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4일 금요일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시즌2 11~15화)/김창대


#11. 놀이

엠티(MT) 뭐 있나. 술이지.
공부 밖에 모르는 놈.[1] 공대생들이 흔히 받는 오해다. 하지만 혼자 노는 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이들이다. 게임만 해도 종류가 몇 가진가. 웹툰은 포털 별로 몇 십 가지다. 예능이라면 공중파, 종편, 케이블을 가리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엔 국적도 없다. 자막이 올라온 것에 한해서지만. 뛰어난 컴퓨터 실력과 연구하라고 깔아준 인터넷망이 결합하면, 눈 감을 새가 없다. 지름신 영접이 취미인 이들도 있다. 전 세계 블로거들과 함께라면, 은행에서 이자 받을 새가 없다. 소셜네트워크도 있다. 새 소식의 파도와 공유의 쓰나미. 스크롤엔 끝이 없다.

하지만 엠티는 막막하다. 함께 가니까. 다 같이 뭐 하고 노나. 스타크래프트로 대동단결 하던 시절도 지났다. 모두가 안 봤지만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도 없다. 엠티를 테크노마트로 갈 수도 없고, 함께 모여 페이스북만 보기도 그렇다. 그러니 결국 술 먹는다.

여수로 엠티 가는 길 정원, 준상, 보영은 출발하자마자 대형마트부터 들렀다.
김정원(4): 뭘 사야 하지? 술부터 사면 되나?
정원이 카트를 끌며 앞장섰다. 왼쪽 입구로 들어가서 끝까지 직진, 과일 코너가 나오면 바로 좌회전.
전보영(2): 오빠, 어떻게 한 큐에 여기로 와요?
강준상(4): 허구한 날 왔으니까 그렇지.
김정원(4): 아니야, 저 위에 다 표시돼 있잖아. 그거 보고 온 거야.
강준상(4): 솔직히 말해봐. 너 여기 몇 번째 오는데?
김정원(4): 몰라, , 술이나 담아.
보영이도 있는데 그런 걸 굳이 밝혀서 뭐하나. 정원은 여섯 개 들이 소주 한 세트를 담더니 한 세트를 더 집어 들었다.
전보영(2): 오빠, 뭘 이리 많이 사요!
김정원(4): 모자라는 것보단 낫지 않아? 우리 엠티 가면 맨날 중간에 술 사러 가잖아.
강준상(4): 그렇다고 사람이 6명인데, 소주를 12병을 사?
김정원(4): 먹기 시작하면 또 엄청 먹잖아.
전보영(2): 오빠… 그래도….
김정원(4): 여기서 사는 게 싸단 말이야.
강준상(4): 너 남으면 싸갈려 그러지?
김정원(4): 아니라고! 거기 가서 사면 비싸서 그렇다니까.
합의가 어려운 게 여야가 따로 없다. 결국 소주는 6병만 샀다. 다음은 맥주. 이번엔 정원이 날치기를 했다. 1.6리터들이 피처 6개를 담았다. 이것도 부족하단다. 절제하는 거라고 했다. 준상과 보영은 사람의 다양성을 느꼈다.

먹을 것도 잔뜩 샀다. 구워 먹을 돼지고기, 상추, 깻잎, , 마늘 등 각종 고기의 반찬들, 안주 삼을 비빔면과 골뱅이, 아침으로 먹을 3분 카레와 라면, 해수욕장에서 먹을 과자와 과일까지. 누가 그랬나. 엠티는 ‘먹고 또 먹고’의 약자라고.[2]


같은 시각, 길영은 정길, 국현과 함께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차와 함께 메탈 음악이 달렸다. 운전 중인 정길이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길영은 뒷자리에 앉았다. 다음 주에 있을 박사과정 면접이 걱정된다. 속으로 영어 자기소개를 준비했다. 쓰면서 하면 금방 정리할 것 같다. 그러지 못하는 게 짜증났다. 핸드폰이라도 꺼내서 적어볼까 하다 관뒀다. 형들이 유난 떤다고 할 것 같았다. 할 땐 하고 놀 땐 놀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게 쿨한 거라고 한다. 그런데 ‘놀 때’를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놓았잖아. 왜 내가 지금 놀아야 하는가. 나에겐 지금이 ‘할 때’인데.

대체 엠티는 왜 가는 걸까. 작년엔 뭣도 모르고 따라 갔다. 근데 별 거 없더라. 낮에 대충 물놀이나 하다가 술이나 진탕 먹고 오더라. 단합은 무슨. 누구 한 명 주사라도 부려야, 그거 놀리는 재미에 단합되는 정도다. 대체 엠티는 뭘까? 교수님의 유흥을 돕기 위한 자리일까? 일과시간에 합법적으로 놀기 위한 행사일까? 중간에 도망 못 가게끔 멀리 가서 하는 회식일까? 단결을 가장한 수당 없는 야근일까? , 우린 원래 야근 수당 없지.

마침 대화도 끊겼겠다, 길영은 눈을 감았다. 메탈이 귀를 찌른다. 잠이 안 온다. , 귀찮아. 멍하니 바깥이나 봤다. 시간 참 아깝다.
심정길(3): 길영아, 졸리면 자도 돼.
전길영(2): 아녜요.
김국현(3): , 우리 뭐 먹을까요?
심정길(3): 글쎄, 이왕 여수 가는 건데, 거기 맛집 없나?
국현이 핸드폰으로 부지런히 검색을 한다.
김국현(3): , ! 게장 어때요? 황소식당[3]이라고, 여기 게장백반이 맛있다는데요.
심정길(3): 그래? 게장 좋지.
김국현(3): 길영아, 넌 어때?
전길영(2): 저도 괜찮아요.
김국현(3): 그럼 형, 여기로 갑시다. 게장 죽이겠다.
학교 근처 맛집이 질려서 엠티를 가는 걸까? 길영은 생각했다.


게장은 완벽했다. 숟가락을 입에 넣자마자 게살이 숟가락을 타고 혓바닥으로 슬라이딩 한다. 아밀라아제가 미끄러지는 게살의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미각세포와 짝을 지어준다. 미각세포가 그들의 매끄러운 몸매에 환호성을 지른다. 이어서 매콤 달콤한 양념장이 오케스트라를 연주해준다. 웅장함에 입천장이 압도된다. 게살과 미각세포 커플들이 제각기 탱고를 춘다. 꼭 끌어안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안았다가, 풀었다가. 혀가 노래를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쌀밥을, 원했던, 이 순간~[4] 노래를 들었는지, 하이얀 밥이 들어온다. 어금니가 잘게 부수어 준다. 달짝지근함이 입 안 가득 퍼진다. 그제야 입천장이 긴장을 푼다. 둑 터지듯 침샘이 터진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단 하나다. 다음 숟가락이 들어오는 것.

모두 공깃밥을 두 그릇씩 비운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길영도 먹는 순간만큼은 즐거웠다. 식당에서 나가는데, 정원을 마주쳤다.
김국현(3): ? 대박.
김정원(4): , 너네 여기서 밥 먹었어?
전보영(2): 우와, 진짜 대박이다.
심정길(3): 뭐야, 같은 블로그 본 거야?
김정원(4): 우리 구글 검색했는데,
김국현(4): 검색은 구글이죠! 여기가 다섯 번째쯤 나오잖아요.
김정원(4): , 맞아. 그 쯤 됐던 거 같아. 여튼, 대박이다.
심정길(3): 여기 너무 맛있더라. 안 그래도 너네 밥 안 먹었으면 여기로 오라고 하려고 했어.
먹는다는 건 음식과 나, 둘만의 교감이다. 나만의 쾌락이다. 하지만 그 교감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 그것은 놀이로, 유흥으로 승화된다. 한 대상에 대한 서로의 감동을 나누는 일. 음식을 먹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먹방, 쿡방을 푸드포르노로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5] 그럴 거면 ‘출발 비디오 여행’[6]부터 비판하시라.

서사는 보통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다.[7] ‘기’는 웬만하면 재밌다. 새로운 인물과 배경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전’도 재밌게 마련이다. 이야기꾼의 비장의 무기가 나오는 것이니까. 서사는 ‘전’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붙이느냐의 문제다.[8] ‘전’에 빠져들고 나면 ‘결’은 자연스레 흘러간다. 문제는 ‘승’이다. ‘기’와 ‘전’을 대체 어떻게 이어야 한단 말인가. 쓰는 입장에서도 힘들고, 읽는 입장에서도 가장 재미없다.

연구실 엠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길이 재미없긴 힘들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술자리도 웬만하면 재미있다. 어떤 모임이든 입담 좋은 친구 한 명과 놀리기 좋은 친구 한 명, 주사 부리는 친구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니까. 다 같이 한 번 취해버리고 나면 그 다음은 자연스레 흘러간다. 자고 일어나 라면으로 해장을 하면 된다.

문제는 ‘승’, 첫째 날 오후다. 엠티 장소에서 술판을 벌이기 전까지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매번 새롭고 좋은 걸 찾아보고자 노력하지만 늘 실패한다. 한국 정치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나 두어 시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말했지 않은가. ‘승’이 쓰는 입장에서도 힘들고 읽는 입장에서도 재미없다고. 그러니 그냥 넘어가자.

시침과 분침이 쭉쭉이를 하는 시간[9], 정길이 숯을 올렸다. 한 여름 태양은 아직 왕좌를 뺏기지 않았다. 바닷물을 쭉쭉 빨아올려 대기로 흩어놓는다. 공기가 말랑말랑하다. 기체이길 포기한 것 같다. 전해질까지 가득 머금었다. 내 몸에 더 가까운 습기다. 물놀이를 마치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었건만, 어느새 덜 마른 빨래를 입은 느낌이다.

준상이 고기를 꺼내온다. 정원과 보영은 야채를 씻는다. 국현과 길영이 밥을 전기밥솥에 안치고 반찬들을 테이블 위에 앉힌다.
강준상(4): 엄청 끕끕하네요.
김국현(3): 아오, 안 되겠다. 형님들, 시원한 맥주 하나 꺼낼까요?
김정원(4): 아직 안 시원해졌을 텐데….
김국현(3): 아무렴 이 날씨보단 시원하겠죠.
전보영(2): 벌써부터 술이에요?
김국현(3): 인생 뭐 있냐, 술 한 잔에 넘기는 게 인생이지.
강준상(4): 어이구, 시인 납셨네.
모두 웃는다. 국현이 맥주를 꺼내온다. 종이컵에 한 잔씩 돌린다. 자신도 마신다.
김국현(3): 키야. 산이 좋으니 술이 술술 넘어가는 구나.
김정원(4): 연구도 이렇게 술술 넘어가면 얼마나 좋겠냐.
심정길(3): , 여기까지 와서 연구 얘기 할래?
김정원(4): 하하, , 죄송해요.
심정길(3): 즐겁게 노는데 왜 우울한 얘기나 하고 그래?
펜션은 산중턱에 있었다. 앞으로는 바다가 빙 둘러 보이는, 묏자리로 좋을 것 같은 위치였다. 바비큐장 옆으론 텃밭이 있다. 주인아저씨가 뭔가를 따고 있다. 간만에 보는 1차 산업의 현장이다. 디스플레이로 둘러싸인 3차 산업의 현장을 떠나와서 자급자족의 생태계를 바라보고 있자니 도()라도 깨칠 것 같다.

주인아저씨가 다가왔다. 손에 쥔 고추 몇 개를 내민다.
주인장: 이거 여기서 키운 건데 고기랑 같이 먹더라고. 깻잎도 키우긴 하는데, 심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먹잘 것이 읎어. 고추는 저기 거시기하면 이따 더 다 먹고 그러라구.
심정길(3): 어유, 감사합니다.
김정원(4): 저희가 깻잎은 사왔거든요, 딱 고추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가 인사를 했다. 주인아저씨는 집으로 들어가셨다.


목살이, 삼겹살이 익어간다. 이제와 다이어트라도 하려는 듯 기름이 흘러나온다. 불이 뜨겁게 타오른다. 핏기를 남김없이 지워버린다. 고기는 생명의 흔적을 잃는다. 음식이 되어 간다.

