
강준상(4): 그래, 그럼 주성이는 좀 더 생각해 보고. 1들은 옮기는 걸로 하고, 나머지는 일단 남는 걸로. 서로 어려우니까, 내가 교수님께 말씀드릴게.
, 신문 사설 같은 정리다. 논리적이고 명쾌하다. 하지만 내일이면 알게 된다. 그렇게 이루어질 리 없다. 

[1] 측두엽: 청각정보의 처리를 담당하는 뇌의 한 부분.
[2] 테뉴어(Tenure): 알고 보면 대학교수는 대부분 계약직으로 시작한다. 2~3년씩 계약하고, 그 사이 실적을 쌓아 계약을 연장하며 버틴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심사를 통해서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를 갖는 것이다. 심사를 통해 정년까지의 고용을 보장 받는 것을 “테뉴어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영어 사전에서 “테뉴어”의 의미는 “종신 재직권”이다.
[3] 통계청,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 현황”,
[4] 디펜스(defence):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논문을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교수님들 앞에서 박사학위논문 내용을 구두발표하는 것으로 심사 받게 된다. 구두발표를 마친 후에는 교수님들을 질문을 던지는데, 여기에 대답까지 잘 해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교수님들의 공격(질문)을 잘 막아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과정을 디펜스(defence, ‘방어’라는 뜻)라고 한다.


#2. 나무

하주성(1)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옥상이었다. ! 소리를 질렀다. 끊었던 담배나 다시 피울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주먹으로 난간을 쳤다. 있는 힘껏 쳤다. . 충격이 왔지만 무시했다. 다시 한 번 쳤다. . 칼 맞은 사람 간지럽힌다고 간지럽겠느냐. 계단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없다. 빠르게 내려갔다. 3, 2. 손잡이를 주먹으로 쳤다. 데엥. 여운이 뒤를 좇는다. 더 빠르게 내려간다. 1층 마지막 계단을 딛는 찰나, 발을 헛디뎠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생존본능이 그를 바로 세웠다.

그 순간 생존본능이 정신마저 재부팅시켰나보다. 하긴, 생존에 위협이 되는 정신상태였으니까. 주성은 갑자기 차분해졌다. 천천히 걸어서 문밖으로 나갔다. 여름이지만 그리 덥지 않았다.

주도권을 잡은 이성이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을 해보면 좋겠다고 속삭였다. 가능한 선택지들을 놓고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는 것이다.
1) 지도교수를 서류상으로만 옮긴다.
   - 4~5년을 서자로 살아야 한다. 눈칫밥에 비만 될 수 있다.
   + 하던 연구를 지속할 수 있다. , 지속할 만한 연구가 있긴 하던가?
2) 새로운 연구실로 옮긴다.
   - 새로 하게 되는 연구와 케미[1]가 안 통할 수 있다.
   - 연차초과[2]의 지름길이다.
   - 교수님이 재떨이 던지는 연구실로 갈 가능성도 있다.
   + 지도교수가 내 옆에 있다.
3) 박사를 포기하고 취직하기
   - 박사 1년차 전부가 의미없어 진다.
   - 야근생활을 남들만큼 일찍 시작한다. 아참, 지금도 맨날 야근하지.
   + 두어 달만 벌어도 아이패드 에어2를 살 수 있다.
4) 재벌 3세와 결혼해서 땅콩 실컷 먹기
피식. 주성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생각나다니. 그러다 불쑥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왜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한 걸까?


주성은 걸음을 멈추었다.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답이 필요했다. 이제까진 예능을 볼 것이나 논문을 읽을 것이냐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인생 전체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석사 과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박사과정에 온 것 같다. 이왕 연구란 걸 시작했는데 2년만 하고 그만 두긴 너무 짧았다. 당장 취직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주변에서도 많이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이 바닥의 진로 중에 박사학위를 받아서 손해 볼 분야도 없어보였다. 그래서 그냥 시작했던 것 같다. 박사과정 입시서류라도 떠올려보려 애썼다. 석사과정 입시서류를 대충 베꼈던 기억만 난다.
‘그렇다면 석사는?
주성은 질문을 이어보았다. 그런데, 석사도 비슷했다. 학부 4년을 배워봤지만 별로 아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도 대학원에 많이들 갔다. 취직할 때 석사학위가 있으면 2년 경력은 쳐준다니 손해도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했던 것 같다.

세상에. 학부마저 비슷했다. 주성은 과학고등학교를 나왔다. 잠 줄여가면서 과학 공부를 했으니 이공계 대학에 가는 게 당연해 보였다. 과학고등학교에서 이공계가 아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없다시피 했다. 이공계는 위기라고 떠들기라도 하지, 인문계는 취업 안 되는 게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 굳이 인문계로 갈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갔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고등학교 입학 이유다. 주성은 이 프랙털(fractal) 구조[3]가 과연 깨질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다. 중학생 때 공부를 잘 했다는 건 확실히 기억나니까. 주성은 전교 1등은 놓친 적이 거의 없었다.

‘아.’ 중3 때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났다. 담임선생님이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단지 성적이 좋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해주셨던 말씀도 생각났다. “너, 6살 때 과학자가 꿈이었는데, 기억 안 나? (물론, 부모님은 주성이 6살 때 매달 꿈이 바뀌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뭔가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성적이 좋으면 당연히 과학고등학교에 멋지게 합격해서 학교에 플래카드도 걸리고 부모님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것 같았다. 전국에 공부 좀 잘 한다는 학생들은 다들 과학고등학교에 지원했으니까. . 프랙털은 역시 프랙털이다.

주성은 답을 찾았다. ‘나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 했다. 고로, 나는 박사과정에 있다.

주성은 자기가 남들보단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입시 실패 한 번 없이 좋은 대학교에 있지 않은가. 인생을 상대평가 하면 A0쯤은 받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수강신청 한 적이 없었다. 정해진 커리큘럼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주성이 다른 길로 가야 했을까? 모르는 일이다. 다른 길로 갈 수 있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다른 길이 더 낫다고 들어본 적은 더더욱 없으니까.

어른들은 말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하지만 내 주변엔 나보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어쩌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그들도 숲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 지나온 길을 회상할 뿐인 것 같다.


며칠 뒤, 꿈꾸는대학교 전산학과 정기 교수회의[4]가 열렸다. 안건으로 서연정(1)과 이한길(1)의 연구실 배정 문제가 올라왔다.
권선필(교수): 거기 재배정할 학생이 이 둘 뿐인가요?
학과장: 졸업 예정인 학생은 서류상으로만 지도교수를 옮기기로 했으니 학과사무실에서 서류만 잘 처리해주면 될 것 같고요, 박사과정 학생 몇 명은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답니다.
사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건 꾸며낸 말이었다. 박원식과 하주성은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걱정되어 연락을 해보았지만 며칠 있다 연락할 거라는 문자가 하나 온 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은 메시지를 보내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권선필(교수): 이왕 옮길 거면 빨리 처리하는 게 본인한테도 나을 텐데.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삶을 수학 교과서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식에 의해서 재깍재깍 전개되지 않으면 답답해한다. 본인들의 과거는? 전부 편집해서 알짜배기만 남겨두었다.
김충섭(학과장): 박사과정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지도교수를 컨택해서 옮길 수 있도록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데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김호진(교수): 지금 박사 학생이 거의 없는 연구실도 있는데, 학생 데려가는 데 우선권은 줘야하지 않나요?
박민석(교수): 그래도, 박사과정 학생이면 본인이 연구하던 게 있을 텐데, 무작정 바꾸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던 분야가 다르면 지도하기도 쉽지 않잖아요.
김호진(교수): , 그렇긴 하네요.
김충섭(학과장): 그럼 또 반대하는 분, 계신가요?
이로써 넘어갔다. 하지만 석사학생은 다르다. 회사로 치자면 박사과정 학생은 경력직, 석사과정 학생은 신입이다.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회사의 필요에 따라 배치된다.
김충섭(학과장): 그럼 석사과정 학생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주세요.
김호진(교수): 석사 학생들은 올 봄에 석사 신입생 받지 못한 연구실들이 먼저 뽑아갈 기회를 갖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봄학기 때 각 연구실에 배정된 인원을 다 채운 연구실들은 빼고, 나머지 연구실들을 대상으로 원래의 프로세스를 거치면 될 거 같습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김호진 교수의 연구실은 학생이 별로 없다. 올 봄엔 김호진 교수 연구실을 3순위에 쓴 석사과정 학생이 배정됐다. 그 학생은 배정 이틀 후 교과석사[5] 과정으로 바꿨다. (교과석사 과정은 연구실에 소속되지 않는다.)

