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수신과 치국 사이
학교는 조용한데 인터넷은 시끄러운 선거철이다.
곧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원, 그리고 교육감을 뽑는다고 한다. 포털 사이트는 엄숙한 이름들로 도배됐다. 누구는 군대를 안 다녀왔고
누구는 비싼 집에 산단다. ‘공중파에 나오지 않는’ 자칭 진실들은 에스엔에스(SNS)를 떠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들어야 할’ 팟캐스트와
유튜브 방송은 밤새 봐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여론조사 결과의 퍼센티지 수치에 정치인들의 입가가 움찔움찔한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점잖게 비방을 한다. 누가 봐도 가망이 없는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공중파에서 불러주지 않는다며, 그래서
인지도가 오르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그 내용을 자극적인 제목으로 승부하는 매체들이 받아 적어 준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저녁 시간이 되자 주성이가 ‘오늘은 맛난 것 좀 먹으러 가자’며 연구실 두 방을 배회했다. 허구한 날 맛난 것 타령이다. 나,
준상, 정길, 주성이 모였다. 오븐에 구운 치킨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학교를 나서니 확성기로 뽕짝이 울려퍼진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땅값 김창대가 올리고 못난 부채 김창대가 내린다 야이야이 야들아~ 7번 좀 찍어라 1번도 짜가 2번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정원(박사4년차, 31세): 근데
저거 말이 돼? 땅값을 올리면서 부채도 내린다는 게. 경제부양과
재정긴축을 동시에 하겠다는 거 아냐.
준상(박4, 31): 아, 저거 유세하는 거였어? 곧 선거하니?
주성(박1, 27): 아따, 이 형,
인터넷도 안 하시나. 그럼 저런 뽕짝을 클럽 홍보 차에서 틀겠어요?
준상: 야, 그거 부재자 신고 언제 해?
주성: 아니, 하다못해 무한도전[1]도 안 보는 거예요? 이번에 부재자투표 없어지고 사전투표로 바뀌었잖아요.
준상: 그래? 사전투표가 뭐야? 그거는 언제 신청해?
주성: 신고 안 하고 그냥
신분증만 들고 가서 하면 되는 거예요. 공부만 하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데도 관심 좀 가지세요, 좀.
하지만, 세상이 이토록 시끄러워질 동안 우리끼리 선거 이야기를
꺼낸 것도 방금이 처음이다. 학교는 조용하다. 위병소만 넘어가면
체감 온도가 5도는 낮아진다는 군대처럼, 학교 정문만 넘어가면
세상의 소음들에서 5데시벨(dB)[2]은 낮아지는 것 같다. 모두가 포털 사이트 뉴스를 탐독하지만,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논문과 프로젝트와 새로 나온 전자기기 소식들과 걸그룹 뮤직비디오만이 회자된다.
치킨집에 도착했다.
정길(박3, 33): 주성아, 어떻게 시켜야 되냐?
주성(박1, 27): 우리가 네 명이니까…, 두 마리 시키면 되죠.
정길: 두 마리? 너무 많은 거 아냐?
주성: 원래 치킨은 한 마리가 2인분이에요, 모르세요?
정원(박4, 31): 맞아요. 두 명에 한 마리가 표준인데.
준상: 좀 많은 것 같은데….
주성: 아따, 안 남아요. 일단 시키고 봐요.
텔레비전에는 평소 같으면 야구 중계가 켜져 있을 시간인데, 지금은
뉴스가 켜져 있다. 온 나라가 응당 선거에만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것처럼 선거 이야기만을 늘어놓는다.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소식들이 들려온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면 종교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는 안 해야 한다고 한다.[3] 우리가 정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우리가 친구가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도무지 다른 할 이야기가 없어서인지, 무엇이든 시작하면 이유에 이유를 찾아야 하는
과학자들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준상이가 말을
꺼냈다.
준상(박4, 31): 근데 이번엔 누구 찍어야 되냐?
주성(박1, 27): 형, 주소지가 어디로 되어 있는데요?
준상(무관심): 응, 서울.
정길(박4, 33): 근데 현직 시장이란 사람 말이야, 그 사람 되고
나서 땅값 떨어졌다고 사람들이 엄청 싫어하던데.
정원(박4, 31): 그건 땅도 가지고 있을 정도의 부자들 이야기 아니에요?
정길(보수): 그건 그렇지, 그런데 딱히 뭐 한 것도 없지 않아?
정원(진보): 왜 없어요. 심야버스도 만들었잖아요. 그 노숙자를 위해서 온돌 깐 것도 이번 시장이 했을 걸요?
정길(보수): 난 그거 맘에 안 들던데. 왜 세금을 그런데 써야 해?
정원(진보): 그렇다고 그 사람들 찬 데 자다 얼어 죽으면 어떡해요.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서라도.
주성(실용): 에이, 형들 그러지 마시고, 과학자답게 과학 분야로 토론을 해보시죠. 노숙자가 어쩌고는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아서들 표를 줄 거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학 공약을 보고 뽑아줘야죠.
정원(진보): 근데, 뭐, 공약이
있으면 뭐해 지키기는 하나.
정길(보수): 그건 그래. 그리고 어차피 서울 시장들은 딱히 과학 정책
있는지도 모르겠던데. 대전시장쯤 돼야 과학 공약도 내는 거 아냐?
주성(실용): 이번에 대전시장 후보가 무슨 과학산업단지 조성한다는 공약을 내던데요.
정원(진보): 우리나라는 무슨 공약들이 전부 건설로 끝나는 건지 모르겠어. 과학
발전시키려면 과학단지 짓고, 패션 산업 육성 정책으로 어디 건물 짓고,
심지어 복지 정책으로 복지 센터 짓잖아.
주성(실용): 헐. 그러게. 형, 그러지 말고 우리 건설 쪽으로 진출합시다. 먹고 살려면 그게 최고네.
정길(보수): 하긴, 우리나라 세금이 건설 산업 쪽으로 많이 흘러들어가긴
하지.
준상(무관심): 근데, 어쨌거나 그럼 우리는 뭐 보고 찍어요?
주성(실용): 지난 번에 대학원총학생회에서 주소지 이전하자고 했잖아요. 그거
안 했어요?
준상(무관심): 그런 메일이 왔어?
주성(실용): 이 형 참, 사회에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아무 데도 관심이 없는 거였구나.
정원(진보): 주성, 넌 주소지 이전 했냐?
주성(실용): 저도 안 했죠.
정원(진보): 푸하하, 그래놓고 무슨 말이 많아.
주성(실용): 그거 하면 주민세인가, 그거 제가 내야 된다면서요.
정원(진보): 그거 얼마 안 할 걸?
주성(실용): 그냥 그런 거 신경 쓰기 귀찮아서요.
정원(진보): 야, 그럼 과학 정책이고 뭐고 말을 말아라.
잠시 침묵.
정길(박3, 33): 준상아, 너 학회 논문 준비하는 건 잘 돼 가냐?
준상(박4, 31): 실험 중인데, 결과가 잘 나와야 말이죠.
주성(박1, 27): 에이, 또 연구 얘기. 형들 오렌지캬라멜 까탈레나 안무 비디오[4] 봤어요? 대박이던데.
정길: 아니. 뭔데? 봐봐.
치킨을 다 먹도록 우리는 텔레비전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연구실로 돌아와서 습관적으로 열어본 포털 사이트 뉴스도 선거 일색이다. 누구는
지지율이 떨어지고 누구는 단일화에 성공했다. 기사를 하나 더 클릭할까,
그만 논문을 읽기 시작할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한다. 먼저 자신을 수양해야, 한 집안을 바르게 할 수 있고, 그 후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단계적이지 않다. 우리가 수신을 하고 있는 사이에 부모님의 벌이는 줄어들고 선거일은 다가오고 다른 나라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다.
박사과정이란 게 어찌 보면 고3 수험생처럼 자기 공부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긴 하다. 부모 봉양은 잠시 미뤄두고 “몇 년 만 더 참아. 내가 팽팽 놀게 해줄게”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해야 하는 시기다. 하지만
투표권을 가진 성인으로서, 게다가 지식을 쌓는 것이 업인 사람으로서의 책무는, 미뤄두기엔 너무 현재적이다. 당장 우리 대학 국고보조금에 대한 것이고
우리 연구실 연구비에 대한 것이고 아이스크림 가격에 대한 것이고 버스 요금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책무를 적극 감당하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느 당에 들어가 활동하거나 사회단체에라도 참여하기엔 시간이 없다. 물론 연구를 대단히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구실에
붙어 있기는 해야 하거니와, 그런 일들을 한다고 해서 남은 시간 동안 연구에 집중하게 될 리도 만무하기에. 그렇다고 투표로 세상을 바꾸자니, 내 영향력은 4000만 분의 1일 뿐이다. 내가
서울 시민이니 서울시장 선거만 고려한다 해도 844만 분의 1, 투표율이 50%가 안 되는 나쁜 상황을 가정해도 400만 분의 1이다.[5] 내 한 표로 세상을 바꿀 순 있긴 한 걸까. 투표가 아니라 여론이 세상을 바꾸는 것 같다.