처음 올린 고기가 다 익었을 때쯤, 야채 씻기도, 상차림도 끝났다. 정길만 계속 고기를 굽고, 나머지는 앉았다. 준상이 첫 고기를 상으로 날랐다. 국현이가 낼름 정길 옆으로 간다.
김국현(3): , 이제 앉아서 드세요. 제가 구울게요.
심정길(3): 먼저 먹어. 난 여기서 먹을게.
김국현(3): 에이, 그래도, 맏형이 고기만 굽고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먹어요.
심정길(3): 난 남의 손으로 구운 고기 못 먹어.
김국현(3): 저도 고기 좀 구워요. 회식할 때 몇 번 드셔보셨잖아요.
심정길(3): 알았어. 이따 팔 아프면 바꿔달라고 할 게.
국현은 기어코 쌈을 하나 싸서 정길의 입에 넣어줬다. 다른 이들도 먹기 시작했다. 정원은 상추에 깻잎 깔고 고기 한 점 얹고 파와 마늘까지 얹어 쌈을 싸먹었다. 얇시리 하게 생긴 매운 고추에 쌈장 가득 찍어 한 입 깨물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렉기타 두 대에 이펙터 가득 걸어 연주하는 짜릿한 메탈 같은 쌈이었다. 보영은 고기만 하나 큼직한 걸로 입에 넣었다. 기름장조차 거부했다. 정확하게 불과 고기, 그 둘의 결합만을 즐겼다. 통기타에 목소리만 얹은 포크를 즐겼다.

고기를 굽던 정길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심정길(3): , 나중에 이런 펜션 하나 짓고 살면 좋을 것 같지 않냐?
김국현(3): 벌써 노후 계획 세우시는 거예요?
심정길(3): 그냥, 주인아저씨가 부러워서 그래. 이런 공기 좋고 물 좋은데서 여유롭게 사는 거. 얼마나 좋아. 텃밭에서 이런 저런 작물이나 키우다가, 놀러오는 사람들 한 번씩 재워주고 돈도 벌고. 아까 그 여유 봐봐. 고추 더 따다 먹으라고. 아등바등 살질 않잖아.
김정원(4): 그건 그래요. 으아, 나도 연구 때려치우고 여기서 살고 싶다.
심정길(3): 인생 뭐 있냐. 늘그막에 편히 놀려고 젊어 고생하는 거지.
김정원(4): 이런 펜션은 얼마나 할까요?
심정길(3): 그러게. 월급쟁이로 은퇴할 때까지 모아서 이런 펜션 하나 살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대기업에 들어가서 정년까지 버텼는데 키울 자식도 없고 봉양할 부모도 없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심정길(3): 국현아, 나 술이나 한 잔 더 갖다 줘라.
김국현(3): 어이쿠, 여깄습니다.
결론은 술이다.
고기를 양껏 먹고 나서 방으로 옮겨 이어진 술자리. 오늘의 희생양은 정원이었다. 정길이 챙겨온 화투가 화근이었다. 화투 하나에 사람이 여섯이니 웬만한 게임은 무리였다. 그래서 화투 로또[10]를 했다. 돌아가면서 화투장을 하나씩 뽑다가, 미리 정해둔 번호의 화투가 나오면 술 한 잔을 마시는 게임이다. 술을 마신 사람이 다음 번호를 정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연속 네 번을 보영이가 걸렸다. 정말 몰카라도 찍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정원이 흑기사를 한 번 해줬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판부터 정원만 걸렸다. 댓 번 걸러 한 번쯤 다른 사람이 걸렸다. 정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로또라도 사러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편의점은 멀고 다들 취해서 운전을 못하는 게 한이었다.

자꾸 마실 순 없으니 쉬었다 마시자며 벌주를 빚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판에 또 걸렸다. 빚만 10잔이 넘어갔다. 급기야 부채탕감 개념이 도입됐다.
김정원(4): 아잇, , 내가 병샷하 테니까아, 열 짜늘 이거로 퉁쳐주라. 안 되냐?
정원이 몸치가 되어버린 혀를 애써 놀리며 말했다.
심정길(3): 정원아, 형 있다. 큭큭큭
김정원(4): , 죄소압니다. 혀님, 좀 퉁쳐주십숍.
심정길(3): 푸하하하, 너한테 형님 소린 또 처음 듣는다. 오키오키, 퉁 쳐줄게! 다들 괜찮지?
모두 웃겨죽었다. 정원은 소주가 병맥주라도 되는 양, 병째 들고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결국 많이 샀다던 술을 다 비워냈다. 정원은 계속 헛소리를 하면서도 난리는 치지 않았다. 치우는 걸 돕지 못해 미안하다고 스무 번쯤은 중얼거리면서 곱게 누워 잤다.

쓰레기만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모두 재밌었다고 되뇌었다. 길영도 간만에 웃긴 구경 좀 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결론은 술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결국, 늙어서는 놀고 싶다는 거다. 늙어서 놀려면 젊어서 고생 좀 하라는 거다. 사실 속임수다. 우리는 대학 가면 놀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고등학교 때 고생하고, 취업하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대학 때 고생하고, 은퇴하면 놀 수 있다는 말에 속아 회사에서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인생의 목표는 결국 노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놀지 못 한다. 그러다 혼자 노는 법을 잊어버린다. 스마트폰뿐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노는 법을 잃어버린다. 술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1] 공부밖에 모르는 놈: “공부밖에 모른다”와 “다 남자다”라는 두 가지 편견이 동시에 녹아 있다.
[2] 엠티(MT)는 원래 “Membership Training”의 약자다. 직역하면 “회원 연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친목과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 1박 이상의 길이로 놀러 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논다는 건 술을 먹거나 음식을 먹는 것이 핵심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MT’가 ‘마시고(M) 토하고(T)’ 혹은 ‘먹고(M) (T) 먹고’의 약자 취급을 당할 때도 있다.
[3] 황소식당: 여수시 봉산남3 5 (봉산동)에 위치한 게장 전문점. 게장백반 단일 메뉴만 판다. 1인분에 8,000원이고 2인 이상만 판매. , 언제 또 가지… 쩝
[4]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노래를 패러디 했다. 해당 부분의 원래 가사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이다.
[5] ‘먹방’은 ‘먹는 방송’의 약자로 연예인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침 흘리며 지켜봐야 하는 방송들을 말한다. ‘쿡방’은 ‘Cook 방송’, 즉 요리하는 방송을 의미한다. 요리하는 모습으로 침샘을 뜨겁게 달궈 놓고 ‘먹방’까지 보여준다. 이런 방송들은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남김없이 자극한다. 이를 일각에서는 ‘푸드포르노’라는 격한 표현으로 부르기도 한다. 맛칼럼리스트 황교익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http://interview.hankookilbo.com/v/c607ba4cca144794a8a7caf36db10589/#1004 )에서 “쾌락을 끌어와야 하는데 먹는 것 만한 게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사먹거나 해먹을 형편이 안 된다. 해서 찾는 게 먹방·쿡방, 즉 음식 포르노다. 뛰어난 모방 본능으로 인간은 음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에게서 쾌락을 얻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시아경제의 이규성 기자는 관련 기사(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120907214443689 )에서 “내년에는 양의 해다. 내년에도 다른 이들의 식탐에 행복해 할지, 또 다른 욕망의 관음이 판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밝고 건강한 사회를 반영한 문화 소비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라며 먹방을 ‘욕망의 관음’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6] 출발 비디오 여행: MBC에서 19년째 장수하며 방영되고 있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 홈페이지는http://www.imbc.com/broad/tv/ent/video/proinfo/index.html
[7] 기승전결은 만화에도 널리 쓰이는 서사 구조다. 네 컷으로 이루어진 만화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웹툰을 중심으로 기승전결의 구도를 깨는 세 컷 만화나 두 컷 만화도 나온다. 세 컷 만화로 배진수 작가의 <하루 3>(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644180), 두 컷 만화로 작가 마인드C 2차원 개그(https://www.pikicast.com/#!/menu=userpage&section=0&uid=4737913)가 있다.
[8] ‘전’을 만드는 것도 무엇을 어떻게 부치느냐의 문제다.
[9] 오후 6시를 의미한다.
[10] 화투 로또: 술자리에 사람은 많은데 화투는 한 벌만 있을 때 재미있게 (그리고 빠르게) 술 마시기 좋은 놀이다. 본문에 간단한 설명이 나와 있지만, 여기서 자세히 설명한다. 화투 각 장에는 1~12까지의 숫자가 지정되어 있다. 이 중 하나의 숫자를 정한다. 그리고 화투를 섞고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화투를 한 장씩 뽑는다. 그러다 처음에 정한 숫자의 화투를 뒤집는 사람이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장씩을 뽑았는데도 정한 숫자의 화투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한 바퀴를 더 돌게 되는데, 이 때 걸린 사람은 두 잔을 마셔야 한다. , 한 바퀴를 돌 때마다 한 잔씩이 추가된다. 술을 마신 사람이 다음 판의 숫자를 정하고, 자신부터 시작한다. 화투에 있는 조커 카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조커 카드를 뽑게 되면 그 때부터 술이 한 잔 추가되는 것이다. 이러면 생각보다 술잔이 빨리 늘어난다. 정말 운이 없으면 소설 속의 정원이처럼 소주 병샷을 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실제로 병샷을 목격한 적이 있다.

#12. 찌라시

정원이 깼을 땐, 끓는 라면에서 나온 증기가 정원의 코털을 촉촉하게 적신 뒤였다.

밤새도록 바이킹이라도 탄 듯 속이 울렁거린다. 그런데도 위는 여전히 꿀렁꿀렁 댄다. 정말 기분 나쁘다. 하지만 위의 입장도 생각해 달라. 가뜩이나 제 몸을 잔뜩 불려 음식물을 받아낸 그다. 홑몸 가누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럼에도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 밤새도록 음식물을 휘젓고 녹여서 장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아직도 산더미다. 혹시 토를 하면 안 되겠냐고 식도 쪽에도 노크해봤다. 돌아오는 건 열심히 삼켜낸 침뿐이었다. 소화액이 부족한 게 아니란 말이다. 공간이 부족한 거란 말이다. 곤란한 건 장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같아선 위를 돕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미 융털 사이사이까지 꽉 채워둔 상태다. 배출을 안 해주는 데 어쩌란 말인가. 물량이 워낙 급하게 들어와서 물 흡수도 제대로 못 한 상태다. 부피만 더 커졌다. 밤새도록 항문 초인종을 열심히 눌렀다. 하지만 잠든 정원은 답이 없었다.

정원은 푹 잔 것 같은데도 너무 피곤했다. 몽유병으로 마라톤이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웬만한 내장기관은 죄다 해독과 소화에 동원되었으니. 잠을 잔 건 눈뿐이었다. 변의가 항문 가득 느껴진다. 방광도 팽창계수 측정 실험 중이다. 하지만 쉬이 일어날 수도 없다. 속이 너무 울렁거린다. 배에 손을 댔다. 술배에도 약손이 통할까.

정원은 눈을 살짝 떴다. 다들 일어나 있다. 자기가 누운 자리를 빼고는 이불도 다 개켜 있다. 일어나긴 해야겠다. 침을 몇 번 더 삼켰다. 목도 마르다.

강준상(4): 정원이 일어났네, 너 괜찮아?
김정원(4): 아우, 죽겠다.
강준상(4): 어서 와서 라면 먹어. 속 풀게.
김정원(4): 나 먼저 좀 씻을게.

정원은 기다시피 화장실로 들어갔다. 똥을 누었다. 양 참 많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옷을 벗었다.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바디클렌저 냄새가 정말 역겹다. 그래도 안 씻을 순 없다. 겨우겨우 씻었다. 찬물을 계속 맞았더니 정신이 좀 든다.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 그새 보영이가 와 있다.

전보영(2): 오빠, 괜찮아요?
김정원(4): , 샤워했더니 쫌 괜찮아졌어.
전보영(3): 라면 좀 드세요. 떠드릴게요.

보영이가 라면을 덜어주었다. 국물을 가득 담았다. 정원이 몇 숟갈 떴다. 피곤에 절어 있는 위장에게 박카스라도 먹이는 느낌이다.

김정원(4): 아우.
김국현(3): 속이 좀 풀려요?
김정원(4): 그래도 좀 낫다 야. 근데 밥 없냐?
강준상(4): 어제 먹고 남은 거 있어. 떠주리?
김정원(4): 아냐, 내가 뜰게. 어딨는데?
전보영(2): 오빠, 그냥 있어요. 제가 갖다 줄게요.


보영이가 밥도 한 그릇 떠다 준다. 정원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속이 울렁거려 움직이기조차 싫었으니까.

먼저 라면을 먹고 있던 국현이가 말을 건다.

김국현(3): , 어제 소주로 병샷 한 거 기억나요? 크크크.
김정원(4): 기억나지. 덕분에 지금 죽겠는데.
김국현(3): 우와, 그렇게 먹고도 필름이 안 끊겼단 말이에요? 형 대체 주량이 얼마에요?
강준상(4): 정원이는 자기 주량이 얼만지 모를 걸? 끝까지 가봤어야 알지.