그 학생이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김호진 교수는 평소 다른 교수들의 좋은 술친구이기 때문이다. 매너도 좋고 유머도 있다. 연구비도 잘 따와서 학과에 도움도 된다.

물론 일부 교수들은 알고 있었다. 김호진 교수가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학생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 도는지를. 하지만 앞에 나서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충섭(학과장): 이 문제는 표결에 부쳐 보도록 하죠. 방금 김호진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하는 데 반대하시는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찬성하는 사람 들라고 했으면 몇 명은 안 들었겠지만.
학과장: 그럼 김호진 교수님 의견대로, 올 봄에 할당된 배정 인원을 다 못 채운 연구실들만을 대상으로 원래 연구실 배정 프로세스를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이틀 뒤, 서연정과 이한길에게 메일이 날아왔다. 교수회의에서 통과된 내용에 대해서다. 메일을 보자마자 한길이가 옆 방에 있는 연정이에게 찾아왔다.
이한길(1): 연정아, 너 메일 온 거 봤어?
서연정(1): ,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김국현(3): 뭔데?
이한길(1): 저희 연구실 배정에 대한 건데요, 봄학기에 배정된 결과 있잖아요, 거기서 학생 못 받은 연구실들 중에서 골라서 면접 보고 하래요.
김국현(3): 비슷한 분야 연구실이 아니라?
이한길(1): . 연구실 목록도 같이 왔는데, 이게….
김정원(4): 어떤데 그래?
뒷자리에 있던 정원까지 합세해서 연정에게 온 메일을 보았다.
김국현(3): ,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이 중에서 고르라고?
김정원(4): 왜 봄학기 때 신입생 안 들어갔는지 딱 알겠구만...
석사 신입생들이 기피하는 연구실은 두 종류다. 연구 분야가 팍팍하거나 교수님이 괴팍하거나. 연구 분야가 팍팍한 경우는, 한국에서 취직할 곳이 별로 없는 경우나, 아니면 학문 자체가 범인(凡人)에겐 너무 어려운 경우다. 교수님이 괴팍한 경우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기사를 찾아보라.
김국현(3): 너네도, 어떤 연구실에 가면 안 되는지, 들어둔 건 있지?
이한길(1): 알죠. 아니까 이러죠.
서연정(1): 아 진짜 한숨밖에 안 나온다. 그냥 남아 있으면 안 돼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남아 있겠다고 했죠.
김국현(3): 교수회의 통과했는데, 가능할까?
김정원(4): 그래도 말은 해봐야 되진 않아?
김국현(3): 솔직히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얘긴데, 너네들, 분야보다는 교수 보고 가라. 정말, 내가 대신 미안하다.
김정원(4): 이거 진짜 나이 들고 소개팅 하는 거 같지 않냐? , 나이 들고 솔로인 사람은 꼭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잖아.
어른들은 말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하늘 높이 올라간 그들은 숲만 본다. 그래서 한 그루씩 죽어가는 나무는 보지 못한다.

그 때, 갑자기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하주성(1): 하이, 여러분! 제가 없어서 좀 덜 시끄러웠죠?
주성이 돌아왔다. 

[1] 케미: 최근 들어 방송에도 나오는 신조어. ‘화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chemistry’의 첫 두 음절을 나타낸 것이다. ‘케미가 통한다’는 ‘화학 반응이 일어날 것 같다’, 즉 ‘죽이 잘 맞는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방송가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연기 호흡이나 개그 호흡이 잘 맞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케미가 통한다’라고 하며, 남녀 사이에 사랑이 싹틀 때도 비슷한 표현을 쓸 수 있다.
[2] 연차초과: 대학교의 기본 재학 기간이 4년인 것처럼, 석사과정의 기본 재학 기간은 2, 박사과정은 4년 정도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각 과정에 지정된 재학 기간을 넘겨 학교를 다니는 것을 ‘연차초과’라고 한다. ‘연차초과’를 한다고 학교에서 바로 잘리는 것은 아니지만, 지원금이 삭감된다거나 기숙사 배정이 후순위로 밀리는 등의 불이익을 주는 학교도 있다. 문제는 박사과정의 경우 5년 걸리는 것은 부지기수고, 6, 7, 8년 혹은 그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
[3] 프랙털(fractal): 어떤 도형 혹은 모양의 일부분이 전체 부분과 동일한 형태를 갖는 것을 말한다. 가수 “노라조”의 뮤직비디오 <니 팔자야>에도 등장했다.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9%ED%84%B8
[4] 교수회의: 이 소설의 필자는 대학원생이며 교수회의는 근처에도 못 가봤다. 다른 부분은 매주 현실적으로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교수회의 부분 만큼은 철저히 상상에 의존했다는 것을 밝혀둔다.
[5] 교과석사: 보통 석사학위 과정은 학위논문을 작성해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대신 수업을 더 듣는 것으로 대체해서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존재하는 학교도 있다. 이 때 받는 학위를 ‘교과석사’라 한다.

#3. 독기

하주성(1): 하이, 여러분! 제가 없어서 좀 덜 시끄러웠죠?
주성이 돌아왔다.
김정원(4): , 너 어딜 갔다 온 거야!
하주성(1): 저 권선필 교수님 연구실로 옮기기로 했어요. 근데 우리 연구실에서 쓰던 컴퓨터 가져가도 되나요?
생각보다 빠른 전개였다. 분명 주성은 매사에 느긋한 사람이었다. 정원은 당황했다.
김정원(4): , 그래? , 아마 될 걸. 어차피 학교 자산으로 등록돼 있는 거니까. 교수님께 말씀 드려볼게.
하주성(1): 제가 연락할게요.
김국현(3): 근데, 권선필 교수라니, 괜찮겠어? 거기 빡세기로 유명하잖아. 우리랑 분야도 완전 다른데.
하주성(1): 열심히 해야죠.
김국현(3): 그래도 잘 됐네, 거기 나오면 회사에서 알아준다잖아. 선배들도 다 잘 나가고. 근데 얘네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국현이가 연정과 한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성은 대답 대신 눈짓만 보냈다.
김국현(3): 올 봄에 신입생 못 받은 연구실들 있잖아. 그 중에서 옮겨갈 연구실 고르라고 했대. 방금 학과에서 메일 왔어.
하주성(1): , 그래요? 어차피 석산데, 대충 학위나 따서 나가면 되겠네요.
포털 사이트 연예 기사 댓글 같은 말이었다. 분명 주성은 사람을 좋아했었다. 오글거리는 위로는 못 했지만, 술 댓 병 살줄은 알았다. 국현이 소리를 높였다.
김국현(3): ,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순식간에 시베리아 고기압이 남하한 듯 했다. 적막 속에 숨소리만 또렷했다. 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국현은 주성의 말이 연정과 한길을 향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주성이 자신의 처지를 포함해, 지금 상황을 비꼬는 말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연정과 한길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국현이 대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연구실에 온 지 3개월 밖에 안 됐으니까.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정도는 안 되니까.