물론 모두가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SNS 시대, 직접 민주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는 인터넷 시대이다. 하지만 모두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실상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흐드러지는 트윗들은 그대로 흐트러지곤 한다. 주옥 같은 트윗에 눈길이 머무르는 시간도 평소의 스크롤 속도에 좌우될 뿐이다.[6] 게다가
애초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골라 듣는 SNS에서, 내가
어느 누구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당장 나부터도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은 언팔 하곤 하는데.
무기력한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는데 나만 나이가 들고 책임이 더해진다. 생각해보니
이것이 정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내 논문, 내가 무기력해
하는 사이에, 연차만 더해지고 부모님이 나이가 드신다.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무언가는….
[1] MBC <무한도전>
2014년 5월 3일, 10일, 17일, 24일(50:50~), 31일 방영분. MBC 홈페이지(http://www.imbc.com)와 pooq(http://www.pooq.co.kr)
등에서 정당하게 다시 보기와 내려 받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2] 데시벨(decibel, dB): 소리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 상용로그에 10을 곱한 값을 사용하므로, 10데시벨이 높아지면 소리가 10배 커졌음을 나타낸다. 본문처럼 7데시벨이 낮아지는 경우 소리 크기가 약 1/3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도서관이 40데시벨, 지하철 내부가 80데시벨, 비행기 소리가 120데시벨쯤 된다고 한다.
[3] 탈무드에 있는 말이라고도 하고 소설 <카르마의
구슬>에 나왔다고도 하는데 원전은 확인하지 못 했어요.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이니까 좀 봐주세요.
[4] ORANGE CARAMEL(오렌지캬라멜) _ 까탈레나(Catallena) _ Dance Only. http://www.youtube.com/watch?v=HxZvLRPF2j0 공중파에
꾸며 입고 나와서 추는 것보다 좋다. 추천.
[5] 김연정 기자, “6·4 지방선거 노장년 유권자 늘었다”http://www.huffingtonpost.kr/2014/05/26/story_n_5390260.html?utm_hp_ref=kr-politics
[6] 심지어 사람들은 기사를 읽지도 않고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 Daniel Terdiman, “News flash: People
rarely read before tweeting stories” http://www.cnet.com/news/news-flash-people-rarely-read-before-tweeting-stories/
#7. 딸기 파티
딸기파티 시즌이다. 학생복지위원회에서 딸기를 판다는 자보가 붙었다. 교내 곳곳에 딸기를 모시고 사람들이 모인다. 점심시간을 틈타 딸기로
배를 불린다. 스마트폰을 이용하지 않은 게임들을 한다. 손수건을
돌리고 유치한 노래를 부른다. 서로 사진기 가방을 확인한 다음, 그
중 가장 비싼 사진기를 들고 나온 사람이 두어 개 남은 딸기와 수북이 쌓인 딸기 꼭지를 예술사진 마냥 찍는다.
딸기파티는 20여 년 전 딸기 값 폭락으로 인근 농가가 힘들어지자
“술 대신 딸기를 먹어주자”며 시작됐다고 한다.[1] 올해 딸기 값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쨌든 과일이라곤 과일안주 외에는 구경하기 힘든 기숙사생들에게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또 주성이다. 딸기파티를 하자고 졸랐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연구 생각이나 하라고 타박도 해봤다. 주성이는
잠시 두 귀의 달팽이관을 이었다. 한쪽 귀로 들어간 타박이 반대쪽으로 그대로 나갔다. 끝내 그 생각이 준상이를 통해 교수님 귀에 들어갔다.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이 한 마디로 연구실에서 딸기파티는 결정되었다.
주성이가 좋아한다는 죄로, 주성이와 내가 딸기를 사다가 씻기로
했다. 학생복지위원회에서 계약한 딸기를 사왔다. 제철이라서
지금 파는 걸 텐데, 썩 맛있어 보이진 않는다. 과일인 게
어디야. 물 나오는 곳이라곤 화장실뿐이니 화장실에서 박스 위 비닐을 벗겼다.
정원(박4, 31): 야, 딸기는 얼마나 깨끗이 씻으면 되는지 알아?
주성(박1, 27): 그냥 대충 씻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정원(박4, 31): 역시 너답다. 어쨌든, ‘내가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씻으면 돼.
주성(박1, 27): 그래요? 그럼 그냥 갑시다. 이거 유기농이라면서요. (딸기 박스를 들고 가려는 시늉을 한다.)
정원(박4, 31): 맞아. 그리고 여기 묻은 흙은 좀 먹어줘야 돼. 흙이 알고 보면 예방접종인 거 알지? 옛날 사람들이 건강한 게, 어릴 때 흙에 묻은 병균들을 조금씩 먹어줘서 그렇대. 미리 다 내성이
생긴 거지.
함께 웃었다. 그리고 다시 씻기 시작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만큼은 이미 지났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들, 그리고 교수님도 먹을 거니까.
정원(박4, 31): 나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주성(박1, 27): 뭐요?
정원(박4, 31): 학부 때, 딸기파티를 하는데, 친구 한 명이 딸기를 씻어 왔거든. 그런데, 딸기는 씻었으나, 배열은 흐트러지지 않았어. 물은 묻어 있는데.
주성(박1, 27): 헐. 대박. 그래서
그걸 먹었어요?
정원(박4, 31): 잘 기억 안 나는데. 다시 씻어오라고 해서 다시
씻어 왔던가? 근데, 뭐,
배열만 흐트러트리고 다시 왔는지는 누가 알아.
주성(박1, 27):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우리 껀 엄청 깨끗한데요. 무균처리래도 믿겠다.
정원(박4, 31): 푸하하. 그래,
이만하면 됐다. 가자.
연구실 전원이 모인 곳은 노천극장 근처 잔디밭이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은 아니었지만 구름 몇 점이 하늘의 예술 점수를 더해주었다. 보영이와 국현이가 김밥과 음료수를
늘어놓고 있다. 나머지는 준비해온 학교 신문을 방석 삼아 바닥에 깐다.
주성이와 함께 딸기 박스를 적당히 떨어뜨려 배치했다.
주성(박1, 27): 아, 날씨 좋고. 이런 날엔 데이트나 가야 되는데. 보영아, 넌 데이트 안 가냐?
정원(박4, 31): 야, 남자친구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아, 그새 혹시 생긴 거 아니지?
보영(석2, 25): 아니에요.
주성(박1, 27): 남자친구 아니더라도, 썸남이랑 말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2]
준상(박4, 31): 야, 교수님 전화 왔다.
일동 침묵. 준상이가 교수님께 장소를 설명 드렸다. 잠시 후, 교수님 입장. 모두가
일어선다.
대성(교수, 45): 자자, 앉어. 어이쿠, 무슨 딸기가 이리 많아.
주성(박1, 27): 둘이서 한 박스씩 드시면 됩니다.
대성(교수, 45): 아, 준상. 너도
메일 받았지. 너 아스플로스(ASPLOS)[3] 논문 됐더라.
원식(박7, 35): 이야, 아스플로스(ASPLOS)라니, 대단한데.
준상(박4, 31): 다 교수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이죠.
대성(교수, 45): 니가 열심히 했지 뭐.
보영(석2, 25): 축하해요, 오빠.
정원(박4, 31): 축하해.
축하 직후에 밀려오는 자괴감과 시기를 애써 외면했다. 이미 프로포잘도
끝낸 내 동기, 준상이는 이로써 이력서가 또 한 줄 늘어났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까지도 써넣어야 분량이 겨우 채워지는 이력서 말이다. 쓰리다. 그런데 원식이 형은 정말로 축하하는 걸까? 지난 번 술 마시러 갔던
기억이 났다.[4] 아냐, 그래도 축하는 진심이겠지. 하지만, 나처럼, 드러내지
않은 속내도 있을 것 같다.
정길(박3, 33): 아스플로스(ASPLOS)는 어디서 해?
준상(박4, 31): 터키요.