대체 주량이란 게 뭘까? 기준이 뭘까? 주량만큼 마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그것을 주량이라고 하느냔 말이다. 필름이 끊기는 것? 토하는 것? 그 사람 고유의 주사가 나오는 것?

김정원(4): 근데, 주량에 시간 개념이 도입됐잖아, 한 시간에 한 병 하는 식으로,[1] 근데 거기에 반감기까지 도입하면 주량 모델이 잘 나올 거 같지 않아?
김국현(3): ?
김정원(4): 술을 계속 마시면 그게 쌓이니까, 나중엔 빠른 속도로 못 마시잖아. 그러니까, 처음 한 시간엔 두 병을 마실 수 있다고 하면, 그 다음 한 시간 동안은 한 병을 마실 수 있고, 그 다음엔 반 병만, 뭐 이런 식으로. 사람에 따라 반감기가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두 시간일 수도 있고. 이렇게 하면 겁나 좋은 모델이 나올 것 같지 않냐?
심정길(3): , 정원이 아직 술이 덜 깼나 보다.
김정원(4): 아니, 주량이란 게 결국 간이 알코올 해독을 하는 능력이잖아요. 간이 알코올을 해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전에 들어온 알코올부터 분해해야 하니까… 아, 그러면 처음 한 시간 동안 주량 이하의 술을 마시면… 이월을 시켜야 하나?
김국현(3): 이 정도면 신종 주사네요. .
김정원(4): 알았어, 그만 하면 될 거 아냐.
전길영(2): 근데, PL 수업[2] 어때요?

길영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본인의 입장에선 뜬금없지 않았다. 누가 무슨 얘길 하든, 길영이는 다음 학기 수업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강준상(4): 너 다음 학기에 수업 듣게? 너 마지막 학기잖아.
전길영(2): 졸업하려면 들어야 해서요.
강준상(4): 너 소프트웨어 분야 아직 안 들은 거야?

꿈꾸는 대학교의 전산학과 대학원 수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석사 학위를 따려면 각 분야에서 최소한 한 과목 이상을 들어야 한다. 의도는 선하다. 폭 넓은 지식을 갖게 해주겠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귀찮다. 그래서 길영이처럼 마지막 학기가 돼서야 부랴부랴 듣기도 한다. 

전길영(2): . 그 중엔 그나마 PL이 낫다던데요.
강준상(4): 교수가 누군데?
전길영(2): 김호진 교수님이요.
심정길(3): 나 그 분 수업 들어봤는데, 수업‘은’ 괜찮아.

정길은 유독 ‘은’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전길영(2): 그 분이 어떻길래요?
심정길(3): 너 정말 몰라? 거기가 전설의 투-티오-제로-학생(Two T.O, Zero 학생)[3] 연구실이잖아.
전길영(2): 그게 뭐에요?
심정길(3): , 우리 매해 석사 신입생 들어오면 연구실 별로 티오(T.O.)가 한 명씩 나잖아. 일부 연구실만 두 명씩 받을 수 있고. 그런데 어느 교수가 두 명씩 데려가느냐를 강의평가를 기준으로 정한단 말야. 근데 김호진 교수가 수업은 진짜 열정적으로 잘해. 학부생들한테도 친절하고. 그러니까 티오(T.O.)가 웬만하면 두 명씩 나오는 거지. 하지만! 실제론 한 명도 못 받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이 지원을 안 하니까. 그래서 거기 외국인 학생이 많은 거 아냐.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간 사람들….


보영이 보탠다.

전보영(2): 거기 올해도 누가 들어갔다가 3일 만에 교과석사[4]로 돌렸대요.
심정길(3): 그래? 그 정도면 진짜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친군거지. 교수님이 수업을 잘 하면, 이미지가 좋아가지고 속아서 들어가는 학생도 많거든. 근데 거긴 하도 소문이 파다하니까,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질 않잖아.
전길영(2): 뭐가 어떻길래 그래요?
심정길(3): 일단 박사 진학할 거 아니면 석사는 무조건 3년 해야 되고, 박사는 최소 6년 이상 해야 된대. 그 전에는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 졸업을 안 시킨대.
전길영(2): 논문이 있어두요?
심정길(3): 논문이 많으면, 더 많이 쓴 다음에 졸업하라고, 그래야 본인한테 이득이라고 그런 소리한다던데. 거기다 무조건 9시 출근 9시 퇴근이래. 토요일 출근은 기본이고.

정원도 거들었다.

김정원(4): 저도 들었는데, 그 교수, 자기 대학원생들이랑 면담할 땐 엄청 비꼬면서 말한대요. 실실 웃으면서 막 무시하는데, 진짜 기분 나쁘다고.
전길영(2): 진짜요?

길영의 질문은 옳다. 이 소문들 중에 얼마나 진실일까? 아니 먹은 고기에 냄새 안 난다[5]고 죄다 소설은 아닐 것이다. 아마 김호진 교수는 큰소리치기 보다는 웃으며 말하는 성격일 것이다. 하지만 비꼬면서 말한다고 확신할 순 없다. 같은 말이라도 비꼬는 걸로 듣는 사람도 있고, 좋게 좋게 웃으며 얘기하는 걸로 듣는 사람도 있으니까. 석사과정에 3년이 걸리고 박사과정에 6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교수가 허락하지 않아서일까? 학생이 게을렀을 수도, 연구 분야의 특성상 오래 걸렸을 수도 있다. ‘투-티오-제로-학생’도 마찬가지다. 한 번쯤은 그랬겠지. 하지만 몇 번이나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교수의 인격 때문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PL은 원래 인기 없는 분야니까. 더군다나, 이런 소문들 때문에 학생들이 기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와전됐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이런 소문들 때문에 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런 말을 했다지 않은가. “유명인의 사진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고 해도, 인터넷에서 본 것을 다 믿지 말라.[6]

김국현(3): 근데, 그래도 우리 과는 좀 나은 거 같아요. 전자과 염석진 교수 알죠? 제가 거기 얘기를 좀 들었는데….

국현은 말끝을 흐렸다.

심정길(3): 뭔데, 뭔데?
김국현(3): 그 교수는 면담할 때마다 진짜 히스테리 부리고 인신공격 하고 난리도 아니래요. 남자애들도 면담 갔다 오면 눈물 뚝뚝 흘린다던데요.
김정원(4): . 진짜?
김국현(3): 거기가 반도체 설계 하는 연구실이잖아요. 매일 자기가 설계한 코드를 공용 서버에 올려야 되는데, 교수가 매일 검사해서 양이 적으면 막 지랄한대요.
김정원(4): 매일 코드 올린 걸 본다고? 매일 보고서 써내라는 교수는 들어봤어도….
강준상(4): 뭘 만들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냐? 진짜 양을 본대?
김국현(3): , 몇 줄이라 그랬더라, 여하튼 몇 줄 이하면 어제 뭐한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그런다던데, 그래서 거긴 논문 볼 시간도 없대요. 무조건 앉아서 코드만 짜야 한다고.
심정길(3): 코드만 짜고 앉아 있으면 논문이 나오나?
김국현(3): 그러니까 더 윽박지르는 거죠. 애들만 불쌍하지. 진짜 대박인 건요,


모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더 자극적인 소식을 기다렸다.

김국현(3): 그 연구실에 완전 천재 학생이 한 명 있었대요. 논문거리를 계속 만들어 내더래요. 근데 교수가 그걸 뺏어서 다른 학생한테 줬다는 거예요. 글쎄, 그 학생은 저자에서 아예 빼버렸대요. 흔적도 안 남기고.
전보영(2): 아예요? 일저자(논문의 첫 번째 저자)만 뺏긴 것도 아니고요?
김국현(3): 아예 뺐다니까. 그것도 세 번이나 그랬대.
김정원(4): 세 번이나? 
김국현(3): , 그래서 학생이 결국 못 견디고 전과를 했대요.
김정원(4): 전과를 했다고? 연구실을 옮긴 게 아니라?
김국현(3): 그 교수가 학과에서 힘이 세 가지고, 다른 연구실에서 받아주질 않았대요. 교수가 전과하는 것 가지고도 엄청 지랄했는데, 다행히 그 학생이랑 다른 과 학과장이랑 연줄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서 겨우 옮길 수 있었다고….
강준상(4): 그래, 누가 교수끼리 사이 틀어지려고 연구실 옮긴 학생을 받아주겠어.
김정원(4): 그 학생도 대단하다. 논문거리를 세 개나 만들고, 자기네 학과도 아닌데 학과장이랑 연줄도 있고….
전길영(2): 아니, 그런데, 논문 뺏어서 왜 다른 학생한테 줘요? 교수 입장에선 어떤 학생이 쓰든 똑같지 않아요? 다 자기 이름도 들어 갈 거 아녜요.[7]
김정원(4): 그러네, 저기 윗분들처럼 자기가 일저자를 가져간 것도 아니고.[8]
강준상(4): 혹시 졸업생 숫자 채우려고 하는 거 아닐까? 졸업 늦어지는 학생이 많아지면 교수 평가 깎인다고 들은 거 같은데.
김국현(3): , 맞아요. 그 교수가 뺏은 걸 졸업할 때가 된 학생들한테 줬대요.
심정길(3): 이야, 이거 완전 찌라시 수준인데.
전보영(2): 진짜 너무했다….

흔히 증권가에서 유통되는 사설정보지를 ‘찌라시’라고 한다. 누가 어떤 식으로 만드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구독료는 몇 백만 원 수준으로 비싸다고 한다.[9] 하지만 비싼 구독료가 무색하게시리 널리 퍼지는 내용도 있다. 연예계 정보다. 누가 누구랑 사귀고 누구의 성생활이 방탕하고 등등 쓰잘데기 없는 내용들이 각종 메신저로 멀리 멀리 퍼진다. 그런데 왜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증권가 사설정보지에 실릴까? 어떤 연예인이 선배에게 욕을 하는 것과 증시의 등락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대학원 찌라시는 어떤가? 어떤 교수가 욕을 하고 어떤 교수가 학생 논문을 빼앗아 가는 것을 공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약자들간의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비정상적인 교수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 교수들이 자연도태 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학생들은 찌라시 속 등장인물들을 돕지 않는다. 혀 몇 번 차는 것이 전부다. 교수들을 도태시킬 수도 없다. 티오(T.O.)는 모든 교수가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그리고 신입생은 자퇴보다는 버티는 걸 선택한다.



증권가 찌라시나 대학원 찌라시나 술집의 과자안주일 뿐이다. 할 말 없을 때 씹는 것이다.

강준상(4): 그 학생은 왜 논문 세 개 뺏길 동안 가만있었대? 바로 옴부즈퍼슨이나 그런 걸로 찔렀으면 되는 거 아냐?

과자안주는 보통 식감이 부드럽다. 쉽게 씹으라고.

심정길(3): 찌른다고 뭐가 되는 줄 아냐. 찌르면 뭘 어떡할 건데?
강준상(4): 교수 징계 내리고 논문 저자 다시 바꾸고 해야죠.
심정길(3): 학교에서 과연 국제저널에다 대고 “우리 학교에서 이런 쪽팔리는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저자 좀 수정해 주십쇼” 할까? 전과하는 것도 한참이나 막았다잖아.
김정원(4): 처음엔 뺏기는 게 뭔지도 몰랐을 수도 있어. 교수가 학생 모르게 다 처리했겠지.
심정길(3): 그래, 심한 데가 얼마나 많은데. , 지금 우리 연구실에서만 있어서 모르는 거야.
김정원(4): 그 연구실이, 없어질 예정이란 게 문제죠.

듣기 싫은 이야기는 편집해야 제 맛이다. 국현이 정길의 말을 이어갔다. 

김국현(3): 맞아요, 얼마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 안 봤어요? 인분 교수 이야기요.[10]
심정길(3): 아니, 뭔데?
김국현(3): 디자인과 교수 이야긴데, 세상에, 자기 학생한테 똥, 오줌을 먹였대요.
심정길(3): ? 그 인분이 진짜 그 인분이었어?
전길영(2): 어우, 비위 상해.
김국현(3): 심지어 그게 다른 학생들 거였대요.
전보영(2): 우리 밥상머리에서 꼭 이런 얘길 해야 돼요?

정길은 상을 둘러봤다. 다들 다 먹은 상태다.