정원은 이 상황에 대본이 있다면 다음 대사는 자기 몫이란 걸 직감했다. 키워봤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싸움이다. 정치권에서도 싸움이 길어지면, 그래서 양측 다 비난을 받을 만한 타이밍이 되면, 어떻게든 출구를 마련해서 싸움을 끝내지 않는가. 여기서 출구를 마련할 수 있는 건 가장 선배인 자신뿐이었다.
김정원(4): (주성을 바라보며) , 그 쪽 연구실엔 언제부터 나가기로 했어?
하주성(1): 오늘 자리 세팅하고, 내일부터 출근이에요.
김정원(4): 그래, 그럼 서둘러야겠네. 급한 거면 교수님께 문자라도 드려 봐.
하주성(1): , 갈게요.
주성도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원이 마련해준 출구로 순순히 나갔다.
김국현(3): , 저 새끼 말을 어떻게 저 딴 식으로 하냐. 
여전히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연정과 한길을 대신해서, 국현은 더 강하게 말했다.
김정원(4): 근데, 쟤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이한길(1): 맞아요. 뭔가 되게 차가워진 것 같아요.
김정원(4): 그리고, 어떻게 권선필 교수님 연구실로 갈 생각을 하지?
서연정(1): 제 동기도 한 명 있는데요, 되게 힘들어 하던데….
김정원(4): 거기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12시간씩 있어야 된대.
이한길(1): 그 정도에요?
김정원(4): 여기서 반전이 뭔지 알아? 12시간에 식사 시간은 제외라는 거야. 점심, 저녁을 둘 다 30분 만에 해치워야 밤 10시에 퇴근하는 거라고.
김국현(3): 그걸 보면 변하긴 확실히 변한 것 같아요.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 애가….


맞다. 주성은 놀기를 좋아한다. 학교를 떠난 그가 달려갔던 곳은 부산이었다. 가자마자 부산 사는 친구 한 놈을 불러냈다. 회에 소주를 들이켰다. 그냥 갑자기 떠나고 싶었다고 둘러댔다. 게임 이야기, 우리나라 아이티(IT) 업계 이야기나 했다. 회 접시가 동나자 맥주 피처 두 개에 마른 오징어 하나 들고 백사장에 앉았다. 한 여름 밤, 선선한 백사장엔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돌아다녔다. 어두워 얼굴도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실루엣만 보고 평해댔다. 불룩 나온 뱃살에 힘을 한껏 주고 이러면 식스팩 나온다고 자뻑했다. 그렇다고 여자들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다가오는 여자들도 없었다.

밤이 깊자, 택시를 태워 친구를 보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앉아있던 아저씨가 벌떡 일어난다. 아직 화면이 꺼지지 않은 핸드폰에 어린 애들 사진이 힐끗 보인다. 연예인 얼굴이 찍혀 있는 족발과 소주 두 병을 샀다. 포스(POS)[1]가 아직 어색한지 느릿느릿 버튼을 누른다. 취기를 애써 다잡으며 버텼다.

여관방에 들어갔다. 텔레비전을 틀었다. 유명 배우가 자녀들과 놀아주느라 용을 쓴다. 소주병을 비우며 족발을 먹었다. 애들이 귀엽다. 저러고 돈 많이 받겠지. 졸리다. 씻지도 않고 텔레비전도 안 끄고 디비 잤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더워서 깼다. 에어컨을 틀었다. 피곤한데 속이 쓰리다. 목도 마른데 물이 얼마 없다. 머리에 대충 물만 묻혀 가라앉히고 나섰다. 여관 바로 앞에 해장국 집이 있다. 들어가 주문을 했다방금까지 손님이 많았나보다. 사람 없는 식탁에 그릇들이 많았다. 나이든 아주머니 한 분이 식탁을 치운다. 갑자기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아지매요, 오신 손님부터 하이소. 뭐하능교!” 아주머니가 대답한다. “안 그래도 정신없구마, 쫌 말 쫌 시키지 마소.”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이고, 어데서 저런 아지매가 왔노.” 이 분위기에 물 갖다 달란 소리는 못 했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해장국 한 그릇을 먹었다.

계획이 없으니 다시 여관방으로 왔다.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다. 요리 연구가[2]가 요리를 만든다. 드디어 완성. 사람들이 일거에 감탄하고 일거에 멈춘다. 피디가 손을 내린 것일 거다.

그 시간, 주성의 간은 마감 기일 닥친 개발자마냥 철야 작업에 이은 주간 작업 중이었다. 택배하차장 알바마냥 쉼 없이 알코올 분해했지만, 알코올은 명절마냥 높이 쌓여 있었다. 곤히 자던 주성을 깨워 해장국을 먹인 것도 간이었다. 에너지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도 이미 울렁거리고 있었지만, 알코올 분해가 더 급했다. 어쨌거나 에너지를 보충한 지금 주성이 허튼데 에너지를 쓰게 하면 안 되었다. 온 몸에 피곤 신호를 보냈다. 그 탓에 주성은 침대에 다시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이 일을 너무 열심히 했다. 몸을 각성시켜 버렸다. 주성은 쉬이 잠들지도 못했다. 이리 저리 뒤척였다. 다시 슬금슬금 자기가 부산까지 온 이유가 떠올랐다. 앞으로 박사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긴 해야 하는 건지….

별 답도 없을 고민을 하려니 딴 생각도 났다. 필름이 끊긴 건 아닐까 싶어 간밤의 기억도 더듬었다. 편의점에서 족발과 소주를 샀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고, 아침엔 해장국을 먹었고, 다시 텔레비전을…

그 때였다. 주성은 뭔가 깨달았다. 여기,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하는 아버지가 있다. , 애랑 노는 걸 보여주기만 해도 돈을 버는 아버지가 있다. 자기보다 어린 사장에게 욕을 먹는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요리 하나 내보이면 환호성이 나오는 어머니가 있다. 결론은 간단하다. 세상은 사람들을 버려둔다. 그들의 능력만 취한다.

교수님도 학교로부터 버림받았다. 하지만 능력이 있기에 학교를 옮겼다. 주성은 교수로부터 버림받았고, 능력이 없기에 술이나 처먹는다. 세상에 내 편은 없다. 내 능력을 평할 뿐이다.
‘능력을 키워야겠다.
주성은 목표가 생겼다. 그러자면 박사를 그만 둘 수 없다. 석사까지 땄으니, 박사를 빨리 취득하는 게 가장 빨리 능력을 키우는 길이니까. 박사를 따는 걸로는 부족하다. 실적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선택했다. 권선필 교수님 연구실은 졸업만 하면 앞길은 탄탄하니까. 고생 깨나 하겠지만, 편의점 야간 근무 하는 셈 치고.

주성은 인생 마지막 방학을 며칠 즐기고 돌아왔던 것이다. 독기를 품고서.


을사조약을 맺은 날, 사람들은 밥을 먹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날, 사람들은 밥을 먹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날도 사람들은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관성을 가진 일이다. 연구실이 없어진 이들도 점심을 먹는다. 다만, 사람이 줄었다.
김정원(4): , 진짜 우리 이게 다 모인 거냐?
김국현(3): 어디 갔는지 모르는 원식이 형만 빼면, 그렇죠.
강준상(4): 원식이 형, 휴학했다던데?
김국현(3): , 그래요?
김정원(4): 하긴, 그 형, 재학연한[3] 얼마 안 남았잖아.
김국현(3): 그래도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잖아요.
심정길(3): 나도 휴학하고 딴 길이나 찾아봐야 하나….
일동 침묵. 아무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 질문의 무게를 알기에.
심정길(3): 근데, 너네 곧 박사 지원 기간 아냐? 어쩔 거야?
전길영(2): 지원하려고요. 근데 어느 연구실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이 고민을 또 해야 하다니.[4]
김정원(4): 지원하지마.
전길영(2): ?
김정원(4): 서류 접수가 언제부터냐?
전길영(2): 다음 주 월요일이요.
김정원(4): 그럼 내가 그 전까지 박사 가지 말라고 백 번쯤 말해줄게. 그래도 갈 거면 가.   
강준상(4): 왜 그래, 이제 시작하려는 애한테.
김정원(4): 왜 그러긴, 나중에 안 말려줬다고 나 원망할까봐 그러지.
전길영(2): 저도 2년 동안 형들 봐왔잖아요.
김정원(4): 나도 석사 때 박사 하는 형들 다 봤지. 근데, 그래…, 니가 이해할 수가 없겠지. 어쨌든 나는 열렬히 뜯어말린 걸로 해줘라.
잠시 침묵, 정원은 수습이 필요함을 느꼈다.
김정원(4): 그게, 누가 권유해서 박사 가고 그러면 절대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래. 완전 자기 의지로 가야 겨우 버티는 거거든.
김국현(3): 에이, 길영이는 박사 가도 잘 할 거예요.
김정원(4): 나도 석사 땐 그런 얘기 많이 들었는데….
길영이가 박사 4년차가 됐을 때 과연 누구의 말이 떠오를까? 정원의 말일까. 국현의 말일까? 정말로 궁금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길영이가 박사 4년차가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준상이가 말을 돌렸다.
강준상(4): 보영아, 넌 어쩔 거야?
전보영(2): 전 잘 모르겠어요.
강준상(4): 그래, 고민 잘 해라.