정길(박3, 33): 터키? 야, 터키
가면, 파묵칼레라고 있어. 거기 꼭 가봐라. 옛날에 가봤는데, 거기가 온천수 나오는 데거든. 죽여줘.[5]
국현(박3, 28): 거기 쉬린제 마을이란 데가 와인이 싸대요.[6]
원식(박7, 35): 나도 옛날에 학회로 터키 가봤는데. 거기 가면
꼭 케밥 먹어봐. 한국에서 파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
준상(박4, 31): (교수님 눈치를 보며) 하하, 일단 발표 준비부터 하고요.
사람들은 참 지리 정보에 능통하다. 국내, 국외를 가리지 않고 지명이 하나 나오면 그와 관련된 온갖 정보들을 늘어놓는다.
거기 사는 아는 사람 이야기, 근처 맛집들, 여기서
거기로 가는 교통정보 등등.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는 거의 없다. 준상이도 학회 일정이 있으니 몇 군데 가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는 정보가 모두 소진되기 전까지는, 주제를 바꾸지 않는다.
드디어 정보가 소진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딸기만 반복적으로 입에 넣는다. 침묵이 힘들었던 걸까, 교수님이 헛기침과 함께 말한다.
대성(교수, 45): 딸기, 이거 맛이 괜찮네. 어디서 산 거야?
정원(박4, 31): 학생복지위원회에서 파는 겁니다. 공동구매처럼요.
대성(교수, 45): 그래? 날씨도 좋은데 같이 딸기 먹고 하니 좋네. 내가 다른 교수님들한테 딸기파티 한다고 했더니, 다들 자기네도 하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주성(박1, 27): 교수님, 제가 하자고 한 겁니다.
대성(교수, 45): 알았어, 알았어.
그래,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다시 침묵. 모두가 교수님과 함께 나누어도 괜찮을 만한 대화주제를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이윽고, 다시 교수님이 입을
여신다. 안도했다.
대성(교수, 45): 그런데, 원식이.
여자친구랑 몇 년 됐댔지?
원식(박7, 35): 이제 5년쨉니다.
대성(교수, 45): 결혼 얘기 없어? 여자친구 나이도 좀 될 거 아냐.
원식(박7, 35): 그게, 졸업을 먼저 해야….
대성(교수, 45): 나도 박사과정 중에 결혼했어. 학생 때 해도 괜찮아. 결혼 준비하는 것도 힘든데, 그거 시간 내기도 좀 편하잖아. 직장 생활 하면서 결혼 준비한 친구들은 바빠서 못 해먹겠다고 하더라고.
주성(박1, 27): 맞아요, 형.
학생 때 결혼해야, 모아둔 돈 없어도 좀 이해 받고 그러죠.
심한 데자뷰가 일어났다. 회식 때마다 한 번쯤 있는 대화. 공통의 관심사며 안전한 대화 주제. 그러나 딱 한 사람만, 당사자만 속 쓰린 대화 주제다. 다들 삼촌이며 이모를 자처하고 나선다. 친척 어른 사단 콤보인 “공부 잘 하고 있지?”, “취직 어디로 하니?”, “결혼
언제 하니?”, “아기 소식은 없어?” 중에서 이 정도 나이에다가 학생이라면 결혼 이야기가 가장 적절하니까. 결국
할 말이 없는 거겠지.[7]
원식이 형도 결혼은 빨리 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쯤 여자 친구
부모님께서 언제 박사 사위를 데려올 거냐고 여자 친구를 볶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아 놓은 돈도 없을
테니 그것도 걱정일 것이다. 그러니 졸업 걱정을 가장 많이 하겠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 대출이라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쯤
산학장학생[8]을 알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기가 올라 ‘깨어 있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될 때쯤이 아니면, 원식이 형이 자기 걱정을 다 늘어놓을
기회는 주지 않는다. 그저 결혼에 대한 자기 생각들을 늘어놓을 뿐. 원식이
형도, 술에 기대지 않고는 이야기를 늘리지 않는다. 탈출구만
찾는다.
정길(박3, 33): 주성아, 너 그거 봤냐. 여자들이 얼굴 큰 남자에게 더 매력을 느낀대.[9]
주성(박1, 27): 에이, 그럼 정원이 형은 왜 아직 솔로에요?
교수님을 포함하여 일동 웃음.
주성(박1, 27): 에이, 그럼 정원이 형은 왜 아직 솔로에요?
교수님을 포함하여 일동 웃음.
정원(박4, 31): 야 이 자식아. 뭐라고?
주성(박1, 27): 농담이에요. 크크크크. 근데 보영아, 정말 그래? 우리
연구실에서 정원이 형이 제일 매력적이야? 크크크크크크크크.
보영(석2, 25): …….
보영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이럴 때면 세상의 모든 여성을 대표해야 하는 보영이.
저 쪽에서 학부생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 보인다. 잔디밭에
덜렁 눌러앉아 큰 소리로 웃는다. 나도 친구들과 딸기파티를 할 때는 굳이 뭘 깔고 앉지 않았는데. 교수님을 맨바닥에 앉으시게 하기 뭐해서 준비한 신문지다. 학부생들이
서로 얼굴에 딸기를 찍어 먹던 생크림을 묻히기 시작한다. 엉켜서 바닥을 구른다. 도망가고, 또 부딪힌다. 흔들리는
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신문지를 벗어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설익은 농담이나 던지고 있는데.
흔히들 고등학교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한다. 대학만 가도 재지
않고 만나는 친구를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난 몇 명 만났다.
물론 같은 수준의 대학 학생이라, ‘측정’이 끝난 상태였을 수도 있지만. 또, 직장 사람들은 친구일 수 없다고 한다. 서로에게 친절하지만, 사생활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이일까?
친구일까, 같은 학교 동문일까, 같이 일하는
사람일까.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딸기파티까지 했지만, 사진 속 대오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1] 유상영 기자, ‘KAIST 딸기 파티 아십니까?’…“3000박스
넘는 딸기 팔렸다”,http://www.hellodd.com/news/article.html?no=30786
[2] 소유 X 정기고, <썸> http://www.youtube.com/watch?v=z9Z6TaUSe-Y
[3] 아스플로스(ASPLOS,
Architectural Support for Programming Languages and Operating Systems): 매해
열리는 컴퓨터 관련 국제학회로, 중앙처리장치 등의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등을 폭넓게 다룬다.http://asplos15.bilkent.edu.tr/
읽을 때는 “아스플로스”라고 읽는다.
[4] 3화 '매몰비용' 참고. http://scienceon.hani.co.kr/158831
[5] “[터키여행] 죽기전에 가봐야할 여행지로 선정된 파묵칼레” http://goo.gl/TWC7Nn(http://mudaebboo.tistory.com/)
[6] “[터키여행]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터키여행, 터키여행의 유명 관광지소개”http://pann.news.nate.com/info/315826214
[7] 친척 사단 콤보는 아이가 생기고 나면 “아이는”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되풀이 된다. “아이는 공부 잘 하고 있지?”,
“아이는 취직 어디로 하니?”, “아이는 결혼
언제 하니?”, “아이는 아기 소식 없어?” 김두식 선생님은 이를 “친척이나 친지 관계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주는 무한순환 질문일 뿐”이라고
했다. -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창비 출판, 105-107쪽
[8] 산학장학생: 기업이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 학비와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원한다. 대부분의
경우, 장학금 수혜 기간에 비례하는 기간에 의무적으로 회사에서 일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취직이 한 회사로 제한되는 대신, 보장도 되는 것이다.
[9] 구자윤 기자, “女, 얼굴 큰 男에게 더 매력 느낀다”, http://goo.gl/SvFHvK
(http://www.fnnews.com)
#8. 또 하나의 입시
서류 전형과 면접을 통과해서 대학원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학교에서는
또 하나의 입시가 벌어진다. 바로 연구실 배정이다. 더 많은
연구실을 직접 둘러보고 결정하라는 의미로 첫 학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연구실 배정을 한다. 특정 연구
분야에 대한 포부가 있는 신입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실에 배정받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한다. 학위만
따러 들어왔어도, 어떤 연구실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진로도 어느 정도 정해지기 때문에 연구실 배정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어떤 지도교수를 만나고 어떤 사람과 함께 지내느냐의 문제기
때문에, 연구실 배정 기간에 정보에 굶주린 신입생들의 음주가 대폭 늘어난다.
석사과정 신입생들의 연구실 배정 기간, 메일이 하나 왔다.
김정원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석사 신입생으로 들어오게 된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학부는 한겨레대학교를 나왔고, 운이 좋게도 이번에 꿈꾸는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어느 연구실에 들어가야 할지 살펴보던 중에 선배님께서 계시는.......
아, 누가 신입생 아니랄까봐,
메일 참 길다. 그러니까 우리 연구실에 관심 있으니 나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거다. 편한 시간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냥 자기가 언제 시간이 되는지 적어놓으면
편할 텐데, 무작정 알려달란다. 갓 들어온 신입생들이 수업
같은 게 많아서 일정 잡기 어렵지, 난 거의 연구실에 있는데.