심정길(3): 에이, 다 먹었네 뭐. 그럼 다른 학생들은 거기 협조했다는 거야? 진짜 어른들이 왕따를 하면 별의 별 기적을 다 행하는구만.
김국현(3): 여학생도 한 명 있었다는데요.
강준상(4): , 토 나와. 진짜 단체로 미친 거 아냐?
김정원(4): 그러면, 그 다른 학생들은 자기가 싼 거 받아다가 그 학생한테 줬다는, 그런 말이야? 난 누구 앞에 내 꺼 내미는 것만 생각해도 토 나온다. 진짜 미쳤네.


보영이 일어나 냄비를 싱크대로 옮겼다. 이미 먹은 것도 올라올 지경이다. 설거지나 해야겠다.

전길영(2): 아니, 근데, 그 사람들 심리는 뭘까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길영의 말은 문자 그대로 ‘질문’이었다. 마술사에게 “어떻게 빈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올 수 있죠?”라고 묻는 그런 것이었다. 현상이 보이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려는 과학자적 습관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거여야지. 이 질문에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약간 흐른 뒤에야 정길이 입을 뗐다.

심정길(3): 처음엔 약한 걸로 가다가 점점 심해지지 않았을까? 처음엔 재떨이나 좀 던지고 그랬겠지. 그러다 이거 저거 해보다가….
김국현(3): , 맞아요. 방송에도 그렇게 나온 거 같아요.
심정길(3): , 왕따도, 처음엔 그저 천 원, 이천 원 뺏다가, 나중엔 만 원, 이만 원 뺏고, 그러다 막 때리고, 그렇게 발전하잖아.

오해마시라. 정길은 왕따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모자를 비어 보이게 만든 다음, 숨겨놨던 비둘기를 날리는 법”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다.

강준상(4): 그런데 말야, 그 피해자도 좀 맹한 데가 있다거나 좀 그러지 않았을까?
김정원(4): ,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강준상(4): 아니, 왕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왕따가 되는 경우는 없잖아. 뭔가 사소하게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긴 하잖아. 말투가 좀 여성스럽다거나.[11]
김정원(4): 그래서 지금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거야?
강준상(4):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그 학생들 중에 왜 하필 그 사람이 피해자가 됐느냐를 생각해 본 거지.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분석은, 객관화는, 툭하면 잔인해진다. 준상은 단지 “모자 속에 숨길 수 있도록 비둘기의 성장을 막는 법”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정원은 열 받았다. 그에겐 인분 교수나 준상이나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길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싸우자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심정길(3): 자자, 준상이도 피해자가 잘못한 건 아니라니까, 이제 그만하고 먹은 거 좀 치우자. 집에 가야지. 정원이 너도 다 먹었지?

정길이 일어나 아직 국물이 남아 있는 그릇을 집어 들었다. 싱크대에 있는 보영에게 갖다 주었다. 그릇을 갖다 주는 데 물이 살짝 튀었다. ‘수압이 너무 센 거 아냐?’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수압은 정말 센 거였다. 보영이 물을 세게 틀어 놓았으니까. 보영은 오빠들의 말이 정말 듣기 싫었다. 왕따. 그 말 때문이다. 보영도 당했던 그 왕따. 보영은 아직도 궁금하다. 왜 자기한테 그랬던 건지. 왜 하필 자기였는지. 그들은 과연 대답해줄까? 어떤 대답을 해줄까? 과연 그 어떤 대답이, 합리적일 수 있을까? 보영은 확신했다. 저 중엔 왕따를 당해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정원도 당해보지 않았을 거라고. 저렇게 순수하게 화를 낼 수 있다면, 아마 사랑받고 자란 사람일 거라고.



정원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짐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폭음을 해야 했는가?’ 물론 게임 규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 과음이라고 느끼면서도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가?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직 게임을 끝내면 안 된다는 분위기. 아직 너는 더 마실 수 있다는 분위기. 아직 네가 더 마셔서 웃겨주는 게 우리를 위한 길이라는 분위기. 사회생활 하다 보면 억지로 마실 일도 많을 텐데 지금은 웃으면서 마시는 거라는 그런 분위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분위기.

정원은 소름이 돋았다. 분위기가 잘못 과열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보다 주량이 약한 사람이 계속 걸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매년 한 번쯤, 엠티에서 폭음하다 학생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 엠티에 참가한 사람들 중 그러려고 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원 찌라시는 증권가 찌라시와 다르다. 늘 처절한 약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비슷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학원 찌라시는 증권가 찌라시와 같다. 반응이 같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한 뒤, 말줄임표, . 왜 그럴까? 반민특위[12]가 해체된 뒤부터 생긴 민족 특성 때문일까? 징병제로 인해 군대문화가 유일한 공유 문화가 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류의 생존 본능 때문일까?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더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찌라시의 내용처럼. 
 
[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15. 백조 http://scienceon.hani.co.kr/198424
[2] PL(Programming Language, 프로그래밍 언어): 컴퓨터는 기계어(0 1로만 구성됨)만 이해할 수 있다. 기계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좀 더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만들고 이 언어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 언어와 프로그램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때 사용하는 언어를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하고, 약어로 PL이라고 한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는 생각 외로 수학이 많이 쓰인다. 그래서 수학은 안 좋아하고 컴퓨터만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진입장벽이 있다. 중요한 학문이지만 딱히 돈이 될 만한 분야는 아니어서 기업에서도 인기가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 프로그래밍 언어 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가 많지 않아 학생들이 접해 보기조차 어려운 측면이 있다.
[3] 티오(T.O.)는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 “배정인원”이라는 뜻이다. ‘투-티오-제로-학생(Two T.O, Zero 학생)’은 “두 명을 배정 받았는데 0명의 학생이 실제로 들어왔다”는 의미다.
[4] 교과석사: 보통 석사학위 과정은 학위논문을 작성해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대신 수업을 더 듣는 것으로 대체해서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존재하는 학교도 있다. 이 때 받는 학위를 ‘교과석사’라 한다. 교과석사 과정을 밟는 학생은 특정 연구실에 소속되지 않아도 된다. ‘교과석사로 돌리다’는 말은 ‘특정 연구실 소속에서 빠져나와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의미다. 물론, ‘교과석사’가 ‘논문석사’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5] 아니 먹은 고기에 냄새 안 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의 고기 버전이다.
[6] 당연히, 에이브러햄 링컨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다음 사이트에 정말로 링컨 사진 옆에 해당 문구가 쓰여 있는 그림이 있다.
http://weknowmemes.com/2012/07/dont-believe-everything-you-read-on-the-internet/
[7] 본문의 찌라시에 대한 설명은 찌라시 수준의 정보이다. 회자되는 내용이지만 근거는 없다.
[8] 공대, 적어도 컴퓨터 계열에서는 교수 혼자서 논문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구현이나 실험 등 해야 할 일의 양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이 첫 번째 저자이더라도, 교수가 공저자로 이름만 올린다면 모두 교수의 실적으로 인정해준다. 교수의 첫 번째 역할은 학생을 연구자로 키워내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학생이 논문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수의 실적이 올라가는 것은 합당하다.
[9] 박수지 기자, “정진엽 복지장관 후보자, 제자들 석사논문 ‘가로채기’ 의혹”, 한겨레, 2015 8 7.
[10] SBS <그것이 알고 싶다> 997: ‘쓰싸’와 ‘가스’- 인분 교수의 아주 특별한 수업 (방송 일자 : 2015. 8. 8 () 11:10)
[11] 소설 속 인물의 말은 작가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말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말투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말투가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다분히 성차별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유전자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대 구조를 무시한 채로 남성의 말투를 규정하고 여성의 말투를 규정하는 행위죠.
[12]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 조직의 활동상은 영화 <암살>에서 그려낸 것과 같다. 권력이 정의를 앞선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각인시켜준 위원회다.
#13. 두려움

“자네, 박사는 왜 하려는 건가?

면접관으로 앉아 있는 세 교수 중 한 명이 물었다. 길영은 준비한 대로 답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꿈이었습니다. 컴퓨터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면서, 컴퓨터 그 자체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의 작동 원리가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석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더 많이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석사과정은 단순히 배우는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릴 적 꿈이 되살아났습니다. 컴퓨터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다시 제 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프로그래머를 꿈꾸지는 않습니다. 컴퓨터 자체를 발전시켜서, 새로운 컴퓨터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더 심도 있는 연구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다야?

가운데 앉아 있던 교수가 길영의 말을 끊었다.

“네?

말을 끊어놓고는 그게 다냐고 묻다니.

“그게 다냐고. 요즘 애들은 하나 같이 거짓말쟁이인 건지, 아니면 순진하고 멍청한 건지. 솔직하게 좀 얘기해봐. 평생 수입의 총합을 계산해보니까 박사를 따는 게 낫기 때문이라든가, 석사 따봐야 어디서 인정도 못 받으니까 한다든가, 이왕이면 박사님 소리 들으면서 살고 싶다든가, 아니면 또 뭐야, 지금 취업하긴 무서우니까 학교에서 몇 년 더 삐대고 싶다든가, 군대 가기 싫어서 전문연구요원으로 편하게 처리하고 싶다든가, , 엄청 많네. 뭐 이런 진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너 같은 애들이 들어와서 교수 눈치나 살살 보고 그러다가 데이터 조작하고 그러는 거라고. 알어?

감정 섞인 말투였다. 왜 하필 자기 차례에 이러시나? 길영은 억울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정말로 컴퓨터를 발전시키는 것이 제 가슴이 뛰는 일이기 때문에….

“아니면 창의력이라도 있던가. 어떻게 다 똑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냐? , 지겨워.

교수의 표정이 구겨진다. 길영은 구겨져서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느낌이다.

“자, 다시 한 번, 솔직하게 얘기해봐. 박사는 왜 하는데?

길영은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2주가 걸렸다. 자신이 왜 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2주 내내 고민했다. 그 결과를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이유를 대라니.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석사를 해보니까 논문 쓰는 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내가 컴퓨터 발전에 기여한다는 생각에,

“야, 됐어! 나가봐. 창의력도 없는 애들을 데리고 무슨 논문이 나오겠어. 이런 애들 다 떨어뜨려야 돼. 안 그래요 교수님?

질문하던 교수가 양 옆의 교수에게 물었다. 한 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 명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의미는 같다. 이런 애들 다 떨어뜨려야 한다는 거다. 세 분이 나란히 종이에 뭔가를 적는다. 손짓을 보니 ‘X’ 같다.

길영은 당황했다. 분명 박사면접은 똥만 안 싸면 합격이라고 했다.[1] 성적이 나쁘면 잔소리를 좀 듣는 경우는 있으나, 별 거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심장이 싸하게 식는다. 온 몸의 땀샘이 차갑게 운다. 정말, 떨어지는 건가? 혹시 받아주기로 했던 교수님이 내친건가? 그럼 어떡하지? 다른 학교 대학원을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취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지금 매달려보기라도 하는 게 맞겠지? 아까 뭐가 솔직한 이유랬지? 군대랑….

“안 들려? 그만 나가 보라고.

길영은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뭔가가 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조교!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해!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길영은 일어나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대로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길영은 한 발짝을 떼고 있었다. 다음 순간, 발을 헛디뎠다. 넘어졌다.

“악!


정신을 차렸을 때, 길영은 침대 밑에 있었다. 꿈이었다. 넘어진 게 아니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박사면접 날 아침 6 50분이었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다. 기쁨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씻고, 정장을 입고, 준비한 자기소개 멘트를 읊조렸다. 꿈속의 교수가 현실엔 없기를 바라면서.

바람은 이루어졌다. 길영의 면접은 별 탈 없이 끝났다. 교수님들은 빤한 질문만 하셨다. 대답을 대충 듣더니 나가라고 하셨다. 길영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됐다.



보영은 잘 잤다. 하지만 걱정은 더 컸다. 아직 자신을 받아준다는 교수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련 분야 교수님들은 모두 연락드려 보았다. 하지만 확답은 못 들었다. 한 분은 남는 티오(T.O.)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연구실의 석사 학생이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려고 한다고 하셨다. 다른 한 분은 되도록 추가 인원은 안 뽑으려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보영의 면접도 별 탈 없이 끝났다. 교수님의 관점에서는.

“어유, 예쁜 여학생이네.

면접관이 ‘인사’를 했다. 보영은 예감이 안 좋았다. 애써 좋게 생각하려 했다. 외모도 스펙이라고, 어느 랩퍼도 말했으니까.[2]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교수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말을 이었다.

“어이구, 수업도 열심히 들었네. 딱 부러진 여학생이구만. 그래, 석사 졸업 논문은 뭐에 대해 쓰려고 하지?