그날 밤, 정원이 기숙사로 가는 길에 보영을 마주쳤다.
김정원(4): ? 너 한참 전에 나가지 않았어?
전보영(2): , 그냥 산책 좀 하고 있었어요.
김정원(4): 술 한 잔 하러 갈래? 싫음 말고.
습기로 포근한 한여름 밤이었다.[5]

[1] 포스(POS, Point Of Sales): 편의점, 음식점, 마트 등에서 돈을 지불할 때 볼 수 있는 기기. 사용자가 지불할 금액 합산은 물론, 재고 관리, 재무 관리 등도 해준다.
[2] 요리 연구가: 김진경 셰프는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이상하게 요리 프로그램에 여성이 나오면 자막에 ‘요리사’가 아니라 ‘요리 연구가’라고 나온다. 왜 여성이 요리를 하면 요리가 아니라 요리 연구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30) 이런 비판에 동의한다. 현실을 비꼬려고 선택한 단어다. 이런 주석을 달기 위해서. 
[3] 재학연한: 학생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간. 이 기간 동안 졸업을 못 하면 학교에서 잘린다. KAIST의 경우 석사과정 3, 박사과정 5년이다며, 심의를 거칠 경우 2회에 걸쳐 1년씩 연장 가능하다. , 휴학 기간은 계산하지 않는다.
[4]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5. 또 하나의 입시 http://scienceon.hani.co.kr/173132 
[5] 이번 화의 시간적 배경은 7월입니다.

#4. 여자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잠깐의 침묵이 무거운 것은. 정원은 그저 보영을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자기라고 뾰족한 수는 없지만,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늦은 밤에 카페를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커피 마셨다고 잠 못 자면 어쩌려고. 그래서 술 마시러 가자고 한 것이다. 아차, 싶어 재빠르게 “싫음 말고”라 덧붙였다. 그래도 긴장됐다. 늦은 밤 여성에게 술 마시자고 하는 건, 마녀사냥[1]에 사연 보내면 그린라이트[2] 판정될 일이니까. 정원의 마음은 순수했지만.
전보영(2): 그럴까요?
다행이었다. 정원은 순간 이것이 그린라이트가 아닐까도 싶었다. 하지만 관두기로 했다.
김정원(4): 어디로 갈래?
전보영(2): 전 아무데나 괜찮아요.
김정원(4): 나도 다 괜찮아. 네가 원하는 데로 가자.
정원은 보영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보영은 정말 아무데나 괜찮았다.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남자란 족속과 함께 살아가려면.
전보영(2): 그럼, 그 오빠가 좋아하시는 ‘둘리야 학교가자’[3]도 괜찮고, ‘요세미티’도 괜찮고, , , ‘세다리’도 괜찮고요.
김정원(4): 옛날에 개그콘서트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원하는 걸 두 번째로 말한다며? 그럼 ‘요세미티’ 가면 되는 거지?
전보영(2): (웃음) 그런 게 언제 나왔어요? 누가 그렇대요?
김정원(4): 아니야? 웃기려고 한 말인가…. 어쨌든 그냥 요세미티 가자. .
보영은 어쨌거나 웃었다. 남자들이란, 그저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배운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애초에 자기가 아무데나 정해서 가자고 했으면 중간은 갈 텐데. 하긴, 그런 센스가 있었다면 이 오빠가 솔로가 아니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세미티’만 병맥주를 파는 집이긴 하다. 나머지는 소주, 맥주에 안주를 거하게 파는 집들이다. 보영은 개그콘서트에 나왔다는 그 말이 진짠가도 싶었다.


지하로 내려갔다. 아저씨가 “두 분이세요?” 묻는다. 정원이 “네”라고 대답한다. 구석 자리로 안내하더니 초를 켜준다. 어둑한 조명 속에 초만 밝다. 공기 함량 60% 정도의 여자목소리[4]가 팝음악에 얹혀 나온다. 두 사람은 자리에 가방만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병맥주들이 가득 진열된 냉장고로 향했다.
김정원(4): 오늘은 오빠가 살 테니까, 비싼 거 마셔.
전보영(2): 안 사주셔도 돼요.
김정원(4): 에이, 내가 너보다 월급 더 많이 받잖아. 우리 서로 월급 뻔히 아는 처지에 이러지 말자.
정원은 솔선수범해서 4,900원짜리 독일산 맥주를 잡는다. 보영도 머뭇거리다 4,900원짜리 맥주를 잡는다. 둘은 초를 밝혀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앉자마자 보영이 병따개로 맥주를 딴다. 대신 따주려던 정원이 머쓱해진다. 하지만 안 그러려고 했던 척, 자신의 병을 딴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년 반. 우연히 학생식당에서 만나 둘이 밥 먹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만난 것은 처음, 술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어색하자면 한없이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술이란 무엇인가. 체면이란 장막을 걷어내고 부끄러움이란 문을 열어젖혀 상대방을 초대하는 도구가 아니던가. 물론 어느 정도 취한 다음의 이야기다. 정원은 병을 들어 내밀었다. 보영이 병을 맞춘다. 새끼손가락끼리, 병의 밑동끼리 닿는다. , 유리가 운다.
김정원(4): 박사 어쩔 거냐?
병을 내려놓자마자 본론부터 들어간다. 딱히 꺼낼 곁다리 이야기도 마땅치 않으니까. 보영도 이미 예상한 질문이다. 처음부터 대놓고 나올 줄은 몰랐지만.
전보영(2): 모르겠어요.
김정원(4): 뭐가 고민이야? 연구가 좀 아닌 거 같아?
전보영(2): 연구가 할 땐 재밌긴 한데, 딱히 결과가 잘 나오는 게 아니니까….
김정원(4): 그건 왠지 나 때문 같다. 미안해.
석사 신입생들이 연구가 뭔지 알 리가 없다. 그래서 보통 박사과정 선배가 한 명 붙어서 자신이 진행 중인 연구를 돕게 한다. 연구가 뭔지 보고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 때 박사과정 선배를 사수, 석사과정 후배를 부사수라고 한다.[5]

작년엔 보영이 석사 신입생이었고, 정원이 보영의 사수였다. 당시 정원이 진행하던 연구 주제로 7개월쯤 함께 실험도 하고 토의도 했다. 학회에 논문도 제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출 일주일 전, 전제부터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 주제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결국 접었다. 보영은 어물쩍 석사 2년차가 되었다. 혼자만의 연구 주제를 잡아야할 때였다. 그 후로는 각자 연구를 하게 됐다.