하긴, 나도 신입생 때는 비슷했지. 대학원 6년차, 어느덧
완벽한 대학원생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불평하고 있는 내 모습을.
그래, 우리야 이메일을 거의 카카오톡 쓰듯 쓰지마는, 이 학생에게는 아직 편지 같은 느낌일 것이다. 출력만 하면 봉투에
넣고 집주소를 적어서 보낼 수도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중학교 때나 배웠을 “편지 글의 구조”를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마저 보이려 한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겠지. 허구한
날 효율, 속도 따위만을 이야기하는 이곳에서는 무조건 짧은 것이 예의인데. 그러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유식한 말 좀 써보자면 ‘간단명료’라고나
할까. 이제는 청첩장마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시간과 장소만 알면 되는데, 왜 그리 비싼 종이를 쓰는지. 그러면서도
밥이 언제부터 나오는지는 안 적어놓는다. 언제 예식장에 갈 건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정보인데.
아, 사람과 사람이 맞닿는데,
효율이 웬 말인가. 참, 비인간적이다.
그럼에도, 대학원생의 메일답게 답장은 한 줄이었다.
수요일 오후 3시에 괜찮으신가요? 괜찮으시면 전산학과 1층 로비에서 만나죠.
- 김정원
나 같으면 “그 때 뵙겠습니다.” 한 문장으로 끝낼 답장이 반갑다느니
고맙다느니 하면서 7줄 분량으로 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제시한 시간이 안 됐으면 기나긴 메일을 또 주고받아야 했을 테니까.
약속은 잡았지만,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는 건 참 부담스럽다. 왜 대체 나일까. 연구실에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수요일 오후 3시, 전화번호도
생김새도 몰랐지만, 로비에서 초조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걸 보니, 저
사람 같다.
“저, 혹시 이진석....”
벌떡 일어난다.
“네, 김정원 선배님이신가요?”
“네, 저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앉으세요.”
아, 저 예의, 부담스럽다. 메일에야 연구실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다는 했지만, 나에게
잘 보이면 연구실에 들어오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도 있을 테니까. 도움은 개뿔, 아무 영향도 없는데. 책상 위에 비타민 음료 열 개 들이 박스가
놓여 있다. 설마 나 주려는 건가? 교수님 뵐 때 사들고
가는 신입생들은 봤어도, 유난이군.
“이거 설마 저 주려는 거예요?”
“아, 네 선배님.”
“하하하, 이런 뇌물은 받을 수 없어요.”
사실 내가 연구실 배정에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뇌물이 될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아직 공적인 사이인데, 뭔가를 받기도
그랬다. 흠, 전부 거절하기도 미안한데….
“사오긴 하셨으니까, 여기서 딱 한 개만 마실 게요. 나머진 동기 친구들 나눠주세요. 인기 올라 갈 거예요.”
진석 학생이 약간, 당황한다.
그럴 만도 하지. 어색한 순간이 싫어서 서둘러 비타민 음료 박스를 뜯어 하나만 꺼낸 뒤, 바로 말을 이었다.
“뭘 물어보고 싶죠?”
“제가 원래 컴퓨터구조나 운영체제 같은 데 관심이 많기는 한데요, 아직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연구실에서 어떤 연구를 하는지가 제일 궁금해요. 홈페이지에서 논문 목록은 좀 봤는데요, 그걸 다 읽어 보기엔 너무
어렵고 해서요.”
신입생과 만나면 늘 받는 질문. 최근에 논문이 나온 것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설명해줬다. 당연히, 준상이의 논문들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수행했던 프로젝트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던
진석 학생이 다시 묻는다.
“그럼, 선배님께서는 어떤 연구를 하고 계세요?”
아씨, 연구 안 하는데. 그렇다고
연구를 안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난 지금 이 학생에겐 연구실을 대표하고 있으니까.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겸손과 너스레로 포장해서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음, 연구 안 하는데. 하하하하. 매일 뭔가를 하긴 하는데요, 하루하루를 떼놓고 보면 연구라고 말하기
좀 그렇거든요. 실제로 뭔가를 구현한다거나 논문을 쓰는 날은 거의 없어요. 뭘 좀 시작하려면 프로그램 설치가 잘 안 돼서 며칠 날리고, 컴파일[1] 안 돼서 며칠 날리고, 뭘 좀 바꿔보려면 원래의 것을
분석해야 되잖아요? 그게 몇 주도 걸리고, 또 논문 좀 읽다보면
하루가 다 가니까 논문 몇 개 읽으려면 며칠 날리고, 그렇게 몇 달을 보내서 겨우 뭔가 실험을 하잖아요? 그리고 결과를 보면 딱 깨달아요. 아, 내가 뻘짓했구나. 그러면 또 다른 주제를 찾아야 되고, 그럼 또 컴파일이 잘 안 돼서 며칠 날리고…”
아, 내가 다 서글프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을 진석 학생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아차 싶다. 연구실
이미지 관리에 들어갔다.
“아, 그렇다고 정말 아무 것도 안 하는 건 아니고요, 요즘엔 뭘 하려고 하냐면요, 프로그램이 여러 개가 실행될 때, 중앙처리장치에 달린 캐시 메모리[2]를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지랑, 그 때 스케줄러[3]는 어떻게 도와주면 더 잘 될지를 연구해보려고
해요.”
전문 용어 몇 개를 섞어 연구 주제를 설명하니 비로소 뭔가 들으려는 눈치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컴파일부터 잘 안 돼서 막혀 있는 주제를
마저 설명했다. 말해 놓은 게 부끄러워서라도 연구 좀 해야겠다. 그래, 컴파일이 안 돼서 삽질하는 것도 연구의 일부분이긴 하니까.
어차피 준비해온 질문도 몇 개 없을 터,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분야만 보고 연구실 고르지 마세요. 그보다 누가 지도교수님이냐가 훨씬 중요할 거예요.”
“네?”
“지금은 하고 싶은 분야가 확고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어느
분야든, 실제로 해보면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차라리 사람보고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아, 저도 사대천왕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근데 사대천왕이 누구에요? 아무도 안 알려주더라고요.”
예로부터 절대 기피해야 할 지도교수 네 분이 사대천왕이라는 별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주로 졸업을 늦게 시킨다거나, 자신이 퇴근하기 전에는 학생들이 퇴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자신이 정말정말 퇴근이란 걸 안 한다거나, 주말에도 반드시 나와야 한다거나 하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초면에 그 목록을 말해주긴 곤란했다. 흘러 흘러 교수님들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걸 제가 이런 데서 말씀 드리긴 곤란하고요, 나중에 신입생
재학생 상견례 같은 거 하면 뒤풀이 가잖아요. 거기 술자리 가서 물어보세요. 그런데, 그 사대천왕이란 것도 좀 업데이트가 필요해요. 그 연구실들 중에 빡세긴 한데 재밌는 연구를 하니까 의외로 사람들이 만족하면서 지내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고요.”
학생에게 재떨이를 던졌다거나,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등의 몇
가지 에피소드가 더 떠올랐지만, 진석 학생과 나 사이엔 아직 신뢰 관계가 없었다.
진석 학생이 말했다.
“그럼, 권대성 교수님은 어떠세요?”
“우리 교수님이요? 좋죠. 교수님들
중에서도 참 좋은 편이에요. 제가 지금 연구실 마케팅하려고 이런 말 하는 건 아니고요. 일단 연구실 출퇴근 시간이 아주 자유롭고요, 교수님이 퇴근 안 하셨어도
우리는 마음대로 퇴근하고 그래요. 학생들 의견에도 꽤 귀 기울여 주시고요. 물론, 프로젝트를 몇 개 하니까 할 일은 꽤 있는데, 월급 받는 거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야겠다 싶은 정도에요. 프로젝트도
되도록 연구랑 관련 있게 만들려고 노력하시고요.”
그래, 사실, 내가
박사과정에 불만족스러운 건 다 내 탓이다. 제길. 남들은
교수 탓도 많이 한다는데. 원망할 길 없이 자책만 하려니 더 힘들기도 하다. 복에 겨웠지 뭐.
“사실, 권대성 교수님 연구실이 소문도 좋게 나 있고 그래서
다들 가고 싶어 하거든요. 그런데 선배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더 가고 싶어졌어요. 연구실에 뽑히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는데…. 완전히 교수님 마음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일단 우리 학교 입시를 통과했다면, 다들 실력은 비슷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대학원에서 필요한 능력은 연구하고 논문 쓰는 능력인데, 학부과정에서
제대로 된 연구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그러면 다 거기서 거기에요. 그러니까, 그냥 교수님 마음이죠.