‘딱 부러진 여학생.’ 칭찬으로 쓰는 말이다. 조금 전에 ‘예쁜 여학생’ 소리만 안 들었다면 보영도 칭찬으로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히, 자신이 남자였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똑똑하다, 혹은 성실하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 그래도 칭찬으로 넘겨야겠지. 여기선 민감해지면 안 된다.

석사 졸업 논문 주제는 선배들이 이야기한 단골 질문 1번이었다. 보영은 준비한 답변을 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연구가 별로 되어 있진 않으니까. 전문가인 교수님들 눈엔 단점이 죄다 보일 것이다. 그래가지고 석사는 따겠느냐고 혼나면 어떡하지?

“음, 그래요. 혹시,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동답서문이 나왔다.

“네?

회사 면접 때 이런 질문이 곧잘 나온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박사과정 면접에서 들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생각해보니 남자선배들하고만 면접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여자 선배를 찾아서 물어봤어야 했던 건가. 그런 과정이 필요했던 건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급하게 답할 땐, 가장 솔직한 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당분간은 계획 없습니다. 지금은 남자친구도 없고요.

“그래요. 잘 했어요. 박사과정은 가장 집중해서 연구해야 하는 시기에요. 근데 여학생들이 중간에 결혼을 하고 나면 집중을 못 하더라고. 집안일 한다고 저녁 되면 꼬박 꼬박 집에 가버리지, 주말엔 얼굴도 안 비추지, 애라도 생기면 휴학까지 해버리니까. 진득허니 연구할 시간이 없는 거야. 이게 또 연구 주제가 생기면 제때 제때 논문을 써 줘야, 어디 저널에 붙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졸업만 무한정 늦어지잖아. , 본인 졸업만 문제야? 그 연구실 입장에서도 논문거리 하나 놓치는 게 된단 말이야.

보영은 아득해졌다. 아무리 어른들의 특기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꼰대질하는 거라지만, 왜 지금, 왜 내가, 왜 이딴 말들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이게 또 졸업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우리 학교가 국가지원금을 얼마나 받는지 알아? 보영 학생을 비롯해서, 이게 다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라고. 그렇게 박사를 땄으면, 연구소 같은 데 가서 계속 열심히 연구를 해줘야 되잖아. 그게 보답하는 길 아냐. 그런데 여학생들은 하나 같이 몇 년 만에 그만 둬버리고 말더라고. 이게 혈세 낭비지. 안 그래? , . , 그렇다고 아이를 낳지 말라는 건 아니고, 그래, 그 임신을 해서도 흐름이 안 끊기게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이거에요. 그 얼마 전에 보니까 요즘 임신부들은 수학의 정석 풀면서 태교한다며?[3] 그럼 논문으로 태교를 하면 되겠네. 얼마나 좋아? 애가 아주 과학 꿈나무로 자랄 거 아냐. 안 그래? 허허허.

농담이라고 강조라도 하듯, 교수는 웃었다.

보영은 정말 박사를 가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지원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저런 사람들 틈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건 계산에 넣지 않았었다. 정말 이렇게라도 박사과정을 해야 하는 것인가.

“어허, 김 교수, 말이 좀 심하네.

옆에서 가만히 듣던 교수님이 말했다. 보영은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무 불편하게만 생각하진 말아요. 작년에 김 교수네 여학생 한 명이 속도위반을 해서 임신을 해버렸거든. 그 바람에 결혼한다 뭐한다 해서 휴학을 하더니, 1년 넘게 돌아오질 않고 있어. 그래서 김 교수가 요즘 좀 민감해. 학생이 좀 이해해 줘요. 논문 태교는, , 맞는 말이잖아, 안 그래요?

댐이 하나 있다. 물이 가득 차오른 댐,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댐이다. 그런데 저기서 돌을 던진다. 아주 큰 돌을 던진다. 균열에 정확히 맞춘다. 구멍이 뚫린다.

‘안 돼!’ 보영이 몸을 던져 구멍을 틀어막는다. 자신의 몸을 구겨 넣어 꽉 맞춰 끼운다. 물이 새나가면 안 된다. 수압이 세다. 아주 세다. 버틴다. 몸이 떨린다. 하지만 떨리는 게 보여서도 안 된다. 속으로 힘을 꽉 준다. 버틴다. 꽉 버틴다.

“네,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영은 대답했다.

“그래요. 말이 통하는 친구구만. 좋아요. 나가봐요.



보영은 자연스럽게 걸어 나왔다. 자연스럽게 면접 담당 조교에게 갔다. 자연스럽게 면접이 끝났다는 걸 확인 받았다. 자연스럽게 건물 구석진 곳으로 갔다. 아무도 없는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댐이 터졌다. 댐이 터지면 소리를 지를 줄 알았다. 쌍욕을 퍼부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물만 흘렀다. 댐이 아니라 눈물샘만 터졌다. 더 기분 나빴다. 여자라서 우는 것 같아서.

김 교수네 학생 이야기, 보영도 들었다. 남자도 같은 과랬다. 그럼 모든 남학생에게 사고치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는 걸까? 당연히 안 하겠지. 항상 여자만 도매급이지. 그리고 뭐? 세금? 세금 타령하고 앉아 있네. 정확히 하자. 세금으로 교수들 월급 주는 거다. 그 월급 때문에 강의하고 논문지도 하는 거다. 대학원생 월급은 대학원생이 과제해서 번다. 학교에서 이거 저거 제공해주지 않느냐고? 대학원생이 힘들게 과제하면 중간에 떼 가는 돈이 얼만데. 연구소를 그만 둔다는 건 또 무슨 헛소리야. 눈치로 해고하는 거 아냐. 박사까지 따놓고 애만 키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4] 아니, 대체 왜 내가 여기서 여자를 대표해야 하는 건데. 난 학생이라고, 여학생말고, 학생!

너무 안일했다. 더 두려워했어야 했다. 더 단단히 마음먹고, 더 단단히 대비하고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멋지게 대꾸하는 것까진 못했겠지. 그래도 귓등으로 흘려 듣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훌훌 털어버리고 걸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영은 더 울었다. 여자같이 울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대놓고 박사 가지 말라고 한 건 아니니까. 제 딴엔 진심어린 조언일  것이다. 본인의 경험 통계에 의하면,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피해의식은 실제 피해사례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보영은 자신도 그 사례 중 하나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느꼈다.

면접이 끝났다. 길영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됐다. 보영의 두려움은 이제 시작됐다.



엎드려 자던 정원이 눈을 떴다. 베고 잔 왼팔이 너무 저리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무겁다. 엎드린 채로 왼팔만 책상 밑으로 뺐다. 오른팔로 왼팔을 주물렀다. 조금씩 왼팔이 내 팔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주 띵하다. 허리도 아프다. 다리도 저릿하다. 오른손으로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을 봤다. 8시다. 한 시간이나 잤군.

흔히들 점심을 먹고 나면 식곤증이 온다고 한다. 엄밀하지 않은 가설이다. 일어나서 두 끼째를 먹고 나면 식곤증이 오는 것이다. 정원은 늘 느지막히 일어나 점심을 첫 끼로 삼는다. 그래서 오후엔 식곤증이 없다. 대신 저녁을 먹고 나면 꼭 한 번씩 정신을 잃곤 한다.

겨우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보영이 없다. 박사 면접이랬는데,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 면접 보느라 고생했으니 오늘은 방에서 쉬겠지.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을 열었다. 몇몇 후배들이 박사 면접 후기를 올려놓았다. 보영은 잘 봤을까. 그래야 할 텐데.

어쨌거나 보영인 내일이나 올 것 같다. 다행이다. 그렇다면 실험 결과는 오늘 밤 안으로만 확인하면 충분하다. 보영과 함께 하던 그 연구[5]의 실험결과 말이다. 어차피 교수님은 요즘 별 신경을 안 쓰시니 괜찮다. 하지만 보영이 눈치가 보인다. 자기가 연구를 얼마나 안 하는지를 알아챌 수 있으니까. 명색이 박사 4년찬데, 쪽팔리기도 하다. 어쨌거나, 오늘 퇴근 전에만 하면 오늘 논 게 티가 안 날 테니….

사실 별 이상이 없다면 어제쯤 끝났어야 하는 실험이다. 하지만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 지난 번[5]처럼 중간에 멈췄을 수도 있다. 그러면 고쳐야 한다. 정상적으로 끝났다면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좋지 않다면 그 이유를 분석해야 한다. 결과가 잘 나왔다면 다음 실험을 구상해야 한다. 논문 쓸 궁리도 해야 한다. 당장 순서도라도 그릴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정원은 자잘한 업무, 자잘한 정리를 먼저 했다. 요일별로 봐야 하는 예능부터 봤다. 밥 때 되면 밥이 우선이었다. 졸리면 못 이긴 척 잤다.

두려워서다. 중간에 멈췄다면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결과가 안 좋다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가 너무 막막하니까. 결과가 좋다 해도 이것으로 논문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쓴다고 해도 어디 저널에 붙기는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려우니까. 경험을 기반으로 예측컨대 좋을 리가 없으니까.

정원은 다시 모니터를 쳐다봤다. 페이스북이 열려 있다. 의미 없는 휠 굴리기를 시작했다. 눈은 글을 봤지만 머리는 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굴리기도 지겨워질 무렵, 국현이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 옆으로 구레나룻이 깔끔하게 밀려 있다.

 김정원(4): ! 내일 입소[6]라더니, 너 머리 깎고 온 거야?
 김국현(3): 머리는 아까 오후에 깎았고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시죠.
 김정원(4): 그래! 환송회는 한 번 해줘야지. 크크, 술 마시러 가면 모자 벗은 거 한 번 보여주는 거지?

정원은 잠시 실험 결과를 생각했다. 하지만 국현이는 내일부터 한 달이나 못 볼 건데, 환송회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훌륭한 핑계다.
 
김국현(3): 알았어요. 근데 보영인 없어요?
김정원(4): 오늘 면접 본다더니, 연구실에 안 오네.
김국현(3): 쉬나보죠, .
김정원(4): 내가 연락 해볼게.
김국현(3): 에이, 쉬게 놔두세요. 어차피 한 달만 갔다 오는 거….
김정원(4): (국현의 머리를 힐끗거리며) 그래도 좋은 구경은 시켜줘야지.
 
국현은 옆방에 있던 준상, 정길, 길영도 불러 모았다. 예고 없이 모았지만, 모두 모였다.
 
남정네들은 치킨이 맛있는 맥주집에 자리를 잡았다.
 
김국현(3): (정원을 바라보며) , 보영인 온대요?
김정원(4): , 곧 나온대.
심정길(3): , 너 총은 사놨지?
김국현(3): ? 총을 왜 사요?
심정길(3): 너 훈련소 들어갈 때 총 사가야 되는 거 몰라? 피엑스(P.X., 군대 내 매점)에서 사면 바가지 엄청 쓴단 말야. 밖에서 사가야 되는데… 벌써 밤인데 어떡해.
김국현(3): 진짜요? 아씨, 군대 물품으로 바가지 쓰기 싫은데…. 어떡하지? 형은 어디서 샀어요? 내일 아침에 일찍 문 여는 데 없어요? …… 라고 말하길 기대한 거예요? 아유, , 개그가 너무 식상하잖아요. 그 정도는 이미 조사 끝났다구요.
심정길(3): 에이, 안 통하네.
김정원(3): , 좀 과하게 옛날 개그다 싶었어요.
김국현(3): 그런 거 말고, 좀 제대로 된 도움말 좀 주세요. 가면 뭘 조심해야 돼요?
심정길(3): , 군대 간다니까 무섭냐?
김국현(3): 아뇨, 그건 아니고….
강준상(4): 딱 보니까 무섭구만 뭐.
김국현(3):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왕 군대를 가는데, 이왕이면 좀 잘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군생활 잘하는 팁을 좀 달라는 거죠.
심정길(3): 오케이, 나쁘지 않은 핑계야. 그런데, 맨입에?
김국현(3): 아이, . 오늘 제가 쏩니다! 됐죠?
심정길(3): , 니가 웬일이야!
김국현(3): 어차피 한 달 동안은 돈 쓸 일도 없잖아요.

당연히 국현은 두려웠다. 익숙하지도 않고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게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간 <진짜 사나이>[7]도 독파했다. 사람들을 모은 것도 겁나서다. 혼자 있으면 괜히 이상한 상상만 할까봐서. 차라리 진짜 경험담이라도 듣고 가면 좀 나을 것 같았다. 겸사겸사 술 먹고 잠이나 빨리 들면 좋고.