정원은 그 일이 늘 미안했다. 연구도 첫 경험이 중요하다. 조금이나마 성취를 맛보는 게 중요하다. 그걸 자신이 망친 것 같았다. 그 후로 보영의 연구는 답보 상태였다. 정원은 그게 자기 책임인 것만 같았다.
전보영(2): 오빠가 왜 미안해요. 그래도 그 때 나랑 연구하겠다고 한 건 오빠밖에 없었잖아요.
김정원(4): 알고 있었어?
전보영(2): 그 때 다른 사람들이 다 날 어려워했잖아요. 오빠가 정말 고마웠어요.
김정원(4): 네가 첫 여학생이라 좀 그런 게 있긴 했지. 다들 여자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하는 거 같았어.
전보영(2): 여자라고 다를 것도 없는데.
보영인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공대생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공대 여자 아니면 공대 아름이[6]. 공대 여자는 남자로 대한다. 목욕탕 같이 가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공대 아름이는 공주로 대한다. 당연한 듯 흑기사가 돼준다. 술자리에서든, 숙제를 할 때든. 미모에 따라 어느 편인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다. 여기는 공대. 세 명이 미스코리아에 나간다면 꼴찌도 ‘미’를 받는다. 약간의 애교만 섞으면 단번에 ‘진’이다. 그렇다면 상을 받지 않는 방법은? 출전을 안 하면 된다. 예쁜 얼굴을 가졌어도 화장과 치마를 포기하고 함께 밤을 새는 사람에게는 공주 대접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대생은 대학원에 와서야 ‘여자’를 처음 접한다. 나이 먹고 만나서 남자 대우를 할 수도, 직장동료로 만났는데 공주 대접을 할 수도 없다. 남자들끼리야 같이 밤새 가면서 일하자면 하는 건데, 여자에겐 그러자고 하기가 좀 그렇다. 각자 몫은 해줘야 하는데 일을 시키지 않기도 좀 그렇다. 결국 여자는 같이 있고 싶지만, 함께 하기 꺼려지는 존재가 된다.

보영은 대학교 4년 동안 공대 여자를 선택했다. 흑기사에 기대 학위만 받아가려는 여자애들이 꼴 보기 싫었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밥 한 번 같이 먹은 걸로 자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는 남자들도 짜증났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 졸업사진 찍는 날을 제외하고는 치마도 입지 않았다. 오빠들과는 거침없이 지냈다. 과한 농담을 웃어넘겼다.

대학원에 오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구실 생긴 지 6년 만에 첫 여학생이다. 모두가 자기를 조심스레 대했다. 첫 몇 주간은 화장을 했었는데, 다시 지워보았다. 좀 더 편하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기인 길영에겐 일찌감치 생긴 사수가, 자신에겐 생기지 않았다. 석 달쯤 지나서야 정원이 다가왔다.

배려는 바라지도 않았다. 밥 먹는 속도도 맞췄다. 게임 이야기, 군대 이야기도 경청했다. 하지만 여자란 이유만으로 어려워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달리 대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똑같이 대해줘도 알아서 감수하고 맞춰줄 건데.

보영은 울컥하는 대신 맥주를 벌컥했다. 정원도 따라 마신다. 그래도 정원 오빠는 동료로 대우해줬으니까,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보영은 생각했다. 
김정원(4): 그래도 험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잖아? 안 그래? 여자 대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거지, 나쁜 사람은 없잖아.
보영은 작년에 졸업한 선배가 생각났다. 그 선배는 그렇게도 자기 가슴을 힐끗거렸다. 정말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건가? 눈빛이 짜증났지만 참았다. 안 그랬다고 하면 그만인데다, 눈길 가는 데 좀 보면 안 되냐고 하면 곤란하니까. 친구 이야기가 떠올랐다. 술만 마시면 어깨동무도 하고 허리도 감싸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처음에 당황해서 말을 못했더니 그 뒤론 당연하다는 듯 계속 한다고 했다. 신고하기엔 약했다. 이제와 싫다고 하는 것도 분위기만 망칠 것 같다. 오늘 따라 예민하다면서 눙쳐질 것만 같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 눈빛만 기분 나쁜 선배도 졸업하고 없는 지금은 참 좋은 거다.
전보영(2): 그건, 그렇죠.

술자리의 또 다른 장점은 정적을 목 넘김 소리로 메울 수 있다는 거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둘은 다시 술을 마셨다.
김정원(4): 박사 가는 건, 여자라서 꺼려지는 거야? 아이 낳고 그러는 거 때문에?
정원은 최대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쩌지 못 하겠지만, 들어주고라도 싶으니까.
전보영(2): 과장도 안 섞어서, 박사냐 결혼이냐, 양자택일 문제에요.
김정원(4): 그 정도야?
전보영(2): 그렇죠. 결혼까지 해서 애를 안 낳을 수도 없잖아요.
김정원(4): 그래도 국가연구소 같은 데 가면 출산휴가 같은 것도 잘 갈 수 있는 거 아냐?
전보영(2): 제아무리 여성부가 있고 각종 법이 있다한들, 눈치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니, 아무 눈치 없다고 해도, 일단 몇 달 동안 일을 못 하는 거잖아요. 우리 분야에서 몇 달이면, 나오는 논문이 몇 편인데.
김정원(4): ,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렇다. 차라리 군대는 어렸을 때 가잖아. 아무 능력도 없고 경력도 없을 때. 근데 애 낳는 건 대부분 직장 잡고 나서 하게 되잖아.
전보영(2): 직장 잡기 전에 애를 낳으면, 아예 직장 잡기가 힘들겠죠.
김정원(4): 그러네, 정말.
전보영(2): 그리고 군대는 2년도 안 되잖아요. 출산은 한 번 하면 평생이에요.
김정원(4): 그래, 그것도 그러네. 그래도 요즘 남자들은 많이 도와주잖아.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설거지 자주 도와주고 하시는데.
보영은 잠시 망설였다. 맥주부터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전보영(2): 도와준다는 생각부터가 문제죠. 모든 게 여자 일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잖아요. 설거지만 해도 그래요. 밥은 같이 먹는데 왜 설거지가 여자 몫이에요? 이미 요리도 여자가 했을 텐데. (멈칫) 아니, 그렇다고 오빠 아버지께서 잘못하셨다는 건 아니고요…, 그분들 세대는 다 그랬으니까….
보영이 급히 꼬리를 내렸지만, 정원은 되려 그 꼬리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김정원(4): 아냐, 맞는 말이야. 이제 맞벌이 시대니까, 집안일을 몽땅 내 일로 생각해야겠다.
보영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맥주를 마셨다. 정원도 따라 마셨다.
김정원(4): 근데, 설거지를 내가 하기로 하면, 요리는 여자한테 다 맡겨도 괜찮은 거지? 요리는 당최 자신이 없어서….
전보영(2): 직장 다니는 아내에게 구첩반상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면요.
김정원(4): 에이, 난 김치찌개 하나가 일주일 동안 나와도 맛있게 먹을 거야!
전보영(2): 그건, 오빠가 김치찌개를 좋아해서 잖아요.
김정원(4): , 걸렸네.

 기운에 웃음이 더 크다.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맛집 이야기, 대학 시절 추억들, 학과에서 누구랑 누구랑 썸타는 것 같더라는 이야기 등등. 정원은 보영의 말투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밤과 함께 술도 깊어갔다.

어느덧 세 병째였다. 보영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촛불이 붉어진 볼을 밝혔다. 잠시 말을 멈췄던 보영이 흐트러진 발음으로 말했다.
전보영(2): 근데, 말예요, 오빠들은 왜 내 외모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김정원(4): ?
전보영(2): 아니, 이게 그렇잖아. 대충하고 다니면 좀 예쁘게 좀 다니라고 하고, 또 꾸미고 가면 어디 소개팅이라도 가냐고 놀리고. 진짜 짜증나. 꾸미든 말든 그건 내 맘이지 안 그래요? 자기들 보라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
정원은 좀 놀랐다. 가끔 있던 일이고, 말하는 사람도, 듣는 보영이도 농담으로 여겼다고 생각했는데.
전보영(2): 근데 오빤 예쁘게 했을 때만 칭찬해줘서 좋아요.
정원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김정원(4): 그래? 그럼 난 괜찮은 거야?
전보영(2): , 좋아, 합격!
정원은 술이 세다. 맥주로는 쉬이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취한 듯 했다.
전보영(2): 오빠,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김정원(4): ?
전보영(2): , 나 화장실 가야겠다.
보영이 탁자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약간 비틀거리는 듯 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정원은 도와줄까 하다가 말았다. 같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전보영(2): 오빠, 나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 거죠?
김정원(4): 당연하지, 이 늦은 밤에 어떻게 여자를 혼자 보내.
전보영(2): 좋아. 그럼 한 병만 더 먹고 가자.
김정원(4): 말만 해, 내가 갖다 줄게.
전보영(2): 아냐, 내가 갖고 올래.
보영은 그새 반말이 늘었다.