누구는 그 교수님이 쓰신 논문을 좀 읽어보고 가면 도움이 된다고도 하는데, 갓 학부 졸업한
분들이 논문 읽고 이해하는 것도 쉽진 않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음, 우리 교수님 찾아갈 때 이력서는 꼭 준비해 가세요. 이력서 갖고
오는 걸 당연하게 여기시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네요.”
더 이상은, 할 말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확실하지 않은 말을 내뱉어서 이 학생이 뻘짓을 하게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내가 책임질 수도 없으니까.
“그럼 혹시, 선배님 배정 받으셨을 때는 어땠는지 얘기해 줄
순 없으세요?”
절박하긴 절박한가 보다. 비법이 없다고 하자 예시 답안이라도
찾는 걸 보면.
그러게, 정말 나는 어떻게 이 연구실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당시에도 인기가 꽤 높았던 이 연구실에 말이다. 이 대학 학부 출신이기
때문일까? 학점이 높았던 건 아니니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고. 학부
졸업논문을 써보긴 했지만, 남들도 다 쓰는 것이다. 그 논문이
특출났던 것도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 교수님을 찾아뵐 때는 말쑥하게 차려입고 또박또박 대답하고 그랬는데, 그게 좋아보였을까? 혹시, 지금은
날 뽑았던 걸 후회하진 않으실까? 6년이나 데리고 있는 데도 변변한 저널 논문 하나 못 써내니까.
답이 없다는 걸,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하다가,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연구실 배정은요, 소개팅 같은 거예요.”
“네?”
“생각해 보세요. 소개팅을 할라치면, 기본적인 조건들은 미리 점검하잖아요. 나이가 어느 정도여야 한다거나, 키는 나보다 작거나 커야 한다거나, 뭐 사람에 따라서는 학벌을 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그 사람과 사귀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잘 생겼거나 돈이 많다고 반드시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물론, 연락을 자주하고, 얼굴을 자주 본다면 그 사람과 사귈 가능성을 높일
순 있겠지만, 실상은 연락 자주 한다고 그 사람과 사귀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아예 연락이 없으면 소개팅 자체가 쫑나는 거겠지만요. 연구실 배정도 똑같아요. 입시라는 과정은 모두 통과했으니 기본적인
조건은 되는 거예요. 물론 교수님을 자주 찾아뵙고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하면 뽑힐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그렇다고 꼭 뽑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이제까지 뽑힌 학생들을
보면, 학점이나 영어 성적이 특출난다고 꼭 뽑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더 이상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어요. 제 말대로 했다가 안
된다고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수긍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요, 혹시 선배님. 선배님께서
교수님께 말씀을 좀 잘 해 주시면 좀 좋지 않을까요?”
일단 내가 이 학생에 대해 교수님께 드릴 수 있는 ‘좋은 말씀’이 뭔지도 모르겠다. 왜 ‘좋은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하하, 제가 교수님 측근이 아니라서요. 제가 말씀드린다고 영향 받고 그러지 않으세요.”
이제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이야기 내내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연락을 주신 거예요? 다른 사람도 많이 있잖아요.”
“아, 그게요, 연구실
홈페이지에서 한 명 한 명에 대한 웹페이지들을 찾아들어가 봤는데, 거기서 선배님 블로그 링크가 있길래
들어가봤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가 학부 때 몇 번 봤던 블로그인 거예요. 그 때 되게 유용하게 잘 봤거든요.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아, 설마, 그
리눅스[4] 공부한 거 몇 가지 적어놓은 블로그요?”
“네.”
“그거 글 안 올린 지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같은 연구실에서 만나게 되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네, 안녕히 가세요.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인사치레와 함께 서둘러 물러났다. 아, 그 블로그였구나. 석사과정 때, 리눅스를
가지고 이런저런 것을 해보고 나면 그 과정을 꼬박꼬박 정리해놓곤 했다. 이왕 정리해놓은 거 블로그에
올려놓으면 다른 사람 알려주기도 쉽겠다 싶어서 만들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질문을 했을 때, 답을 하는 대신 블로그 링크를 알려준 적도 꽤 많다. 그래, 그 땐 참 열심히 살았는데.
신입생 시절이 떠오르고, 나름 열심히 살던 석사과정 시절이 떠오르다가, 갑자기 박사 4년차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어느덧, 대학원에 들어 온지도 6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연구하기 싫어하는 이 순간, 실은 연구하기 두려워하는 이 순간에도 하루하루는 흐른다. 그리고
이미 꽉 찬 연차만 더 쌓여간다.
또 한 명의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에, 연구란 걸 본격적으로 시작해봐야겠다. 마침 아무 일도 없으… 아차, 내일 논문 스터디 발표가 있구나. 아씨, 연구 좀 시작할라치면 꼭 뭐가 있다니까. 내일이면, 서둘러 준비해야겠다. 투덜대며, 연구실로 갔다.
[1] 컴파일(compile): 스마트폰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컴퓨터는 0과 1로 구성된 기계어만을 해독해서
실행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0과 1만을 써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은 너무 어려우므로, 사람이
알아보기 쉬운 언어(물론 전공자들에게나 쉽지 일반인에겐 영어 단어들의 이상한 조합이다)를 사용해서 프로그램을 작성한 다음, 이를 기계어로 번역해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컴퓨터에서 구동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곤 한다. 이 때, 기계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컴파일’이라고 한다.
[2] 캐시메모리: 일반적으로 중앙처리장치(CPU)의 연산 속도에 비해, 메모리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는
많이 느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처리장치에 용량은 작지만 속도는 빠른 메모리를 넣어서 자주
사용하는 데이터를 저장해놓고 사용한다. 이 메모리를 캐시메모리라고 한다. 중앙처리장치를 소개할 때 ‘CPU/3.4GHz/6MB/LGA1155)’와
같이 쓰기도 하는데, 이 때 세 번째인 ‘6MB’가 캐시메모리의
용량을 나타낸 것이다.
[3] 스케줄러: 요즘 컴퓨터에는 중앙처리장치도
여러 개 달려 있고, 프로그램도 동시에 여러 개가 수행된다. 또
각 프로그램이 여러 개의 중앙처리장치를 동시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 때, 어느 프로그램의 어느 부분을 어느 중앙처리장치에서 실행시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를 운영체제 속에 포함된 스케줄러가 담당한다.
[4] 리눅스(Linux): 윈도우즈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컴퓨터 운영체제. 소스 코드가 완전하게 공개되어 있어서 운영체제 관련 연구를 할 때 많이
쓰인다.
#9. 마케팅
우리 연구실엔 스터디가 있다. 연구실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논문
하나를 선택해서 자세히 공부하고, 그 내용에 대해 발표를 하는 형식이다. 개개인이 많은 논문을 자세히 읽기는 어려우니 품앗이를 하는 것이다. 또, 함께 발표를 들으며 토론을 하는 것도 장점이다.
내일이 내 차례다. 어떤 논문을 발표할지는 2주 전부터 골라 놓고 인쇄까지 해놓았다. 하지만, 아직도 초록[1]밖에 안 읽었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레이지 로딩(lazy loading)’[2]이라는 오래된 지혜가 있다. ‘게으르다’는 의미의 ‘lazy’가 들어가 있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꼭 필요해지면, 그때 가서 하자’라는 말이다. 주어진 일이 있고 쉼 없이 일을 한다고
가정하자. 제일 빠르게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저 불필요한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 따라서 필요할지 아닐지 모르는 일을 미리 하기보다는 반드시 필요해지는 순간에
가서야 하는 것이 제일 좋다.
물론 이걸로도 이제야 논문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쉼
없이 일한다’는 가정이 빠졌기 때문이다. 중앙처리장치(CPU) 내의
일부가 쉬고 있는 경우,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미리 시켜서 성능 이득을 꾀하는 연구들도 있다.[3] 쉬느니 뭐라도 해놓으면, 쓸 모 있어질 때마다 이득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도, 심지어 논문 발표를
안 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도, 읽어둔 논문은 어쨌거나 쓸모 있지 않은가.
재미도 없는데 의리로 본 예능들, 몇 백 명이 비슷한 소리만
떠드는 데 다 들여다 본 트위터, 댓글 하나 새로 달릴 때마다 다시 들여다 본 페이스북, 하루 종일 이런 것들만 해댄 내 자신이 한심해서 들이켠 병맥주들까지 생각난다.
그래, 차라리 ‘쉼’이라면 낫겠다.