심정길(3): 알았어! 그럼 친히 군생활 비법을 알려주지. 일단, 줄을 잘 서야 돼! 무엇보다, 제일 앞이나, 제일 뒤로 가면 안 돼. 무조건 중간! 중간을 사수해.
김국현(3): 근데, 제일 앞은 그렇다 치고, 제일 뒤가 안 되는 건 왜 그래요?
심정길(3): 이야, 진짜 군대 안 갔다 온 티가 팍팍 나네. , ”뒤로~ 돌아!“ 몰라?
김국현(3): 아….
심정길(3): 그래, 임마. 그럼 제일 뒤가 제일 앞이 되는 거잖아. 그럼 별 거 다 해야 돼.
김정원(4): , 저도 군대 갈 때 그 말 들었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중간에 섰어요. 그랬더니 뭔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조교가 갑자기 중간을 잘라서 두 줄로 만드는 거 있죠. 그래서 제 바로 앞에 있던 애가 분대장이 됐어요. 이야, 진짜 어찌나 식겁했던지.

정길, 정원, 준상만 크게 웃었다. 국현과 길영은 분대장이 뭔지도 몰랐다. 줄반장 같은 거라고 대충 짐작했다.

정원은 다시 실험이 생각났다. 아직 결과를 열어보지 않은 그 실험 말이다. 생각해보니 국현이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과, 자신이 실험 결과 열어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비슷한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두렵고,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니 두렵고. 정원은 군복무를 마쳤다. 군대에서의 모든 두려움을 잘 이겨냈다. 그런데 왜 다시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움에 면역 따윈 없는 걸까?



“슈뢰딩거의 고양이”[8]란 유명한 사고실험[9]이 있다. 닫혀 있는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 있다. 상자는 완벽히 밀폐되어 있다. 안을 볼 수 없다. 소리나 냄새도 전혀 새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장치가 들어 있다. 이 장치가 작동할 확률은 50%. 여기서 문제.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일까, 죽어 있는 상태일까?

정답은 ‘열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상자를 열기 전에는 고양이는 50% 살아있고 50% 죽어있다. 살아있는 고양이와 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상자를 열어봐야 한다. 고양이 시체를 마주하는 게 두렵더라도 열어야만 한다. 상자를 계속 닫아둔다면, 운이 좋아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더라도, 고양이는 결국 굶어 죽게 될 것이다.
 

[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2, (10) 늪”에서 김국현이 했던 말이다.http://scienceon.hani.co.kr/292991
[2] 매드클라운(Mad Clown) <커피카피아가씨>란 노래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대학교를 졸업 후 취업서류 면접 광탈 / 외모도 스펙이란 걸 깨닫고 난 후 움직였지 당장 / 시원히 깎아버렸지 / 옛 얼굴 갖다 버렸지 / 엄만 울고 커피도 울었지 / 왜 울음이 나왔는지 몰라도”
[3] 전승민 기자, “임신부가 ‘수학의 정석’ 푼다? 엇나간 태교 문화”, 동아사이언스, 2015 8 2.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7749
[4] 오철우 기자, “엄마와 과학자, 어떤 땐 두 얼굴처럼 느껴졌죠”, 한겨레 사이언스온, 2013 2 14. http://scienceon.hani.co.kr/82709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2, (8) 직감”  http://scienceon.hani.co.kr/282571
[6] 박사학위 과정 동안에 연구하는 것으로 병역 의무를 대체하는 ‘전문연구요원’ 제도라는 것이 있다. ‘산업기능요원’으로서 병역특례업체에서 근무하는 것과 비슷한데, 근무지가 학교라고 보면 된다. ‘산업기능요원’과 마찬가지로 병영생활은 하지 않지만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은 받는다. 이 때문에 복무 도중 훈련소에 입소한다.
[7] 진짜 사나이: 매주 일요일 MBC에서 방영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연예인들이 실제 군생활을 체험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을 방송한다.
[8]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은 물리학에 불확정성을 도입했다. 예를 들면, 특정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여부를 확률로 표현한다. 어떤 방사능 원소가 붕괴되었을 확률이 50%, 아닐 확률이 50%라고 하는 식이다. 물론 관측을 하면, 붕괴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방사능 원소가 50% 붕괴된 상태이고, 50% 붕괴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한다.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이런 불확실한 설명을 싫어했다. 불완전한 물리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설명인지를 보이기 위해 사고 실험[9]을 제안했다. 본문에 설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그것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완전히 밀폐되어 밖에서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는 상자가 있다. 상자 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그리고 방사능 원소가 들어 있는 함이 있다. 이 함은 망치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 방사능 원소가 붕괴하면 망치가 떨어지게 되고, 붕괴하지 않으면 안 떨어진다. 망치가 떨어질 경우 독극물이 들어 있는 병이 깨지게 되고 고양이는 죽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 있게 된다. 방사능 원소가 1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이 50%라고 하자. 1시간 뒤에, 이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인가, 죽어 있는 상태인가?

이 질문에 대한 양자역학적인 설명은 "고양이는 50% 살아 있고 50% 죽어 있다"는 것이다. ,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물론 관측을 통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관측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는 확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걸로 보인다. 살았으면 살아있는 거고, 죽었으면 죽은 거니까. 관측을 하기 전까진 모른다니, 이 무슨 막말인가.'
바로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슈뢰딩거가 이런 사고실험을 고안한 것이다. 양자역학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쉽게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예화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 자료]
   (1)
 https://ko.wikipedia.org/wiki/슈뢰딩거의_고양이
   (2)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박규호 옮김. "슈뢰딩거의 고양이". 들녘 출판. 12-25.
   (3)
크리스토프 드뢰서 지음. 전대호 옮김. "물리학 시트콤". 해나무 출판. 191-210.
[9] 사고실험: 머리 속에서 상상만으로 하는 실험.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을 실험할 때 사용한다. 오로지 논리로만 평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극도의 논리가 요구된다. 하지만 머리만 굴리면 된다는 측면에서, 꼭 사고실험만으로 논문을 써보고 싶다. 본문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사고실험이라고 했다. 하지만 왠지 실현이 가능해 보인다. 기술이 너무도 발전해버린 탓이다. 슈뢰딩거가 제안했을 당시엔 도무지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14. 쓸모

기독교는 본래 신성하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타락했을 뿐이다. 치킨 맛도 본래 신성하다. 단지 다루는 사람이 실수했을 뿐이다. 한참을 기다려 영접한 치킨 맛이 이상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점잖게 물어보기로 했다. 치킨 맛은 본래 신성불가침이니까.

심정길(3): 저기요, 이거 치킨 맛이 좀 이상한데요.
알바생(25): ?
심정길(3): 저희 여기서 종종 먹거든요, 근데 이게 원래 이런 맛이 아닌데…. 약간 상한 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 혹시 맛이 바뀌었나요?

사실 학생들도 혼란스러웠다. 치킨이 상할 수도 있는 음식인지를 놓고 한참 토론한 뒤였다. 상했다고 확신하기엔 덜 이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점원에게 물어보자고 결론내린 것이다.

점원은 난감했다. 그의 역할은 서빙일 뿐이다. 주문을 전달하고 음식을 전달하고 탁자를 닦는다. 그는 금전출납기도 건드리지 못한다. 어쩌겠나. 점원은 주방에 다녀왔다.

알바생(25): , 그게 양념에 들어가는 재료 업체가 얼마 전에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심정길(3): , 저 혹시 맛을 좀 봐주실 수 있나요? 이게 재료 업체만 바뀌었다고 나올 수 있는 맛은 아닌 것 같아서요.

점원은 여기서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다. 치킨 값은 그가 두 시간 시급보다도 비쌌다. 원래 맛을 모르니 맛본다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머뭇거릴 수밖에.

심정길(3): 저기, 그럼 혹시 이거 만드신 분께 좀 전달해주실 수 있나요? 이게 정상인 건지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주방에 있는 사람은 정규직이다. 점원은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시간제다. 어쨌거나 점원은 다시 주방에 다녀와야 했다.

알바생(25): , 치킨을 다시 해드릴게요.
심정길(3): 아뇨, 일단 이게 맛이 정말 이상한 건지 좀 봐주시라는 건데요.

점원은 치킨 접시를 들더니 바로 주방으로 가져갔다. 그의 역할이 늘어났다. 손님과 주방 사이에서 ‘쌍방으로’ 음식과 말을 전달하는 것으로.

김국현(3): 이야, 어떻게 사과 한 마디 없냐. 그쵸?
강준상(4): 장사를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와서 확인은 해보고 이유를 설명하든가 죄송하다고 하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거칠게 항의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했다.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면 웃으면서 넘어갈 생각이었다. 계란찜 하나쯤 서비스로 주시면 좋고. 그런데 대뜸 가져가버리고 끝이라니. 학생들이 뭔가 대단한 갑질이라도 한 것처럼.



 때 보영이가 왔다.

전보영(2): 죄송해요, 방에 있다 나오느라.
김정원(4):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뭐, 면접은 어땠어?

보영은 ‘면접’이란 말을 듣는 순간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1] 하지만 오늘은 국현 오빠 환송회라는 걸 기억했다.

전보영(2): , , 그게. 뭐 그리 나쁘지 않게 본 것 같아요. 근데 아직 뭐 안 먹고 있었어요?

점원이 치킨을 가져간 통에 탁자 위엔 맥주만 놓여 있었다. 정길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보영은 화제 전환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심정길(3): 근데 너무하지 않냐? 어떻게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전보영(2): 근데요, 저 점원이 잘못한 건 없지 않아요? 저 사람은 서빙만 할 거 아녜요.
강준상(4): 그래도 손님을 마주하는 직책이면 가게를 대표해서 사과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서비스 아냐?
전보영(2): 전 모르겠어요. 저 사람도 최저시급 가까이 받으면서 일하는 걸 텐데, 저 사람이 가게를 얼마나 대표해야 하는 건지는.

보영은 자기가 너무 까칠하진 않은 건지 고민했다. 왜 고민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 밤에 일하는 건데 야간수당은 받고 있을까? 하지만 뭔가 분위기를 더 나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국현(3): 근데 형들은 군대에서 뭐했어요?
김정원(4): , 정훈병이었어.
김국현(3): 그게 뭐하는 건데요?
김정원(3): 군대 가면 정신교육이란 걸 하거든. , 우리나라가 짱이고, 북한은 언제 도발할지 모르고, 이런 거 교육시키는 거야. 그거 담당하는 간부 밑에서 일하는 건데, 워드 치고 피피티 만들고 커피 타고 컵 닦고 청소하고, 뭐 그런 시다바리했지.
김국현(3): 거의 비서 수준인데요.
김정원(3): 그치. 군대 가서 그런 거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군복무를 카투사(미군부대 한국군지원단)로 마친 준상이 말을 보탰다.

강준상(4): 결국 행정병한 거네. 편하게 다녀왔네.
김정원(4): 그걸 카투사 갔다 온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미군부대는 위병소 근무도 민간업체에 위탁하고, 심지어 눈도 안 치운다며.
심정길(3): , 진짜? 눈도 안 치우는 게 군대야?
김정원(4): 내가 물론 몸이 편했다는 건 인정하는데,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냐. 지금 우리가 박사과정 하는 게, 육체노동 하는 것보다 편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는 거잖아.

정원은 발끈하고, 준상은 깨갱했다. 물론 정원도 예비군 8년차, 이런 논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잘 안다. 하지만 멈추기는 여전히 억울했다.

김정원(4): 그리고 우리 부대에 전투병과도 같이 있었거든,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는데, “삽질은 해지면 끝나.
김국현(3): 그게 무슨 말이에요?
김정원(4): 군대에서 야외에서 작업하는 거 있잖아, 그건 해지면 끝난다고. 근데 행정병은 해져도 끝없이 작업이야.
심정길(3): 전투병들이 훈련을 얼마나 자주 나가는 지 알아? 한 달이 멀다하고 나가서 며칠씩 자고 오고 그래.
김정원(4): 아니, 전투병 힘든 건 인정하는데요, 행정병은 한 달이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이라구요.
김국현(3): 군대에서 야근을 해요?
김정원(4): 장난 아냐. 야근을 안 했던 날이 반도 안 되는 거 같은데. 특히 담당 간부가 당직근무를 서잖아, 그 날은 100% 야근이야.
김국현(3): 그렇게 할 일이 많아요?
김정원(4): 없지. 원래 군대가 전쟁이 나야 할 일이 생기는 거잖아. 평소엔 경계하고 훈련만 잘 하면 되는 거고. 근데 우리나라가 징병제라 인력이 남아돌잖아. 그러니까 안 해도 되는 걸 만들어서 엄청 시키는 거야.
김국현(3): 우리나라 이거 안 되겠구만.