 병을 마저 비우고야 둘은 ‘요세미티’를 나섰다. 돌아가는 길 보영은 정원의 옷자락을 잡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정원은 그럴 거면 팔짱을 껴도 된다고 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보영을 데려다 주는 이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왜 여자 혼자 밤늦게 돌아다니는 게 위험할까? 남자는 잘도 다니는데 말이다. 통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 여자가 성범죄를 당할 확률은 낮지만, 성범죄가 일어날 경우 여자가 당했을 확률은 절대적으로 높으니까. 생물학적 이유도 찾을 수 있다. 성범죄가 일어날 경우, 여자가 성병에 걸려 있지 않은 이상, 모든 피해는 여자만 감당하게 되니까. 하지만 우리가 차를 탈 때마다 교통사고를 두려워하진 않는다.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마초에게는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팜므파탈에겐 검지손가락을 내미는 그 어떤 세계관이라든가….

정원은 어쨌거나 뿌듯했다. 옷자락이나마 내어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전보영(2): 오빠,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김정원(4): 뭔데?
전보영(2): 여학생은 있는데, 남학생은 없어요.
김정원(4): ?
전보영(2): 신입생 올 때도 말예요, 여학생 몇 명이냐 그러고, 학생 몇 명이냐 그러지, 남학생 몇 명이냐곤 안 그러잖아요. 아까 오빠 얘기할 때도 그래요. 어느 어느 연구실 여학생이라곤 말하는데 어느 어느 연구실 남학생이라곤 안 말 하잖아요.
김정원(4): , 그러네.
보영의 말에 토를 달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공대에는 여자가 소수다. 그러니 여학생의 숫자에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어느 어느 연구실 여학생이라고 하면 단 한 명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어느 어느 연구실 남학생이라고 하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편의를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까 ‘공대 남자’라고 써야 적확한 곳에서도 ‘공대생’이라고 썼던 것에는 위화감을 느꼈어야 한다. 공대 여자와 공대 아름이를 말한 부분에서, 두 번이나 그렇게 적었다.
전보영(2): 여잔, , 여자에요. 남잔, , 각자인데.
여교수는 여자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남자 교수(‘남교수’는 아래아한글워드프로세서에서 빨간 줄이 그어지는 단어니까)들은 능력에 따라 다른 취급을 받는다. 여학생은 여자 취급을 받고, 남학생들은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른 취급을 받는다. 이 바닥엔 여자가 적어서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자가 왜 적은가? 남자가 여자보다 수학에 더 능통하다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실은 차이가 없다고 한다.[7] 그런데 한국 수능에선 여전히 남학생의 수학 성적이 여학생보다 높다.[8]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대에 여자가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분명 여자는 절반에 가까운데 말이다.


보영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정원은 보영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참 힘들게 살고 있구나 싶었다. 여자란 짐이 참 무거워 보였다.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자기가 노력하면 한 여자쯤은 그 무게를 가볍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쉬이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1] 마녀사냥: 종합편성채널 jT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 주로 연애, 특히 성과 관련된 시청자들의 사연을 다룬다.
[2] 그린라이트: <마녀사냥>에는 “그린라이트를 켜줘”라는 코너가 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정말 호감이 있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다루는 코너다. 사연을 듣고 사회자들이 호감이 있다고 판단하면 자신들 앞에 놓인 초록색 불을 켠다. 이 불을 “그린라이트”라고 한다. ‘사랑의 직진 신호’라는 의미다. 용례로, “그린라이트다.”는 “상대방도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대쉬해도 된다.”는 의미다.
[3] 둘리야 학교가자: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화에서 원식과 정원이 소주를 마시며 짜파게티를 먹던 그 술집. http://scienceon.hani.co.kr/158831
[4] 공기 함량 60% 정도의 여자목소리: 박진영에 따르면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이상적인 비율은 “공기 반 소리 반”이다. 여기서 공기 함량이 높아질수록 좀 더 끈적하고 야한 느낌이 나게 된다. (공기 100%는 거친 숨소리라는 걸 생각해보자.) 공기 함량 60% 정도의 여자 목소리는 온가족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섹시한 목소리다.
[5] 사수. 부사수: 군대용어다. 본래 총, , 혹은 어떤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수, 사수를 도와 같은 일을 하다가 유고시에 사수를 대리하는 사람이 부사수다. 한국 사회 뿌리 깊숙이 스며든 군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6] 공대 아름이: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 공대 여학생을 일컫는 말.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에 나오면서 널리 쓰이게 된 단어다. http://www.youtube.com/watch?v=wnPNsoWMukQ
[7] 이희정 기자, [JBC 리포트] 남녀간, 수학적 능력 차이 없다“, 미주 중앙일보,http://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59507 이 기사는 다음 논문 내용에 대한 것이다. Hyde, Janet S., et al. "Gender similarities characterize math performance." Science 321.5888 (2008): 494-495.
[8]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 2015 수능 수학, 난이도에 상관없이 남녀 성적 차이 크게 나타나”.

#5. 로또

간밤에 마신 맥주 네 병. 소주를 즐겨 마시던 정원에겐 별 것 아니다. 그래도 술을 핑계로 10시까지 늘어져 잤다. 술기운에 푹 잤다. 속 쓰림도 없다. 다만 오줌이 마렵다. 화장실로 갔다. 간밤에 걸러진 맥줏물이 한참이나 나온다. 말끔히 비워진다. 세면대로 간다. 머리를 감으려 물을 틀었다. 시원한 물이 나온다. 따뜻한 물을 틀려다가 만다. 머리를 갖다 댄다. 머리가 맑아진다. 샴푸를 손에 덜었다. 두피를 구석구석 마사지 한다. 태안 해안 기름 닦듯 모발 뿌리에 낀 기름을 제거한다. 헹군다. 흐르는 물이 푹신하다. 상쾌하다. 이번엔 얼굴 구석구석 폼클렌저를 바른다. 손가락을 모아 볼을 둥그스레 문지른다. 콧잔등도 동글동글 문지른다. 손에 물을 가득 받아 얼굴에 살포시 누른다. 몇 번 더 물을 축여낸다. 문지른다. 모공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물이 습격한다. 미세먼지만한 피지들도 모두 수갑 채워진다. 수건으로 얼굴을 지그시 누른다. 피지를 체포한 물이 수건으로 복귀한다. 모공이 뻥 뚫린다. 모공 속으로 신선한 아침 공기가 드나든다. 모시옷이라도 입은 듯 시원하다.

정원은 간밤에 대해 생각했다. 운이 참 좋았다. 뭐 그리 쓸모 있는 말을 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맥주 네 병 사준 걸로도 충분하다. 도리는 한 것 같다. 여름 아침, 햇살이 강하다. 광합성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뛴다. 면도를 하고 이를 닦는 내내 숨이 성대를 간질였다. 방으로 왔다. 아예 노래라도 틀어놓을까 싶어 스마트폰을 들었다.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모든 것이 멎었다.

MICRO[1] 데드라인이 3주쯤 남은 거 같은데,
 
정원, 지난 번에 말했던 거 구현 어디까지 됐지? 이번에 논문 제출하면 그 내용으로 8월 말에 프로포잘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다음 학기 졸업도 가능하다.
 
길영, 졸업논문 준비 중인 거 제출해보는 거 어때?

- 권대성 드림

교수님다운 메일이다. 수십 번 퇴고라도 거친 듯 간결하다.