생각해보니 논문을 읽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다. 뭐라도 일이 생겨야
논문을 읽는다. 논문이란 게 축구 선수로 치자면 밥 같은 건데, 먹는
게 없으니 뛸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세미나나 스터디에서 주워들은 것이 있어서 머리에 풀칠만 하는 형국이다. 빌어먹는 삶이 따로 없구먼.
어쨌거나 하긴 해야 하니, 논문을 펼쳐들었다. 3문단쯤 읽었을까, 학부 시절 경영 동아리에서 만났던 산업디자인학과
여자애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사실 논문 발표를
준비하고 있으니 계속 컴퓨터 앞에 있을 것이고, 메시지도 계속 주고받을 수 있는데. 일도 열심히 안 하는 주제에 바쁜 척 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저 친구가 보내주겠다는 건, 보나마나 예쁘장한 양식일 것이다. 파스텔 톤의 어떤 색상에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거나, 까만 배경에
별이 몇 개 반짝이는 따위의. 하지만, 공대 발표는 그런
게 아니다. 먼저 제목과 내용 사이, 그리고 내용과 꼬릿글
사이에 줄 하나씩 무난한 색상으로 넣는다. 배경은 검거나 하얗게, 아주
드물게 남색으로 온통 칠한다. 그리고 허전한 귀퉁이에 학교 마크와 연구실 마크만 적당히 끼워 넣으면, 고대 양식도 현대 양식도 아닌 공대 양식의 완성인 것이다. 분명
르네상스 시대에는 과학과 미술과 음악이 함께 부흥했건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사실, 이런 양식이 공대 표준이 된 것은 과학지상주의 때문이다. 디자인을 보조도구로만 보기 때문이다. 감흥 따윈 필요 없다. 과학적 내용만 잘 전달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또, 전문용어 지렁이들과 기호 거미줄들이 난무하는데 아름다움이 다 무언가. 이해에
방해가 될 따름이다.
꾸역꾸역 서론 부분을 다 읽었다. 지겹다. 전체 열두 쪽 중에 이제 겨우 한 쪽 반 정도 읽었는데. 일단 전체
틀을 잡아볼까. 큰 제목과 그림, 그래프 위주로 훑었더니
대충 알겠다. ‘Multi-core, multi-programmed 환경에서 cache memory는 LRU 방식으로 사용하기보다는 way-based partitioning을 사용하면, overall
performance improvement를 도모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적은 양의 auxiliary tag를 두어 어떻게 partitioning을 하면
최적일지를 찾을 수 있다.’[4] 순간 온갖 전문용어들을
익숙하게 내뱉고 있는 나 자신이 새로워 보였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논문의 대강을 이해해 낸 것도 대단해
보인다. 남들은 이해조차 못할 텐데 말이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남이 아닌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고 창의적이라는 것이지.
늘 하는 후회는 잠시 접어두자. 발표 준비를 해야 하니까. 논문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발표 자료를 만들면 될 것 같다. 어차피
흐름은 뻔하니까, 대충 논문 순서대로 가면 될 듯싶다. 전부
발표하기엔 양이 많을 테니 적당히 가지만 쳐내 가면 되겠지.
내가 후배들에게 늘 하는 말이 떠올랐다.
“논문 순서 똑같이 따라가지 좀 마. 논문을
다 읽었으면 딱 덮어놓고, 스토리 라인을 처음부터 생각해보란 말이야.”
발표는 듣기 위한 것이고, 논문은 읽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방식도 다르다. 발표는 보통 한 번 듣기 시작하면 끝까지 듣는다. 하지만, 논문은 일부분만 제대로 읽고 나머지는 훑어보는 (조금 전에 내가
그런 것처럼)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하나의 글로서 흐름보다는
단락의 각개 내용에 더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특히 서론 부분에서 논문 전체 내용을 소개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이 때 뒷부분에 다시 나올 이야기도 짧게 언급하곤 한다.
그래서 논문 순서 그대로 발표에 담다 보면 전체 흐름상 어색한 순간이 있다. 또, 발표를 할 때는 처음에 궁금증이나 기대감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때로는
논문 중간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제일 처음에 소개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그런데 후배들아 미안하다. 사실 발표를 준비하다 보면 결국 논문
순서를 따라가게 되더라. 전체적으로 살펴봐도 유기성이 있는, 잘
써진 논문들이 많더라고.
첫 장에야, 논문 제목, 저자
이름 등만 쓰면 되니, 후딱 만들고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장 제목은 좀 도발적으로 써야겠다. 사람들이 집중해서 읽을 첫 번째 장이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고 글자 크기도 제일 큰 것이니까.
“Sharing Cache can be Harmful”
(캐시메모리를 공유하는 것은 해로울 수 있다.)
음, 아예 운율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다.
“Sharing Cache Damaging Apps”
(캐시메모리 공유는 애플리케이션들에겐 공해다.)
운율이 마음에 든다. 이걸로 정했다.
옛날 생각이 난다. 석사과정 때 말이다. 물론, 석사 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지만, 5~6년 전을 ‘얼마 전’이라고 부르긴 좀 뭐하잖아. 당시 내가
논문 발표를 하고 나면, 웃으면서 들은 선배들이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발표가 재밌는 건 좋은데, 너무 약 파는 것 같아. 좀 격식 있을 필요도 있어.”
어차피 우리끼리 하는 거니 편하고 즐겁게 들으시라고 농담을 좀 섞은 것뿐인데. 그 말을 하는 그 선배의 발표가 너무 졸리길래,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하지만 지적이 반복되자 조금씩 받아들였다.
농담을 줄이자, 조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래도
다시 늘리진 않았다. 적응이랄까, 순응이랄까.
논문 발표는 마케팅이다. 자기네가 개발한 기법 혹은 분석 결과가
의미 있음을 알리는 행위이다. 물론, 엄정한 실험 결과와
과학적 유추를 바탕으로 하지마는, 마케팅이라고 해서 허위 사실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광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제품 홍보 목적으로 작성하는 기업 보도자료
쯤은 될 것이다. 그러니 유머는 오히려 넣어야 하는 것이다. 흐름을
깨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유머가 많으면 안 되는 이유는, 다시 한 번 과학지상주의
때문이다. 유머도 도구일 뿐이다. 처음에 청중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전부다. 계속될 경우 엄숙한 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을 청중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유머가 잘 어우러지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컴퓨터의 자원 분배 정책을 경제학의 좌파나 우파와 연관 지어 설명해도 재밌을 것 같다. 나중에 교수가 되면 꼭 멋진 유머와 비유들을 섞어서 발표해 보고 싶다. 그런데, 교수가… 못 될 거야 아마….
이제 첫 줄을 써야 한다. 연구 동기의 핵심 문장을 써보았다.
아, 한 줄이 넘어간다. 글자가
한 줄을 넘어가면 청중들이 읽기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한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안 읽는다. 말을 바꿔보았다.
아, 두 글자만 더 줄이면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조동사 ‘may’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빠지면 ‘모든 경우에 그렇다’는 의미가 되어 과학적 엄밀성이 떨어진다.
이를 언어적 모호성으로 보충해줘야 한다.
‘빈 칸 글자 크기 줄이기 기법’을 썼다. 빈 칸들은 글자 크기를
꽤 줄여도 거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유용하다. 빈
칸들만 크기를 8씩 줄였다. 그래도 한 줄에 안 들어가자, 최후의 기법인 ‘글자 영역 넓히기’를 사용했다.
휴우, 됐다. 문구도
마음에 든다.
서론 부분에 대한 발표 자료를 만들고 나니, 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다.
국현(박3, 28): 자자, 저녁 드시죠.
정원(박4, 31):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국현(박3, 28): 빨리 가요. 식당 줄 길어지기 전에.
식당으로 가는 길에 국현이가 묻는다.
국현(박3, 28): 형, 내일 발표 아니에요?
정원(박4, 31): 맞아. 이제야 서론 부분 다 만들었다.
주성(박1, 27): 에이, 형 연차가 있지,
하룻밤이면 뚝딱 하잖아요.
정원(박4, 31): 어쨌든, 늦게 자야 되잖아.
국현(박3, 28): 형 발표 잘 하시잖아요. 적당히 하고 자요.
내가 발표를 잘 했던가? 뭐,
아까 산디과 친구도 그렇고, 여러 번 들어본 사람이 잘 한다는데, 잘 하는 거겠지. 정말 잘해야 되는 건 연구가 아닐까도 싶지만.