이 대화를 통해 정원이 얻은 것은 다음 중 무엇인가?
① 정원의 군생활이 힘들었다는 데 대한 인정.
② 행정병의 생활에 대해 설명을 잘 한다는 인정.
③ 술자리에서 5분여 간 침묵을 막은 데 대한 인정.
④ 이런 인정들이 다 부질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


잠자코 있던 길영이 질문을 던졌다.

전길영(2): 근데, , 군대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요즘 전쟁은 그냥 핵 한 방이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심정길(3): 내가 보기엔 약간 대외 이미지용으로 하는 것도 있는 거 같아. 그래도 우리나라 군대가 60만쯤 된다고 해야 북한에서도 좀 쫄고 할 거 아냐.
김정원(4): 그래서 그렇게 할 일이 없는데도 병사들을 계속 데리고 있는 거예요?[2]인력이 남아도니까 쓸 데 없는 일을 막 만들어서 하고?
심정길(3): 그러게.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에 각 잡는 거랑 전투랑 뭐가 그리 관련 있나 싶다.
김정원(4): 저 행정병 했잖아요, 간부들이 문서 만들라고 해서 만들어 가잖아요? 내용은 한 글자도 안 읽고 양식부터 확인해요. 표에 그림자 안 넣었다고 고쳐오라 그러고, 어절 단위 줄 바꿈 안 됐다고 다시 해오라고 하고. 아주 문서에도 각을 잡는다니까요.
심정길(3): 진짜 우리도 쓸 데 없는 일 다 없애버리고 모병제 해야 돼.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병역비리 뉴스 나오는 것도 지겹지 않냐? 모병제하면 그 지겨운 뉴스 안 봐도 되잖아.
김정원(4): 맞아요. 진짜, 누가 그러던데,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난 게 징역 2년짜리 죄라고.[3]

정원과 정길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쓸 데 없는 일만 했다”고 강조하면서도,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사실 이들도 딱 한 군데의 부대에서 딱 2년의 군생활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말만 들으면 거의 군사전문가다. 종편에 나오는 여느 변호사들처럼.[4]



치킨이 다시 나왔다. 이번엔 맛있다. 물론, 기름을 갈지도 않았고, 재료를 바꾸지도 않았다. 하지만 새로 튀겨내고 양념을 두르니 새 것이 되었다.[5] 처음 나왔던 것에 무슨 실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정원은 눈치를 잠시 보다 닭다리 하나를 집었다. 뜯으려는데 앞에 앉은 보영이 보인다. 보영은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서 한 마디도 없었다. 왜 그럴까? 군대를 안 다녀온 건, 국현이나 길영도 마찬가진데.

침묵. 그것은 보영이 공대 여자로 6년째 살아오면서 깨달은 지혜다. 군대 이야기에 끼어들다 자칫 잘못된 말이라도 하면 여성을 대표해 애완견마냥 무시당한다. 성심껏 존경하고 존중해봤자 돌아오는 건 오만과 허세뿐이다. 침묵이 그나마 낫다. 가끔 “근데 여자는 왜 군대 안 가는 거냐?” 하고 먼저 도발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가끔이니까. 군대 앞에서 여자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심지어 군대 가는 사람들이 죄다 여자에게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치킨을 오물거리며 텔레비전을 보던 국현이 말했다.

김국현(3): ? 엔쥐에서 새 스마트워치 나왔네요.

모두의 눈길이 정길에게로 쏠렸다. 정길은 엔쥐를 그만 두고 박사과정에 온 지 3년째다.

심정길(3): 만든다더니, 출시했네.
전길영(2): 저기 형이 만든 프로그램도 들어가 있고 그러는 거에요?
심정길(3): 몰라. 난 연구부서에 있었어. 개발부서에서 내가 만든 걸 가져간 적은 있는데….
전길영(2): 들어 있으면 대박이겠다. 안 그래요?
강준상(4): 오히려 잠이 안 올 걸? 언제 그거 때문에 망가질지 모르잖아. 내 친구가 그러는데, 걔가 포털 업체랑 과제를 했었대. 그래서 그 결과물이 지금도 포털 사이트 깊숙한 곳에서 돌아가고 있다나봐. 그게 엄청 불안하대. 언제 그게 잘못돼서 서비스 중단될지 모른다고. 요즘도 가끔 악몽 꾸고 그러나봐.
김국현(3): 그러네, 진짜 끔찍하겠다.
심정길(3): 그래, 내 것도 아마, 개발부서에서 참고만 하고 싹 다시 만들었을 거야.
전길영(2): 뭐야, 그럼 정길이 형은 뭐한 건데요?
심정길(3): 뭘 하긴 뭘 해. 연구했지.
전길영(2): 아니, 연구해서 뭐한 거냐구요.
김정원(4): 길영아. 어차피, 우리가 연구한 거 제품으로 나오는 건 1%도 안 돼. 1%가 뭐야, 0.1%쯤 되나?
전길영(2): 아니, 그럼 쓰이지도 않을 거 때문에 몇 달 동안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김정원(4): 난 몇 년째야 인마. 난 니가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운데? 니가 논문 읽은 걸 생각해봐. 그 중에 제품으로 나온 게 얼마나 되냐?
전길영(2): 그렇긴 하네요….
김정원(4): 우리가 나름 연구를 해서 성능 향상을 시키는 거 같지만, 실제 상황에서 해보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대. 실제 제품에 반영하려면 구현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고, 만들기는 엄청 복잡한데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들 다 돌려보면 성능 향상 얼마 안 되는 경우도 많고. 그러면 차라리 안 넣는 게 나은 거지.
전길영(2): 그럼 진짜 연구는 왜 하는 거예요?
김정원(4): 몰라. 박사 따려고 하는 건가?

다들 씁쓸히 웃었다. 길영은 그제야 어제 자기가 꾼 꿈을 깨달았다.[1] 면접관이 나타나 박사를 가려는 솔직한 이유를 말해보라던 그 꿈 말이다. 꿈속의 면접관, 그러니까 길영의 무의식은 지혜로웠다. 12쪽짜리 논문 하나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몇 개로도, 몇 십 개로도 마찬가지다. 몇 백 개쯤 쓰면, 아주 약간은 바뀌겠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논문이란 게 그렇게 사소한 건 아니다. 중요한 문제 한 가지에 대해 괜찮은 해답 한 가지는 제시한다. 다만, 판이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문제 하나 풀어서는 티도 안 난다. 눈높이 수학 1년치 밀려놓고 이제 곱셉 문제 하나 푼 것 같은 느낌이 날 뿐이다.



선물을 친구에게 전달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도 즐겁다.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하지만 판을 키우면 어떻게 될까? 모두의 선물을 도맡아 배달하는 택배회사가 된다면 말이다. 누군가는 창고에 갇혀서 상자를 트럭에 싣는 일만 하게 된다.[6]그에게는 누군가를 찾아가는 기쁨도 없다. 받는 사람의 행복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저 밀려들어오는 상자를 나르고, 싣고, 나르고, 또 싣는다.

판이 커지면, 일을 쪼개면, 일이 쉬워진다. 일이 빨라진다. 경제가 발전한다. 파이가 커진다. 하지만 보람은 사라진다. 삼첩반상을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나의 쓸모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포드의 망령[7]이 망쳐놓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2 (13) 두려움 - http://scienceon.hani.co.kr/314271
[2] 실제로는 국방개혁 2020을 통해 기존의 68만 명 정도의 병력 규모를 50만 명 수준으로 줄이는 과정을 진행 중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국방개혁2020” 항목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223
[3]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난 게 징역 2년짜리 죄다.” 정말 유명한 작가가 남긴 말이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았다고 한다. 그 작가는 나다. 당신은 지금 내 작품을 읽고 있다.
[4] 송호진 기자, “패널, 이 종편 저 종편 메뚜기처럼 뛰어다닌다”, 한겨레21, 2015 3 4.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680739.html
 한 종편의 보도국 기자는 “지난해 어떤 패널이 종편에 나와 오전엔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주제, 오후엔 월드컵 주제, 저녁엔 야당의 안철수·김한길 관련 주제에 대해 말하는 걸 보고 ‘세상만사 모르는 게 없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이건 저널리즘의 모욕이다”라고 말했다.
[5] 본문의 내용은, 정말 새로 튀긴 것이니 새 것이 맞다. 하지만 헌 것을 다시 튀겨도 법적으로 새 것이 된다. 심지어 유통기한도 새 제품처럼 다시 정한다. 출처: 김종원 기자, 10년 된 치킨 팔아도 합법?…이상한 ‘유통기한’”, SBS 뉴스, 2014 10 10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626749
[6] 2014 12 6일 방영된 MBC <무한도전> “극한 알바” 편에서 하하가 체험했다.
[7] 일을 쪼개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시키는 방식, 정확하게는 움직이는 조립 라인 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자잘한 일을 하는 방식을 흔히 ‘포드 방식’이라고 부른다. 이는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만드는 공정에 적용하면서 처음으로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처음 발명한 사람은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이다. 출처: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출판. 241.

#15. 멀티태스킹
 
점심시간, 식당에 사람이 많다.

김정원(4): , 식당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전길영(2): 개강했잖아요.
김정원(4): , 벌써 9월 됐나?
전길영(2): , 수강신청은 했어요?
김정원(4): 당연히 안 했지. 이제 해야겠네.

박사 고년차인 정원에게 개강은 방학 계획표 같은 것이다. 잘 짜여 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것. 그것과 별개로 시간이 흘러갔다.[1] 수강신청이라 봐야 “논문연구”만 신청하면 된다. 수업이 따로 있는 그런 게 아니다. 그냥 “학기 중에도 연구를 계속한다는데 내 학점을 겁니다” 하는 뜻이다. 어차피 방학에도 계속 해왔던 그 연구 말이다. 지난 학기까지는 조교[2]라도 했다. 그래서 학기 중에 좀 더 바빴다. 하지만 이번 학기부턴 그마저도 안 한다.

정원은 옛날 생각이 났다. 선배들이 그랬다. 식당에 사람 많은 걸 보고야 개강인 줄 알았고, 그제야 수강신청을 했다. 옛날의 정원은 그런 선배들이 이해가 안 됐다. 10년 학교에 있었던 선배들이다. 10년째 9월이면 개강인데, 그걸 까먹는단 말인가. 그런데 이젠 자기가 그러다니. 웃겼다.

어쨌거나 줄을 섰다. 3500원에 쌀밥에 반찬까지 주는 데가 여기밖에 없으니까.

김정원(4): 근데 정길이 형은 안 왔어?
강준상(4): 왔는데, 아까 약속 있다고 나가시던데?
김정원(4): 진짜? 정길이 형이?
전길영(2): 그러게요. 정길이 형이 약속이 있다니….
김정원(4): 내 기억엔 거의 처음 같은데? 가끔 늦잠 자느라 점심을 거른 적은 있어도…. 혹시, 여자 생긴 거 아냐?
강준상(4): 맞다. 그 형 교회 다닌다지 않았냐?
전길영(2): 그럼 그냥 교회 사람 만나는 걸 수도 있죠.
김정원(4): 아니 근데, 생각해봐. 그 형, 나가서 밥 한 번 먹자고 해도 웬만하면 학교식당에서 후딱 먹자던 사람이잖아.
전길영(2): 그건 그래요. 시간 되게 아끼셨는데….

전보영(2): , 정길이 오빠가 어떤 여자랑 같이 가는 거 본 적 있는데….
김정원(4): 보영아! 그런 게 있으면 빨리 빨리 얘기를 해야지이! 언제 봤어?
전보영(2): ? 어제이긴 한데….
김정원(4): 몇 시쯤? 몇 시쯤?
전보영(2): 몇 시인 게 중요해요?
김정원(4): 생각 해봐. 요즘 교회가 몇 시에 하지? 어쨌든 오후쯤에 만났으면 평범한 교회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밤늦게 만났다면, 사귀고 있거나, 최소한 썸 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거 아냐. 그 때까지 함께 있었거나, 따로 만난 걸 테니까.
전보영(2): 아침 일찍이었는데….
김정원(4): . 그럼 뭐지?
전길영(2): 아침 일찍 만났으면 100%.
김정원(4): 그런가? ?