박사과정 학생에게 “졸업 할 수 있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똑똑해도, 말 주변이 좋아도, 심지어 논문이 많아도, 졸업을 못 하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2] 대통령감과 대통령이 다른 것처럼. 누가 뭐래도 붙잡아야 하는 제안이다. 무슨 사정이 있어도.


정원은 세 문장에 불과한 자기 부분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았다. 가정문들을 제거하면 하나만 남는다. “지난번에 말했던 연구[3], 3주 뒤까지 논문 쓸 수 있겠어?
“젠장”
외마디와 함께, 정원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디어를 말씀드린 지 두 달쯤 된 것 같다. 그러니 어디까지 했는지 물어볼 만도 하다. 그런데 한 게 없다. 두 달이란 시간이 뭐가 하나 뚝딱 완성될 만큼 긴 시간은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실패라도 했어야 했다. 대체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몇 가지 기억나긴 한다. 신입생환영회도 했고, 해외출장도 한 번 다녀오고, 과제 중반보고서도 썼다. 하지만 알리바이가 불충분하다. 어쩌다 아무 것도 안 한 걸까. 후회만 차오른다. 울기라도 하면 시원할까.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정원은 생각했다. 석사 1년차 때의 자신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은 꿈으로 이뤄졌다. 정말 석사 1년차의 김정원이 꿈에 나온 것이다. 정원은 꿈인 걸 알면서도 하고 싶던 말을 퍼부었다.
김정원(4): , 제발 부탁인데 열심히 좀 해. 연구 좀 열심히 하라고. 니가 인터넷 기사 본다고 수지가 헤어지는 거 아니고, 니가 <마녀사냥> 본다고 애인 생기는 것도 아냐. 그 시간에 연구나 해. 제발. 그러다 졸업만 늦어져. 졸업은 해야 할 거 아냐. 부탁한다. ?
간곡하게 말했다. 반응은 의외였다.
김정원(1): , 진짜. 그제는 50살 김정원이 찾아오고, 어제는 40살 김정원이 찾아오더니, 오늘은 4년차 김정원이야? 내 참 기가 막혀서. , 그게 다 내 잘못이니? 너나 똑바로 해. 그 때나 똑바로 살라고. 후회하면 단 줄 알아, 진짜.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정원은 하마터면 꿈에서 깰 뻔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방금 50대 김정원을 만났다고 하지 않은가.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을 이었다.
김정원(4): , 그럼, 니가 50살 김정원을 만났댔잖아. 그 사람, 박사였니? 박사는 딴 거야? 나 졸업을 하긴 하는 거야?
김정원(1): 너 진짜 답 없다. 꿈 깨셔.
김정원(4): 그… 그런 거야? 박사를 꿈꾸면 안 되는 거야? 그래… 그럴 거면 일찍 그만 두는 게 낫겠지….
김정원(1): 아 정말 답답하네. 꿈속인 거 뻔히 알면서 나한테 뭘 물어보는 거냐고. 꿈이나 깨라고. 일어나서 출근이나 해. 이런 꿈꾼다고 박사 받는 거 아냐.
그리고 정원은 꿈에서 깼다. 11 30. 한 시간쯤 잤다. 그새 얼굴에 기름이 좀 꼈다. 세수를 다시 할까 하다 말았다. 머리만 대충 손으로 흩었다. 꿈속 김정원의 말대로, 출근 준비나 서둘렀다.


전길영(2)은 연구실에서 교수님 메일을 읽었다. 9시에 출근해 10시까지 영어단어를 외우고 10분 동안 커피를 마시며 쉰 다음 논문 읽는 시간을 가지려던 참이었다.
‘흠’
길영은 논문 읽기를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앞으로의 일정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길영도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내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논문을 한 번 제출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다른 학회나 저널에 내볼 수 없다. 길영은 좀 더 좋게 만들어서 한 번에 붙이고 싶었다. 일단 제출해 놓고 더 발전시키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하나 같이 논문 실적이 별로 없는 선배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교수님의 제안이 온 상태다. , 교수님이 내 논문에 집중하겠다는, 적어도 시간을 할애하겠다는 뜻이다. 교수님이 구현이나 실험을 대신 해주시진 않는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조금만 내주셔도 일이 훨씬 빨리 풀린다. 무엇보다 논문 라이팅[4]은 교수님이 몇 배는 빠르고 수십 배는 탁월하게 하신다. 일정을 조절하더라도 지금 기회를 잡는 게 훨씬 낫다. 쉽게 오는 기회는 아닐 것이다. 교수님께서 학교를 옮기기로 하셨으니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내년이면 다른 교수님께로 박사과정 진학을 하게 될 테니까.

길영은 원노트(ONE NOTE) 프로그램[5]을 틀었다. ‘할 일’ 탭을 클릭하고 ‘[연구] prefetch[6] 페이지를 열었다. 연구를 마치기까지 해야 할 일들이 정리되어 있다.
3주라… 3주 안에 마치려면, 5번과 6번은 포기해야 겠지. 1~4, 7~10번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11번은 논문 라이팅이니까 교수님이 도와주실 거야. 기본적인 내용은 작성해서 드려야겠지만, 그거야 다른 일 하는 틈틈이 하면 되니까… 그래도 '실험' 장과 '관련 연구' 장은 내가 완성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걸 내가 다 하는 건 불가능해.
길영은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준상에게 갔다.
전길영(2): , 혹시 이번 마이크로 논문 내세요?
강준상(4): ?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전길영(2): 교수님께서 저 지금 하고 있는 연구 논문 내볼 생각 있냐고 하셨는데, 제가 기한 내에 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형이 제2 저자[7] 해주시면 안 될까요?
강준상(4): 잠깐만… 그게 언제까진데?
전길영(2): 3주 남았어요.
강준상(4): 오케이. 그럼 잠시만….
준상은 자기 캘린더를 확인했다. 3주간 특별한 일정은 없다. 할 일 목록도 확인했다. 몇 가지가 있긴 하지만, 크게 무리되진 않을 것 같았다.
강준상(4):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뭐하면 되는데?
전길영(2): 일단 실험을 좀 돌려주세요. 제가 지금 구현을 거의 마쳤는데요, 오늘까지 테스트 해보면 끝날 것 같거든요. 끝나면 코드를 드릴게요. Gem5[8]에다 구현했으니까 형이 잘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비교군들에 대한 구현은 아직 좀 더 다듬어야 하는데, 그것도 끝내면 바로 보내 드릴게요.
강준상(4): 그거면 돼?
전길영(2): 혹시 관련 연구장도 좀 써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논문 모아놓고 요점 정리까지는 대충 해놨는데, 직접 쓸 시간까지는 없을 것 같아서요.
강준상(4): prefetch[6] 논문들이지?
전길영(2): , 형이 다 아시는 논문들일 거에요.
강준상(4): 그래? 그럼 실험 돌려놓고 찬찬히 살펴보지 뭐. 이제까지 네가 나 도와준 것도 많은데, 해줄게.
전길영(2): 고맙습니다, 그럼 지금 논문 모아놓은 거부터 보내드릴게요.
강준상(4): 그래.

길영은 돌아오자마자 교수님께 메일을 썼다. 강준상과 함께 해도 괜찮으냐는 것이었다. 거절하실 리는 없지만 허락을 구하는 형태로 썼다. 그리고 바로 스케줄을 수정했다. 3주 동안 잡혀있는 선약들을 거의 취소했다. 논문 쓰는 것과 관련된 일정들을 정리해서 넣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길영은 계획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정원이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 길영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다.
김정원(4): 길영아, 너 교수님 메일 봤지?
전길영(2): , 빠듯하긴 하지만, 한 번 해봐야죠.
김정원(4): 한다고 말씀드렸어?
전길영(2): , 준상이 형도 도와주기로 했어요. 형은요?
김정원(4): , 이제 메일 써야지.
‘저, 독한 놈.’ 정원은 생각했다. 아니다. 사실 자격지심이다. 대학원생이라면 늘 논문 제출할 거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매일 논문 두 편 쯤은 읽어주어야 하고, 네이티브가 아니라면 영어공부도 꾸준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수업을 들으면 A학점 정도는 받아주고, 과제를 한다면 기한 내에 할 일들을 마쳐주고… 제기랄.