밥을 먹고 와서 다시 자리에 앉으니 예능도 땡기고 게임도 땡겼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발표 준비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논문 한 부분을 읽고 발표 자료 몇 장을 만들고를 반복했다. 각
장의 유기성과 단절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발표 자료는 한 순간에 한 장씩만 화면에 띄울 수 있다. 출판 만화를 그릴 때 각 장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서도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발표 자료를 만들 때도 한 장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논문은 출판물이면서도 오히려 웹툰과
같다. 한 장에 들어가는 정보도 월등히 많을 뿐더러 앞뒤로 넘겨가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5][6]
어느덧 새벽 3시. 시간
여행을 한 것 같다. 그토록 10분이 멀다 하고 스마트폰을
쳐다보곤 하는 나지만, 가끔은 이렇게 집중하게 될 때가 있다. 뭔가를
창조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내용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일까? 애초에 창조하는
직업이 어울리지 않은 걸까?
일단 발표 자료는 다 만들었지만, 좀 더 다듬어야 한다. 그러려면 몇 시간 못 잘 것 같다. 나는 왜 오늘에서야 발표 준비를
시작했을까? 그런데, 사실 이게 제일 효율적이다. 일찍 시작해봐야, 발표 준비 하다 말고 놀고, 또 더 예쁘게 만들려고 시간을 더 많이 쓰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 시작하든, 준비는 항상 발표 전날 밤 늦게 끝난다. 아예
못해 낼 정도로 늦게 시작하지만 않는다면, 늦게 시작할수록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졸리다. 발표가 오후 2시니까, 다듬는 건 내일 해야겠다. 기숙사로 향했다.
[1] 초록(abstract): 2-3문단으로
구성된 논문의 핵심 요약 부분. 논문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한다. 각종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제목과 함께 초록까지 보여주기 때문에, 논문을 다운로드 받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즉, 15초짜리 광고 같은 존재이다.
[3] 예를 들면 다음 논문이 있다.
Xekalakis, P. and Cintra, M., “Handling branches in TLS
systems with Multi-Path Execution,” High Performance
Computer Architecture (HPCA), 2010 IEEE 16th International Symposium on , vol.,
no., pp.1,12, 9-14 Jan. 2010
[4] 전혀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다음
논문을 참고한 것이다. Moinuddin K. Qureshi and Yale N. Patt. 2006.
Utility-Based Cache Partitioning: A Low-Overhead, High-Performance, Runtime
Mechanism to Partition Shared Caches. In Proceedings of the 39th Annual
IEEE/ACM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 (MICRO 39). IEEE Computer
Society, Washington, DC, USA, 423-432.
[5] The Comixbook (페이스북 페이지), “페이지 구성(칸 나누기)”https://www.facebook.com/thecomixbook/posts/1420949388165985
[6] 최유남, “웹툰에 나타난 연출의 특징 - 강풀, 강도하, 양영순을
중심으로”,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2011 하반기 종합학술대회, 2011.12, 17-26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1598486
#10. 질문
알람은 머리를 각성시킨다. 더 자기 위한 각성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가장 늦게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도출해낸다.
모든 우선 순위는 재조정된다. 아침밥 생략은 일순위다. 샤워는
되도록 생략하고 머리 감는 데 필요한 시간만 남긴다. 계산이 끝나면 알람을 다시 맞추고 잔다. 애석하게도 알람은 순식간에 다시 울린다.
인간은 매일 한계를 극복해나가는 존재이다. 어제 5분 만에 머리를 감았다면 오늘은 4분 만에도 감을 수 있다. 어제 1킬로미터를 15분에
걸었다면, 오늘은 13분 만에도 걸을 수 있다. 그러니 나는 3분을 더 잘 수 있다. 하지만 3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시간이 아니다. 채 잠이 들기도 전에 지나버린다.
인간은 영장류이다. 희생이란 걸 할 수 있다. 물론 피피티가 완벽하다면 발표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말을 잘 한다. 피피티가 희생해도 된다. 그러니 어제
밤에 만들어둔 것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잠깐 더 자도 된다.
태양을 거슬러 자외선 차단 크림을 만들어낸 인간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만큼은 숭배한다. 시계란 우상을 만들어두고 굴복한다. 그러니까, 결국 일어났다는 말이다. 느지막히.
오늘은 논문 스터디, 내가 공부한 논문을 발표할 차례인 날. 시작은 2시부터다. 연구실에
도착한 건 12시 50분.
점심도 포기하고 우유 자판기에서 초코 우유를 하나 뽑아 왔다. 컴퓨터 마우스를 휙휙 대니
어제 밤에 만든 피피티 파일이 뜬다. 자, 보자. 그림 몇 개를 아직 안 넣었는데…, 애니메이션 효과도 몇 개 더
넣어야 하고….
초코 우유를 깠다. 두어 모금 마신다. 당이 차오른다. 가물었던 췌장에서 인슐린이 새어나올 틈을 엿보기
시작한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엄마다.
아씨, 급한데. 연구실을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아들!
뭐하다 전화를 늦게 받니?”
“연구실에 있었어요. 왜요?”
“왜긴 왜야, 아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하랬잖니!”
“아, 제가
전화를 좀 안 했죠?”
“열흘도 넘었다. 목소리 까먹겠다. 뭐하고 있었어?”
“아, 엄마. 조금 이따 2시부터 발표가 있어요.”
“그래?
그럼 후딱 준비해야겠네? 울 아들 잘 해라~”
“네, 엄마. 그럼 끊어요.”
“그래.
전화 좀 꼬박 꼬박 하고 그래!”
“알았어요.”
전화를 안 하려고 안 하는 건 아닌데. 항상 집에 전화 한 번
해야지 싶은 시간은 밤 11시도 훌쩍 넘는 시간이다. 밤의
감성이 돋으면서 엄마 생각도 나는 걸까? 너무 늦었으니 내일 해야지,
내일 해야지 하다가 그렇게도 늦어지고 그러는 것이다. 어쨌거나 앞으로 일주일은 전화 안
해도 되겠군.
전화를 마치고 들어가는데 기똥찬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말로 발표를 시작하자.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아이디어가
하나씩 생각난다니까. [1]
오후 2시. 사람들이
모였다. 교수님은 다른 일이 있으신지 못 오셨다. 발표를
시작했다.
“오늘 제가 발표할 논문은 Utility-based Cache Partitioning[2]이란 논문으로 마이크로(MICRO)[3] 2006년도에 발표된 논문입니다.”
그리고 아까 떠올랐던 말을 이었다.
“중국집 가서 짜장면, 짬뽕에 앞서 탕수육만 먼저 드셔본 적 있으실 겁니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도 햄버거보다 감자튀김만 먼저 먹어버리기도 하는데요. 먼저 먹는 정도면 다행인데, 누구 한 명이 재빨리 다 먹어치우면 짜증나잖아요. 그런데 바로 중앙처리장치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공유되는 캐시메모리를 하나의 프로그램이 많이 잡아먹어버리기도 하는 것이죠. 더 큰 문제는, 캐시메모리는 많이 잡아먹으면서도 정작 성능은 별로
올라가지 않는 프로그램도 많다는 것입니다. 왜, 어떤 친구들은
자기가 음식 다 먹어버리고도 배고프다고 하잖아요. 난 조금만 더 먹어도 충분히 배부를 수 있는데 말이죠. 이 논문은 바로 그런 현상을 해결해서 전체적인 성능을 올리려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사람들이 웃는다. 뿌듯하다. 그러면서 문득 이걸로 다른 사람들은 웃을까 생각해봤다. 다들 중국집
가서 탕수육에 먼저 젓가락을 댈 테니 공감 포인트는 있을 것이다. 허나 너무 식상하다. 여기서는 예상 외의 것과 연결시킨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연결된
것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연구실 사람들만이 웃을 수 있다. 같은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새삼 연구실 사람들이 좋아진다.
막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려는데, 준상이가 손을 든다.
“그런데 캐시는 way-partitioning하겠다는 건가요?”
‘way-partitioning’이라는 단어, 석사과정 학생들은 당연히 잘 모를 것이다. 두어 장 뒤에 설명해놓은
단어다. 지금 아는 체하고 싶은 건가? 그래, 순수한 궁금증이겠지. 준상이만 알아들으라고 짧게 대답했다.
“네.”
“이거 실험을 어떻게 했어요?”
박사 4년차나 된 주제에 논문발표를 하면서 실험을 어떻게 했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왕따를 당한대도 할 말이 없다. 그걸
왜 지금 묻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 바닥에서 캐시 연구를 했다 하면 뻔하지. 시뮬레이터[4]에 제안한 기능을 구현해 넣고 실험했겠지.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 왜 묻니.
우리나라 학생들은 그렇게도 질문을 안 한다고 한다. 주입식 교육에
세뇌당한 건지, 경쟁이 생활화된 문화에서 모른다는 걸 드러내 보일 수가 없는 건지, 인내심이 좋아 언젠가는 말해줄 걸 굳게 믿고 기다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질문은 권장해야 하고 질문을 받으면 절대 귀찮아하지 말아야 한다고 EBS가 알려줬다. 그러니 대답을 했다.