전길영(2): 아침 일찍 만난다는 건 정말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거죠. 교회 시작하기도 전인데,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만나는 거잖아요. 오히려 밤늦게면 모임이 어찌어찌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둘만 남고 그럴 수도 있는 거고요.
김정원(4): 이야, 역시 길영이 머리가 잘 돌아가. 그럼, 여자는 어땠어? 좀 꾸민 상태였어?
강준상(4): 질문이 너무 자세한 거 아니냐?
김정원(4): 왜 그래, 정길이 형 장가는 보내야 할 거 아냐.
강준상(4): , 정길이 형 장가를 니가 보내냐.
김정원(4): 준상아. 정길이 형 봐봐, 성실하지, 성격 멀쩡하지, 허우대 멀쩡하지, 얼굴 그만하면 괜찮지. 요즘 그런 남자 구하기 쉽지 않아. 안 그래, 보영아?
전보영(2): 오빠, 그냥 오빠가 재밌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김정원(4): 푸하하, 오케이, 인정. 요즘 어린 애들 진짜 머리 좋다니까.

몇 살이나 차이난다고. 어쨌거나, 줄 서있는 동안 잠시 즐거웠으니 됐다.



석사 졸업 학기를 맞은 길영에게 개강은 서빙 알바 하다 맞는 저녁 시간 같은 것이었다. 일이 몰려든다. 그리고 어서 끝났으면 싶다.

점심을 먹고 오는 사이 메일이 쌓여 있다. 교수님이 졸업 논문 진행 상황을 물어보신다. 수강하는 수업에서도 메일이 왔다. 첫 시간까지 논문을 하나 읽어오란다. 이 무슨 악행이란 말인가. 수강생이 너무 많아 걸러내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3] 어쨌든 졸업 요건을 채워야 해서 취소도 못한다. 졸업 사진도 찍는단다. 한나절쯤은 날리겠지. 정원도 메일을 보냈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하잔다. 원래 석사 졸업학기쯤 되면 프로젝트에서 거의 빠진다. 하지만 지금은 석사 1년차 학생이 없으니, 뭔가 역할을 해야 할 터였다.

.

한숨을 한 번 쉰 길영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많은 걸 다 하려면 멀티태스킹 능력을 최대화시켜야 한다.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은 이제 마케팅에서도 흔히 쓰이는 용어다. 중앙처리장치(CPU) 개수가 늘어난 경우나 스마트폰의 화면 분할이 가능해진 경우에 ‘멀티태스킹 능력이 높아졌다’는 용례로 주로 쓰인다.

하지만 멀티태스킹의 태생은 이런 것들과 거리가 있다. ‘노느니 다른 일이라도 하자.’ 이것이 핵심이다. 워드프로세서를 생각해보자. 사람이 ‘a’ 키를 눌렀을 때 워드프로세서가 할 일은? 커서가 있는 곳에 a를 표시하고 커서를 옆으로 옮기면 끝이다. 그리고 나면 사용자가 다시 뭘 누를 때까지 할 일이 없다. 논다. 어지간히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쳐봤자 컴퓨터가 더 빠르다. 결국 대부분의 시간 동안 논다. 이렇게 노는 시간 동안 다른 프로그램이라도 돌리자는 것이 바로 멀티태스킹이다. 그러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된다. 멀티태스킹의 기원을 사자성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주경야독’이다. 밤이면 어두워 어차피 농사를 못 짓는다. 그러니 그 틈을 타 공부하자는 거다.

하지만 길영은 노는 시간이 없다. 끊임없이 일한다. 멀티태스킹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 첫째, 머리가 놀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활용한다.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샤워를 하는 그런 시간들 말이다. 연구를 하다가 아이디어가 더 필요한 순간이 오면 길영은 바로 일을 멈춘다. 그리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밥 때가 되면 아까 하던 연구 내용을 힐끗 쳐다보고 밥을 먹으러 간다. 머리는 생각에 잠긴다. 다음 주에 있을 졸업앨범 촬영도 좋은 기회다. 어차피 여기 저기 가서 차례만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일 테니까. 그 때 석사 논문 전체 구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길영도 인간이인지라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도 활용할 수 있다. 길영은 늘 영어 단어를 10~20개 인쇄해서 책상 한켠에 둔다. 그리고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때 한 번씩 스윽 읽는다. 집중해서 읽으면 안 된다. 머리가 피로해져서 집중만 더 흐트러진다. 하지만 몇 번 읽고 나면 자연스레 머리에 들어온다. 너무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른 단어로 바꾼다. 단어 읽기가 지겨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즐겨찾기 해둔 블로그에 들어간다. 영어로 된 것들이다. 전자기기 출시 소식이나 경제 뉴스 등을 주로 읽는다. 이러니 영어 실력 닳을 일이 없다.



물론, 정원도 멀티태스킹의 개념을 안다. 그리고 길영처럼 화장실에 갈 때는 머리가 쉰다는 것도 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도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시간들을 프렌즈팝[4]을 하는데 쓴다는 것이다. 정원이 원래 좋아하던 캔디크러쉬사가와 비슷한 게임이다. 캔디크러쉬사가는 모든 판을 다 깨버렸다. 새 판이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짜투리 시간의 힘이다.

정원이 길영보다 적극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하는 -순간도 있다. 놀라지 마시라. 연구할 때다. 연구란 것이 항상 100%의 두뇌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데이터 정리를 할 때면 간단한 작업만 반복하면 된다. 때로 두뇌 활용율이 70% 이하로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정원은 나머지 30%를 멀티태스킹에 활용한다.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정원도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연구하고 남을 짜투리 두뇌를 ‘활용’할 거리부터 찾았다. 요즘 핫하다는 여성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언프리티랩스타)[5]은 어떨까? 지난 시즌은 재밌게 봤는데. 예능이긴 하지만 음악 프로그램이기도 하니 집중해서 보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음악 들으며 공부하는 것처럼 하면 되겠지 뭐.[6]

그 때, 보영이 불렀다.

전보영(2): 오빠, 이거 좀 봐봐요.

정원은 뒤돌아보면서 보영이 부른 오빠에 대해 생각했다. 이름이 앞에 붙지 않은 순수한 오빠. 그러고 보니 이 방엔 보영과 자신뿐이다. 원식이 형은 간 곳을 모르고, 국현마저 훈련소에 갔으니. 정원은 마음 속으로 헛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여자친구가 없지 가오가 없냐.[7]

김정원(4): 뭔데?
전보영(2): 국현 오빠, 훈련소 사진 나왔어요. 완전 귀엽게 나왔어요. 쿡쿡쿡.

정원은 이름이 붙지 않은, 자신을 불렀던 ‘오빠’와, 이름이 붙은 ‘국현 오빠’를 생각했다. 그리고 ‘완전 귀엽다’라는 표현을 생각했다. 그리고 보영의 옆으로 갔다. 모니터를 봤다. 수많은 훈련병들이 저마다의 활기로 화이팅 품새를 잡고 있다.

김정원(4): 뭐가 귀여워, 해외 언론에 뿌릴 북한군 사진 같구만. 근데 요즘엔 이런 포즈로 사진 찍어도 되나봐? 나 때는 되게 근엄한 표정 아니면 안 되는 분위기였는데.
전보영(2): , 그랬어요?

보영은 알 리 없는 말이다. 정원이 훈련소에 있을 때, 보영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전보영(2): 이거 편지 보내는 웹사이트 주소랑 해서 단체 메일로 보내야겠어요.
김정원(4): 나 때는 인터넷으로 편지 보내는 것도 없었는데. 군대 많이 좋아졌어.
전보영(2): 진짜요?
김정원(4): 그래, 이런 거 생긴 거 몇 년 안 됐어.
전보영(2): 지금 하나 써줘야겠다. 오빠도 쓰세요.
김정원(4): 에이, 그거 서버에 올라가기도 전에 국현이가 나올 걸. 겨우 4주 있다 오잖아.
 
정원은 군 생활을 2년 했다. 어떻게든 티를 냈다.



. 길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보영이 보낸 메일이다. 국현의 사진과 함께 웹사이트 주소가 하나 있다. 글을 올리면 국현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길영은 사진만 대충 보고 메일을 닫았다. 나중에 시간 날 때 하지 뭐.

멀티태스킹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이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해야 한다. 중요한 일이 많아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건데,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한다면 그건 노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훈련소에 간 국현을 위해 인터넷에 글을 하나 올리는 것. 보영에겐 그것이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일이었지만.

잠시 뒤, 정길이 돌아왔다. 조용히 자리로 들어가 앉는다. 앉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켠다. 카카오톡을 켠다.

‘이제 연구실 왔어요. 자기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 벌써 또 보고 싶어. ㅠㅠ’

순식간에 사라지는 1. 그리고 답장.

‘나도 오빠 얼굴이 아른 거려요 ㅠㅠ 그치만 울 오빠 연구해야지!! 보고 싶어두 꾹 참고 열심히 연구해요! 그리고 저녁 때 또 만나요!!

정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된장찌개에 불고기까지 올라온 아침상이라도 대접받는 느낌이다.

‘그래!! 오빠 열심히 연구하고, 이따 저녁때 또 맛난 거 사줄게!!
‘이따봐!! 이제 답장 그만하구 연구하기!! 예은이두 저녁때까지 오빠 보고 싶은 거 꾹 참구 있을 테니까!!

정길은 여자친구의 프로필 사진을 열었다. 입꼬리의 씰룩임을 막을 수 없다. 다들 이래서 연애하나보다. 나이 서른셋 먹고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시대가 지날수록 몸은 더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된다는데, 마음은 더 느리게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키보드를 잡았다. 연구 열심히 하라니까, 열심히 해야겠다.

정길은 문득 주변 눈치를 봤다. 준상이 키보드를 열심히 두들기고 있다. 길영은 논문만 쳐다보고 있다. 대학원 오고 나서 연구실 사람이 아닌 사람과 밥을 먹은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다들 별 신경 안 쓰는구나.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오늘 저녁엔 예은이랑 뭘 먹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너무 예쁘단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무심결에 캘린더를 봤다. . 내일 논문 발표가 있다. 이걸 왜 몰랐지? 연애에 너무 정신이 팔렸나. 읽어놨던 논문 중에 고른다 해도, 하루 꼬박은 걸릴 텐데.

그렇다고 데이트를 포기할 순 없다. 정길은 밤샘을 선택했다. 오후 중에 논문을 골라서 다시 한 번 읽어놓자. 그리고 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와서 밤새 준비하자. 막상 만나면 들어오기 싫을 텐데 어쩌지. 그래도 예은이가 통금이 있으니까….

멀티태스킹을 비롯해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전략들은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결국  일의 총량이 중요하다. 일이 절대적으로 많을 땐, 멀티태스킹은 중요치 않다. 멀티스타킹으로 졸라맨 듯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괜찮다. 정길은 연애 3일차니까. 예은의 카톡 하나면 박카스 10병 부럽지 않으니까.  

[1] iKON의 노래 <리듬 타(RHYTHM TA)> 중에 “여름 방학 계획표처럼 의미는 없음”이란 가사가 나온다. 여기서 착안한 표현이다.
[2]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5) 시간 관리 - http://scienceon.hani.co.kr/165776
[3] 전공과목의 경우 수업 정원을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기도 한다. 어차피 학과 학생들이니 수업은 들을 수 있게 해주자는 의미다. 하지만 교수의 입장에서는 너무 많은 수강생은 부담이 된다. 강의를 전달하기도 어렵고 채점도 힘들다. 그래서 일부러 학기 초에 어려운 숙제를 내거나 쪽지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수강변경 기간에 학생들이 다른 수업으로 옮겨가게 하려는 심산이다.
[4] 프렌즈팝: NHN 픽셀큐브가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을 활용해 만든 스마트기기용 퍼즐 게임. 블록들의 자리를 바꾸어 같은 블록 세 개를 이어주면 터지는 등 기본 개념은 캔디크러쉬사가와 유사하다. 하지만 블록과 판이 육각형이라는 데서 사각형인 캔디크러쉬사가와 차이가 있다.
[5] 언프리티랩스타(Unpretty Rapstar): 엠넷(Mnet)에서 매주 금요일 밤 11시에 방영하는 여성 래퍼들의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 각종 미션을 통해 랩 대결을 펼치고, 각 미션의 승자에게 음원을 하나씩 발매시켜준다.
[6] 랩을 할 때는 뇌 속의 언어중추가 음악을 관장하는 부분보다 더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러니 정원의 기대와는 다르게 음악 듣듯 흘려듣기는 힘든 방송일 것이다. 정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출처: 김형찬 기자. “랩, 음악으로 하는 말? 말로 하는 음악?” 한겨레. 2014 8 4.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649766.html
[7] 영화 <베테랑>에서 경찰 역으로 나오는 황정민의 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를 패러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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