정원은 길영이 부러웠다. 굴곡 없는, 미분 가능할 것 같은 그의 삶[9]이 부러웠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획을 실현시키는, 소프트웨어 공학 교과서[10] 같은 삶이 부러웠다.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일인데도 계획대로 되어 간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다. 아직 2년 밖에 안 했으니까, 단지 운이 엄청나게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0.000012277%. 하지만 거의 매주 1등 당첨자가 나온다. 어쩌면 정원 자신이 운이 엄청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을 하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것이니까. 그 순간 한 명이 더 떠올랐다. 그의 동기 강준상. 6년 동안 따박따박 잘 되려면 운이 얼마나 좋은 걸까. 아니, 아니 그러면 정원의 운은 대체 얼마나 나쁜 걸까?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을 둘이나 곁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정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자에 앉았다.

정원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논문을 시도해 보기로 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은 ‘제안’을 하신 것이지만, 정원에겐 ‘지시’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거절할 수 없는 거라면, 그게 ‘제안’은 아니지 않은가. 사실 특별한 사유가 있긴 하다. 진행 상황이 없었다는 아주아주 결정적 사유. 하지만 그건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구현이 많이 진행되진 않았습니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습니다.
 
- 김정원

정원은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짓말과 ‘사실 아무 것도 해놓은 게 없다’는 참말을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원은 논문을 쓰기 위해 할 일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아이디어를 구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비교군도 최소 2개쯤은 필요할 것이다. 실험도 많이 해야 한다. 관련 연구도 정리해야 한다. 실험을 동시에 많이 하려면 실험을 돌릴 컴퓨터도 많이 확보해 놓는 것이 좋다. 정원은 그제야 길영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혼자 다 할 수는 없으리라는.

정원은 보영을 찾아갔다.
김정원(4): 보영아, 어젠 잘 잤어?
전보영(2): , , 뭐… 오빠는요?
김정원(4): 너 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바쁘지?
전보영(2): 음… 사실 뭘로 바빠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좀 막막해요. 근데 왜요?
김정원(4): 아니, 바쁘면 괜찮은데,
전보영(2): 뭔데요?
김정원(4): 교수님이 마이크로 내보자고 하셨거든. 3주 남았으니까 3주만 도와주면 되긴 하는데….
전보영(2): 그래요? 오빠 마이크로 내는 거예요?
김정원(4): 못 낼 가능성이 높긴 한데….
전보영(2):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제가 뭘 도와드리면 돼요?
김정원(4): 넌 괜찮아?
전보영(2): 이거 끝나면 오빠도 저 도와주실 거잖아요, 그쵸? 그럼 괜찮아요. 뭘 하면 되는데요?
보영은 정원의 생각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왔다. 다행이다. 하지만, 정원은 그제야 자기가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게, 보영이 뭘 도와주면 되는 걸까. 뭘 도와주면 논문을 낼 수 있게 될까?
김정원(4): , 그게, 사실… 그래, 네가 뭘 하면 되는지 생각해보는 것부터 도와주면 될 것 같아.
정원은 자신이 초라해보였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전보영(2): 알았어요. 오빠, 점심은 드셨어요?
김정원(4): , 아니, 아직. 넌 먹었니?
전보영(2): 아뇨.
김정원(4): , 그래, 그럼 점심 먹으면서 얘기해볼까?
정원은 좋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오늘 내가 구현한 코드가 에러 하나 없이 짜자잔 실행될지도. 그리고 결과가 생각했던 만큼 좋게 나올지도. 갑자기 방언이라도 터져서 논문이 짜자잔 써질지도. 로또 1등은 매주 나오지만, 또한 매주 바뀐다. 이번엔 그게 내 차례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한 번 해보자. 앞으로 3주 동안은, 적어도 지난 2달처럼 흘려보내진 말아보자. 보영이도 함께이니까

[1] 마이크로(MICRO): 컴퓨터구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회들 중 하나. 정식명칭은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이며, 보통 줄여서 마이크로(MICRO)라 부른다.
[2] 학회나 저널에 논문이 실린다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엔 학위논문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심사를 받으려면 먼저 지도교수의 허락이 필요하다. , 아무리 논문을 많이 써도 지도교수가 허락하지 않으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다. 일부 교수들은 이를 악용하여 실력 있는 박사과정 학생들을 오래도록 부려먹기도 한다.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 12 <창의력> http://scienceon.hani.co.kr/187553
[4] 논문 라이팅(writing): 우리말로만 나타내면 ‘논문 쓰기’이다. 하지만 ‘논문 쓰기’는 아이디어 내기, 구현, 실험, 결과 분석, 논문 작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용례로 많이 쓰인다. ‘논문에 들어갈 문장을 작성하는 것’만을 따로 떼어 표현할 때는 ‘논문 라이팅’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국제저널이나 국제학회에 논문을 제출하는 경우에는 주로 영어로 작성하게 된다. 그래서 영어(라이팅, writing)가 포함된 단어가 자주 쓰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5] 원노트(ONE NOTE):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출시한 메모 프로그램. 여러 메모를 분리하여 관리하기도 쉽고, 다양한 형식의 자료들을 포함시켜 놓기도 쉬우며, 네트워크상에 자동 저장되어 자료를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접근 가능하다는 등 다양한 장점이 있다.
[6] prefetch: 일반적으로 중앙처리장치(CPU)에서 연산을 처리하는 속도보다 메모리에서 연산할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가 더 느리다. 따라서 처리할 데이터를 미리 예측하여 중앙처리장치(CPU)에 가져다두면 연산을 더 빠르게 수행할 수 있다. 이를 prefetch라고 한다.
[7] 2 저자: 여러 명이 함께 연구한 결과물을 논문으로 쓰는 경우, 공헌도가 높은 순으로 저자 이름을 기재한다. 2 저자는 두 번째로 공헌도가 높은 저자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제1 저자가 절반 이상의 공헌을 한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특히 학교에서 낸 논문의 경우, 1 저자만큼이나 마지막 저자도 중요하다. ‘내가 이 연구를 전체적으로 지휘했다’는 의미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지도 교수는 공헌도와 관계없이 마지막 저자로 이름을 올린다. 길영이가 준상이에게 논문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제 2저자로 이름을 올려준다고 한 것은 논문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선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의미가 된다.
[8] Gem5: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시뮬레이터의 한 종류.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직접 제작하는 데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된다. 따라서 연구할 때는 직접 제작하는 대신 그 동작을 흉내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성능이나 전력효율 등을 추정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다. 그래서 프로그램 전체를 새로 제작하는 대신,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가져다가 일부분을 수정해서 원하는 기능들을 구현하고 테스트해본다. Gem5는 그러한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http://www.gem5.org/
[9] 미분 가능할 것 같은 그의 삶: 미분이 가능하려면 그래프 상에서 모나게 꺾어지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 , <’ 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려놓은 모양은 미분이 불가능하고 ‘/’나 ‘(’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려놓은 모양은 미분 가능하다. ‘미분 가능할 것 같은 그의 삶’은 ‘크게 모난 구석 없이 평탄했던 그의 삶’이라는 의미다.
[10] 소프트웨어 공학 교과서: 소프트웨어를 개발은 제조업이다. 따라서 기일을 맞추면서 품질을 보증하는 것도 중요하고, 유지보수도 중요하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은 창의적인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작소요 시간 추정, 효과적인 분업, 품질 보증, 유지보수 등등이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했다. 그것을 ‘소프트웨어 공학’(Software Engineering이라고 한다. 물론 언제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존재한다. ‘소프트웨어 공학 교과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분업이 완벽하게 되고 기일도 맞출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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