“자체 제작 시뮬레이터를 써서 실험했습니다.”
“실험할 때 설정 값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안 나왔지만, 캐시메모리에 way-partitioning을
넣으면 캐시메모리 접근 속도가 느려져야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 효과가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나요?”
그래, 이거 질문하려고 그 뻔한 질문들을 한 거구나. 아오.
첫째, 왜 초장부터 부정적인 질문을 해서 다 된 밥은커녕 갓
앉혀 놓은 밥에 재를 뿌리나? 처음에 논문의 핵심을 요약한 건 전체 그림을 그려두고 상세 내용을 들으라는
의미다. 이런 질문 받으려고 멋들어진 비유를 생각해낸 게 아니란 말이다. 비평을 하고 싶으면 끝까지 듣고 나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둘째, 아직 안 나온 정도가 아니라, 아직 첫 장이다. 실험 설정 값들이야 당연히 나중에 보여줄 것이니
그 때 확인해보고 질문하면 될 게 아닌가. 혹시 빼먹고 안 보여준다면,
그 때 따지면 된다.
셋째, 정확한 답변을 하려면 결국 반도체에 직접 구현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에는 매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 분야에서는 직접 구현하지 않고 시뮬레이터를 사용해서 실제 구현 시의 성능 향상을 예측만 해본다. 정확도를
약간 희생하는 대신, 더 다양한 기법들을 시도해보기 위한 것이다. 이걸
잘 알 만한 사람이 왜 묻는 것인가.
넷째, 반도체에 직접 구현을 한다고 해도, 결국 어떤 기술을 사용해 구현하느냐에 따라 캐시 메모리 접근 속도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전자과 연구자들의 전공 분야이다. 우리 분야가 할 일이 아니다. 이것 역시, 알 만한 사람이.
결론적으로,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리고 준상이도 그걸 안다. 나는 그저 논문에 나온 말을 인용할
수밖에.
“음, 논문에
보면, 제시된 기법에서 사용되는 회로들은 critical path에
있지 않아서 캐시 메모리 동작 속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나와 있긴 한데요. 정확하게 알아보려면
반도체에 구현해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네요.”
그렇게도 질문을 안 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이라, 질문에 서투른
걸까? 아니면 나도 그렇게도 질문을 안 하는 우리나라 학생이라서 질문 자체를 싫어하는 걸까?
준상이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어째서
critical path에 없는지, 그 이유는 나와 있나요? 제가 보기엔 critical path일 것 같은데…”
아오, 발표 진행 좀 하자.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논문에서는 그렇게 가정했습니다. 더 질문 없으시면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과학이란 게 공리(公理,
axiom)라는 벽돌로 쌓은 성이다. 말이 좋아 공리지,
‘아주 그럴듯한 가정’일 뿐이다. 공리가 무너지면 그 공리를 기반으로 한 이론들은 무너진다. 반면, 공리가 없다면 아무 것도 쌓을 수 없다. ‘이렇게 가정했다’라는 말은 결국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이다.
논문 스터디는 다 함께 논문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발표 도중에라도 질문을 하는 것이 권장된다. 보통은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배경지식이 부족한 경우에 질문을 한다. 혹은 발표가 끝나고 나서
“이런 방식을 사용해도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요?”라든가 “이런 문제도 파생될 것 같은데, 더 연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은 매우 발전적인, 그러니까 잘하면 후속 논문을 쓸 수도 있을 법한, 질문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유형의 질문들도 많이 나온다.
첫째, 조금만 기다리면 당연히 설명할 것에 대한 질문이다. 예를 들면, 오늘 발표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그러면 탕수육을 어떻게 나누어 먹으면
될까요? 모두가 가장 배부를 수 있도록 나누어 먹자는 것이 이 논문의 목표입니다. 무성이는 많이 먹어야 배부르고, 철수는 조금만 먹어도 배부르며, 한길이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도무지 배가 부르지 않는다고 합시다. 이
때, 무성이에게 탕수육을 많이 주고, 철수는 조금만 주고, 한길이에게는 거의 주지 않는 것이, 한정된 탕수육으로 모두를 가장
만족시키는 방법일 것입니다. 한길이는 많이 줘봤자 배가 안 부를 테니까요. 그러니까 공리주의[5]라 할 수 있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거요.”
그러자 길영이가 질문을 했다.
“그러면,
누가 얼마나 먹어야 배부른지는 어떻게 알죠?”
그것은 바로 다음에 설명할 내용이었다.
예전엔 이런 질문이 참 싫었다. 청소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청소를
시키면 청소가 하기 싫어지는 것처럼.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방법을 찾아냈는데,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 같은 순서대로 설명하기’이다.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 슬라이드를 구성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함께 생활해온 연구실 사람들 대상으로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긴, 이 바닥 사람들 생각의 흐름이 다 거기서 거기긴 하지.
오늘도 다음과 같이 답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대본대로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다음 장을 보실까요?”
둘째, 실험 결과에서 예외의 경우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 분야가 세상의 이치를 하나의 수식으로 표현하길 시도하는 이론물리학도 아니거늘, 어떤 기법이든 늘 예외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한길이는 많이 줘봤자 배부르지 않을 테니 탕수육을 거의 주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일정 양 이상을 먹지 못하면 배가 고파 실신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배부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어제 밤에 먹은 야식도 영향을 미치고, 오늘
마신 물의 양도 영향을 미칠 뿐더러,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밥을 차려준 방식, 현재 몸무게,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등등이 모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왜 예외가 생겼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논문에
설명되어 있는 경우에는 표시해놓았다가 질문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대답해주곤 하지만, 아무 설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저자들도 모르는 거겠지 뭐.
셋째, 논문에 대한 불만 표출이다. 비교 실험이 충분하지 않을 때 자주 나오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탕수육을 나누어 먹는 방법에는 몸무게가 많은 순으로 많은 양을 먹는 방법, 돈을 많이 낸 순으로 많은
양을 먹는 방법, 한 입에 많은 개수의 탕수육을 넣을 수 있는 순서로 많은 양을 먹는 방법 등이 있는데, 왜 이 모든 방법들과 객관적으로 비교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전부 실험하기 힘들어서 안 했겠지. 너
같으면 그걸 다 하고 싶겠냐?”
넷째, “이 논문이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이다. 약간의 장점이 있는 논문이지만 이렇게 좋은 학회에 뽑힌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질문한 사람은 어떤 논문을 썼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비어 있는 내 이력서를 떠올리고, 생각을 멈춘다.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다 지쳤을 때, 최후의 핑계는 이것이다.
“제가 쓴 논문이 아니라서요.”
그러면 한바탕 웃고, 질문이 넘겨진다.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는 내가 쓸 논문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절망한다.
발표를 잘 하고 나면, 허무하다. 다시 한 번 ‘내가 쓴 논문이 아니어서’다. 이 논문처럼 아이디어도
간단하고, 비교 실험도 부족하고 예외 경우도 많은 논문이 출판될 동안,
나는 뭐하고 있었나 싶어서다. 한 시간 남짓의 스터디, 이거
하자고 잠을 줄이고 아침과 점심을 포기했는데, 이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어서다. 물론 좋게 보자면 다른 사람의 공부를 돕는 일이고 스스로도 논문을 자세히 읽는 훈련일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난 언제 졸업하지?
[1]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같은 유명한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음 글에 나와 있다. “창의력의
대가들은 이렇게 아이디어를 얻는다”, 허핑턴 포스트, 2014년 7월 23일,http://www.huffingtonpost.kr/2014/07/23/story_n_5612022.html
[2] Moinuddin K. Qureshi and Yale N.
Patt. 2006. Utility-Based Cache Partitioning: A Low-Overhead, High-Performance,
Runtime Mechanism to Partition Shared Caches. In Proceedings of the 39th Annual
IEEE/ACM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 (MICRO 39). IEEE Computer
Society, Washington, DC, USA, 423-432. 논문스터디에서는 주로 최근 2~3년
안에 나온 논문들을 발표한다. 하지만 본 소설에서는 전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다소 오래된 논문을 인용하였다.
[3] 마이크로(MICRO): 컴퓨터구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회들 중 하나. 정식명칭은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이며, 보통 줄여서 마이크로(MICRO)라 부른다.
[4] 시뮬레이터(simulator): 실제
동작을 흉내 내는 프로그램 혹은 기계. 중앙처리장치(CPU)는
실제로 반도체로 만들어서 테스트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따라서 중앙처리장치(CPU)의 동작을 흉내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새로운 기능 혹은 구조를 추가해 테스트해보며 연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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